"잊고 싶은 기억은 지우고, 갖고 싶은 기억은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너를 만났다."
아마가이 치히로, 마쓰나기 도카.
행복과 불행은 표리일체. 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둘은 비슷했고, 비슷했기에 서로 똑같은 실수를 범합니다.
치히로는 부모가 보여준 행위에 의해 의억을 혐오하게 되었고, 도카는 천식과 타인이 장려한 자기혐오에 의해 의억에 매달려 버립니다.
색종이의 양면처럼 같은 색을 지니나 서로 다른곳을 향하고 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임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상처 받는게 두려운 치히로는 그걸 믿지 않습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명확하게 그으려 하고,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며 밀어내죠.
도카는 그가, 자신이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받는게 두려운 그녀 역시, 키포인트가 될 수 있는 이력서를 끝까지 보이지 않고, 자신이 만들어낸 의억속 나쓰나기 도카를 계속해서 연기하며, 치히로 곁에서 떠나갑니다.
도카가 치히로 곁에서 떠나간 이후, 도카가 하려했던 의도를 알아챈 치히로는 도카를 다시 만나지만, 이미 그녀는 신형 알츠하이머에 의해,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고맙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했던, 그녀는 그가 했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이야기의 끝으로 향합니다.
하다못해 이야기라는 형식 속에서라도 '올바른 여름'을 완전한 형태로 재현해내고 싶다는 발버둥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마음에 적절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금 가벼워지는 법입니다.
- 전화를 걸었던 장소 -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할 법한 그러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기에, 스토리 자체는 너무나 뻔하지만, 뻔하기에 눈길을 끄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상상한 이야기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것을, 소설이라는 형태로 독자에게 다가오니까요.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좀 더 소녀스러운, 로맨틱한 '사랑' 입니다. 영화나 책에서는 흔히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가족애나 성애와는 다른 것으로 취급되는 '그것'입니다.
- 아픈 것아, 아픈 것아, 날아가라. -
이야기속 주인공간의 관계에서 '성' 이라는 요소가 배제되어있다는 점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애를 배제시킴으로서, 두사람의 관계는 성애라는 요소가 작용하지 않는, 당신이 한번쯤은 상상해봤을 그 사랑이다. 라고요.
요컨대, 정신적인 자해 행위를 장려하는 작가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공상은 극약이 되어 조촐한 기쁨을 주는 대신,
내 육체엔 투명한 독액이 쌓여가고 있었다.
-p. 261
잃어버린, 혹은 존재하지 않았을, 그 무언가를 찾기위해 읽은 책이 결국은 더한 고독을 유발합니다.
갈증에 바닷물을 마시는것과 같이.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을 그 무언가를, 그 누군가를 기다리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 작가입니다. 인터뷰에선 "앓고있는 병을 옮기고 싶다." 라고 말하지만,
이미 독자들은 '병'을 치료하기위해 책을 찾고있고, 그 치료를 하면 할수록 차도가 없어짐을 깨닫고, 이내 치료를 포기해버리는.
일종의 신드롬이랄까요.
이번 작품에 대해서는, '기존 작품의 총 망라' 라고 생각합니다.
드문드문 기존 작품에서 이야기 했던 내용들이 읽는 내내 떠올랐습니다.
다른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스타팅 오버, 전화를 걸었던 장소]
백 권에 한 권꼴로밖에 존재하지 않을, 일그러진 내 취향의 책을 책의 바다에서 찾아내기보다 직접 쓰는 편이 훨씬 빠르지 않을까.
올바른 여름. 누가 알려준 적도 없는데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또렷하게 머릿속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그리움을 동반한 여름의 원풍경. 그 비전이 명확하면 명확할수록, 또 그 비전에 자각적이면 자각적일수록, 그리고 그 비전과 자신이 경험해 온 여름과의 괴리감이 크면 클수록 서머콤플렉스는 심각해집니다.
독자분들에게 제가 앓고 있는 병을 옮기고 싶어요.
진짜 기억과 가짜기억,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려지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중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잃어버린 청춘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결국 열다섯에 해야 할 경험은 열다섯에밖에 할 수 없으며, 만약 그때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나중에 얼마나 풍부한 경험을 한들, 열다섯의 내 영혼은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p. 209
[3일간의 행복, 아픈 것아, 아픈 것아, 날아가라]
그들은 불행해질 수단을 숙지하고 있으며, 아무리 축복받은 환경이더라도 반드시 샛길을 찾아내서 능숙하게 행복을 회피해 보입니다. '불행한 나'가 아이덴티티가 된 자에게, 불행하지 않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기쁜 일이 있었을 때, 슬픈 일이 있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쓸쓸해졌을 때, 모든 것이 허무해졌을때. 나는 정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받을 사람도 없는 편지를 써서, 일부러 우표까지 붙인 뒤에 서랍에 넣었다. 비정상적인 행위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자신을 위로할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거짓말쟁이이고, 치히로는 그 거짓말의 의미를 알아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나랑 어울리게 되는 거지. 그리고 난 거짓말이 들통 났다는 걸 알면서도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빤히 보이는 연기를 계속하는거야. 그렇게 모든 것이 딱 떨어지는 관계라면, 안심하고 내 곁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p.179, 180
그 모든 것을 다 겸비한 존재를, 나는 몽상했다. 필연적으로 '그'는 소꿉친구가 되었다.
가족처럼 따뜻하고, 친구처럼 즐겁고, 연인처럼 사랑스러운,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과 일치하는, 굳이 말하자면 궁극의 남자였다. 그때, '그'와 만났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떤 인생을 보내고 있었을까. 그런 공상은 나에게 유일한 피난처였다.
-p.233, 234
[사랑하는 기생충]
나는 이대로 누구와도 사랑하지 못하고 죽는게 아닐까.
내가 죽어도 눈물 흘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게 아닐까.
죽기 전에, 딱 한 번이라도 상관없으니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토닥임을 받고 싶었다. 동정받고 싶었다. 어린아이 대하듯 무조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정하게 포옹받고 싶었다. 내 고독을 100퍼센트 이해해줄 100퍼센트의 남자에게 100퍼센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죽은 후 비통해하며 그 죽음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마음에 각인됐으면 싶었다.
-p. 262
끝으로, 두 사람이 잃어버린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존재할리 없던 사랑을 손에 넣었고, 있지도 않았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행복의 끝을 향해 나아갔으니까요.
그녀와 만났던, 그와 만났던 3개월의 시간은 지난 20년간의 세월보다 가치있었고, 앞으로 살아갈 세월보다 가치있는 기억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