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박씨 이야기
슈테판 슬루페츠키 지음, 조원규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에는 노박이라는 쥐가 나온다. 노박 씨는 부지런한 사람인데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노박 씨는 철학가이자 사색하는 쥐였다. 그리고 감성도 풍부했다.
 어느 날 노박 씨가 싫어하는 일요일에 한 암컷 쥐를 만났고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말 한마디 못 전하고 암컷 쥐를 놓친다. 노박 씨는 그 암컷 쥐가 너무 보고 싶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방황하면서 변한다.
 노박 씨는 스타가 된다. 그리고 이번엔 릴라라는 다른 암컷 쥐를 사랑하게 된다. 암컷 쥐는 노박 씨와 함께 하는 시간들을 즐기지만, 함께 있을 때만 즐거우면 그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노박 씨는 암컷 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고백하지만, 암컷 쥐는 그 때마다 말한다.
 "영원히 라구요 ? 지금 영원히 라고 했나요?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에요. 우리가 함께 있어 즐겁다면 그걸로 된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그냥 끝이라구요."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는 노박이고 하나는 릴라다. 하지만 릴라는 참 이상한 아무래도 연기하게 되는 법이다. 마음에 드는 누군가가 쥐이다. 물론 인간은 타인 앞에 서면 눈앞에 있을 때의 부드러운 미소는 상대에 대한 선물이면서 동시에 연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면적으로 연기를 안 하면 그냥 무례한 녀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은 연기하는 것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의외로 여러 가지 것들을 허용하므로, 약간 정도는 미움 받을 요소가 있다고 해도 전체적으로는 OK 하는 심적 상태가 되는 일도 자주 있기에, 게다가 어쩐지 전면적으로 싫어하는 요소가 아예 없는 경우보다도 그 사랑이 강해지기도 하기에 노박 씨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릴라는 사랑하면서 고작 상대방에게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는 건가?
 나는 릴라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나도 그 쥐를 나쁜 쥐로만 보지 말고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 노력을 했다. 그러나 내가 책을 다시 읽으며 찾은 건 릴라는 노박에게 하나 못해 한 번도 사랑한다고 한 적이 없다는 것 뿐이다. 나는 나 혼자 릴라 쥐가 노박 쥐를 사랑한다고 판단하였는데 찾아보니 그 근거는 말이 잘 통했다는 것, 그리고 그 쥐들이 서로 입을 맞추었다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상대방이 나와 같은 마음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라 참 불공평하다. 그런데도 노박 씨가 그러한 것처럼 사랑을 다른 사람이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또 참 얄밉기만 하다. 마음이란 타인에게 전해지기도 하고 전해지지 않기도 한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하는 마음이 전해진다면 엄청 기쁘다. 그러니 기대하는 것 같다. 가끔 전해지지 않으니까 문제다. 정말 슬프다.
 하지만 어찌됐던 사랑하는 마음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감정은 타인에게 있어선 딱히 쓸데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거야 상대는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전에 TV에서 보니 의료종사자들은 환자가 절단되어서 존재하지 않는 다리의 고통을 주장해도 그걸 실재하는 고통으로 인정하더란다. 고통을 느낄 신경도 없는데 말이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그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도 어쨌든 인정해야만 하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또한 그런 것 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최근 심보선의 시집을 봤는데 삼십 대라는 시에 이렇게 써있다.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심보선『슬픔이 없는 십오 초』)

 자신의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마음속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서른 살이 되어도, 아닌 걸 뻔히 아는 불신 속에서도, 한 가닥 바람 같은 것들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