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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개발자들 - 알려지지 않은, 치열했던 여성 에니악 개발자 6인의 이야기
캐시 클라이먼 지음, 이미령 외 옮김 / 한빛미디어 / 2023년 8월
평점 :

<사라진 개발자들>른 흑백 사진에서 비롯된 궁금증에서 출발한 이야기이다. 저자인 캐시 클라이먼이 마주한 에니악 사진 속 여성들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저 단순히 모델이 아닌 것 같았다. 사진 속 그녀들의 눈에는 기계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마치 조작법을 아주 잘 아는 듯 당당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캐시 클라이먼은 이 여성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책은 저자가 찾아낸 그녀들, 에니악 6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동안 <히든 피겨스>, <세상을 바꾼 변호인> 등 여성들의 활약을 다루는 실화 기반의 영화들을 많이 보던 시기가 있었다. 그 속의 여성들은 충분히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자 본인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과 사회적 제약에 맞서야 했다. 하지만 그 숱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자신의 꿈, 자신의 재능을 피우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참 좋았다.
책을 읽기 전 줄거리를 보자 자연스레 영화 <히든 피겨스>와 <이미테이션 게임>이 함께 떠올랐다. 두 영화 모두 꽤 좋아하는 영화이기에, 이 두 영화가 다루는 메시지나 분야와 꽤 관련이 있어보이는 <사라진 개발자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지, 또 어떤 인상을 내게 줄 지 궁금해졌다.
마치 소설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구술 역사서의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책이다. 책 속의 '실제인물'들의 회고가 굉장히 많이 녹아있다.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이름이 같고 성이 다른 경우도...) 독자를 도와주기 위함인지 책 앞 부분에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에 대한 설명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또 책의 뒷부분에는 실제 인물들의 사진과, 책 속에서 소개하는 내용을 시각자료로 볼 수 있는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고 더더욱 그들의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전통적인 '여성'과 '남성' 업무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진 즈음이었다. 수학, 공학, 과학을 전공한 여성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활짝 열렸다. 탄도 궤도 계산을 위해 여성 수학 전공자에 대한 긴급한 수요가 있었고, 책 속의 에니악 6인은 그것을 계기로 컴퓨터 업무에 투입되었다가 군 기밀 프로젝트로 제작된 에니악의 프로그래머가 되고, 본인들도 예상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프랜, 케이, 베티, 말린, 루스, 진. 무어 스쿨, 탄도 연구소, 에니악을 위한 탄도 궤도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였다. 그들은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전전자식 범용 컴퓨터의 프로그래밍을 배우라는 아직 누구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야했다.
책은 물론이고 그들을 가르칠 자료가 아무 것도 없었다. 도면과 다이어그램만을 가지고 에니악 유닛들의 작동 방식과 프로그래밍 방법을 그들끼리 알아내야 했다. 그들은 아직 에니악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보안 허가를 받지 못했다. 다이어그램을 연구하고, 볼 수 있는 문서가 극히 적은, 마치 길을 잃은 듯한 상황이었다.
혼자 터득하고, 각자가 얻은 지식을 팀과 공유하며 그녀들은 결국 해내었다. 에니악 유닛을 서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섯 여성은 몇 번이고 다시 모여 각자 연구한 내용을 공유했다. 독학으로, 그리고 서로를 통해 새로운 유닛을 배우면서 한 팀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비로소, 마침내. 그들은 에니악과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눈에 담으면서 지식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의 그녀들이 느꼈을 심정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들은 치열하게 연구하고 알아내며 에니악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갔다. 정부가 귀환병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여성들에게 직장을 떠나라고 장려하는 캠페인을 펼칠 때도 에니악과 함께한 그녀들, '에니악 6인'은 달랐다. 이들이 갖춘 기술을 가졌거나 대체할 수 있는 귀환병은 없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들이 프로그램을 가동하며 문제가 생긴 진공관을 발견해내기도 하고, 발생하는 버그들을 수정하는 부분이었다. 꼭 지금도 여러 프로그래머들이 경험하는 듯한 익숙한 시행착오를 거치기도 하는 부분이 보였다. '여성 개발자들의 이야기니까 다르지 않을까?'라고 무의식 중에 할 수 있는 생각과는 달리 그들은 그저 본인들이 애정하는 분야와 꿈을 위해 치열하게 헌신하는 '능력있는 훌륭한 프로그래머'였다.
책 전반에서 보이는 여성들을 대하는 그 당시의 분위기가 불편했다. 에니악 프로젝트 이전에는 에니악 6인 말고도 상당히 많은 여성 컴퓨터들이 있었다(그 당시 컴퓨터는 현대의 도구가 아니라 계산수를 말한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젊은 여성과 함께 일하기를 꺼렸고, 가르치기를 싫어했다.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무어 스쿨의 남학생들은 이들에게 질나쁜 장난을 치곤 했다.
또 에니악이 세상에 발표되었을 때, 또 에니악의 시연일인 1926년 2월 15일. 두 차례 모두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에니악 6인에게 주목하지 않았고, 연구에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게 모르게 묻혔다. 심지어 '개발자', '프로그래머', '연구팀의 일원'이 아니라 '접대원'으로서 참여해야 했다.
'탄도 궤도를 프로그래밍한 젊은 여섯 여성의 이름을 언급할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청중은 수천 시간을 들여서 에니악 유닛을 배우고, 직접 프로그래밍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탄도 궤도를 개별 단계로 나누고, 탄도 궤도 프로그램을 위해 상세한 페달링 시트를 작성하고, 에니악에 프로그램을 설정하고, 에니악을 진공관 수준까지 학습한 이들의 업적을 알지 못했다.'<p. 268>
그녀들은 조용히 자축해야 했고, 불합리한 대우 또한 불이익을 받은 그녀들이 이해해보고자 노력해야만 했다. 그녀들이 에니악과 관련된 일을 하며 즐거움을 느꼈다곤 하지만, 언제나 가슴 뿌리 깊이 씁쓸함은 남아있을 터였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한 채로, 그녀들은 캐시 클라이먼이 그녀들에 대해 알아보기 전까지 그저 '모델'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에니악 6인', 여섯 여성은 현대 컴퓨터 분야 최초의 직업 프로그래머였다. 이들의 기록을 담아낸 이 책 <사라진 개발자들>을 통해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의 시작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기술 분야와,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의 위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또 여러 영화와 매체들에서 목격한 바와 같이 이 책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꿋꿋이 자신들의 능력을 피워낸 이들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차별이 만연하는 사회에서도 본인의 재능을 피워내고 활약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에니악 및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직접 읽고 주관에 따라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