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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는 사기 - 사기 속 3천 년 역사를 한권에 담다
시마자키 스스무 지음, 전형배 옮김 / 창해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국사나 세계사는 점심시간 후 5교시 수업 이미지다. 창문 안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풀풀 날리는 먼지들이 보인다. 조용한 교실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사건 연도와 주요 인물, 역사적 의의 따위를 칠판 가득 판서하는 선생님의 분필 소리뿐. 졸음이 쏟아진다. 그래서 간혹 역사를 좋아한다는 친구를 만나면, ‘아니, 많고 많은 과목을 놔두고 왜 하필 역사를 좋아해?’라고 묻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진이니 한이니, 한 글자 이름의 나라 이름이 쭉 이어지는 중국사는 잘 외울 수도 없어서 특히나 더 싫어했었다. 어렸을 때 기억이 강렬했는지 다른 역사책들은 곧잘 읽게 된 지금까지도 중국사는 별로 흥미가 일지 않았다.

아무리 고전(역사적 가치가 있는 책)이라지만 중국사에 대한 지식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 사기의 고갱이를 편년체 방식으로 재구성한 <단숨에 읽는 사기>를 책을 읽으려니, 처음엔 고사성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와신상담’ ‘관포지교’ 같은 사자성어에 얽힌 사연을 따라가다 보니, 외우기 힘들던 인물과 사건들이 차차 들어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의 지식은 사마천 하면 사기, 공자 하면 논어와 군자, 진시황 하면 분서갱유와 불로초처럼 단편적인 것에 그쳤다. 그런데 사기의 구성, 공자와 기린의 관계, 진시황 같은 유명한 왕들에 얽힌 사건 등 의외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접하고 나자 삼황오제나 중국의 봉건제도가 서양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 지식을 쌓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어졌다.

오래 묵은 선입견을 버리고 읽게 된 책에는 좋은 얘기들만 적혀 있지는 않았다. 현명하게 나라를 잘 다스린 성군에 대한 기록도 있었지만, 그 후엔 반드시 나라를 망친 폭군이 등장했다. 틈만 나면 남의 나라를 탐내고, 배신과 이간질, 증오와 폭력이 넘쳐난다. 사마천은 2천 년 전 좋은 일을 권하고 나쁜 짓은 되풀이하지 말라고 이 책을 남겼을 텐데, 우리는 과연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그다지 변한 게 없는 요즘 세태를 떠올리자 씁쓸함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나 당장 보기 싫다고 잘못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반성과 성찰이 없는 세상, 언제나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세상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옛날 중국 사람들과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다 보니 과거니 미래니, 중국이니 한국이니 하는 시․공간적 경계는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 사실 얼마 전까지 옛날 사람들 이야기는 나와 동떨어진 듯 여겼다. 심지어 그들의 역사가 판타지 소설처럼 읽힐 때도 있었다. 수천 년 전 그들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이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동안 마음속에 굳건히 서 있던 경계의 벽이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혹은 그동안 점처럼 동떨어져 있던 지식, 사람들이 선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세상이 한층 더 넓고 깊어진다.

대학 졸업 때까지 역사는 시험을 보기 위한 과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입시, 학점, 취직 등 여태껏 눈앞에 놓인 허들을 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러다 보면 모든 독서가 수단이나 과제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책이든 읽고 사색해서, 진짜 내 것으로 소화해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내 안의 점들을 선으로 잇는 작업이 아닐는지?『단숨에 읽는 사기』를 통해, 역사책을 읽어야 하는 나만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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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부터 청개구리로 유명했다. 가족들이 말을 걸면 듣지도 않고 ‘싫어’, ‘아니’로 대답하고, 좋아했던 가수도 인기가 높아지면 꼴도 보기 싫어졌다. 많은 관객이 들었다고 뉴스에 소개되면 아무리 보고 싶었던 영화라도 시시해진다. 그러니 남들이 꼭 읽으라고 하는 책도 안 읽었다. 그렇게 논어를 읽지 않은 채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철이 들고 나서부터 친다면 말이다). 몇 년 전, 아직 논어를 읽지 못했다는 나의 말에 한 선배가 당황한 표정으로 “원문으로 읽지 않았다는 말이겠지?” 하고 되물었던 적이 있다.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냥저냥 넘겼더랬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단단히 쌓아 온 반항심 때문인지 책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괜히 공자의 가르침에 태클을 걸고 싶어졌다.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라는 말은 가족, 자기 사람만 챙기라는 뜻인가?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정치를 한다는 거지? 그래놓고 나중엔 왜 가까운 근심보다 먼 근심을 하래? 모순투성이잖아.’ 만약 내가 춘추시대 공자 제자였다면 너 같은 바보는 필요 없다며 진즉 쫓겨났으리라. 공자 말씀도 의심하는데, 저자 말이라고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짧은 한문 실력으로 책 읽는 내내 해석을 의심하며 원문을 읽어보겠다고 나서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가자 머리와 마음을 때리는 문장들이 참 많았다. “문으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以文會友 以友輔仁)”와 연대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그동안 싸구려 동정심으로 위선을 행하던 나의 모습을 반성했다. 그동안 나의 문제점이라 여기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구절을 발견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이밖에도 “朋友數 斯疏矣[붕우삭 사소의]” “惡不孫以爲勇者[오불손이위용자]” 같은 말들은 버릇없고, 예의 없는 내가 머리와 가슴에 깊게 새겨둘 말이다.

책을 읽고 나니 아무리 청개구리인 나라도 적어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이 읽고, 좋아하고, 추천하는 책은 믿고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이 책, 『좌파논어』에 따르면 공자 역시 오래된 것을 믿고 또 좋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오래된 것을 배척하고, 새로운 것을 쫓기 바쁜 분위기에선 다소 구닥다리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공자의 생각이 맞다. 오래된 책들은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一以貫之)”. 읽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읽을수록 다른 묘미를 느껴 곁에 두고 여러 번 찾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영원한 신간’이다.

책 읽는 데 좌파, 우파 따위의 구분이 중요할까? 전공 학자들이 보면 황당무계하겠지만, 나는 “가르침이 있으면 종류가 없다(有敎無類)”는 공자 말씀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생각하고 싶다. 좋은 책을 두고 내 책, 네 책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애초에 편을 나누어 읽어야 하는 책은 좋은 책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남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소인들은 좌파 우파를 떠나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들에게 『논어』를 한 권씩 선물해 주고 싶다.

 

+) 뒤표지 첫줄은 잘못된 거겠지? ㅜㅜ 처음에 책 받아보고 완전 헷갈렸음.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뒤표지 첫줄)

    ->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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