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 10 - 너에게로 가는 길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10
황석영 엮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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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작가의 작품을 한 데 모은 단편집을 오랜만에 읽었다. 고등학생 시절, ‘한국 명단편선따위의 이름이 붙은 책들을 강제로 읽고 독후감을 써내야 했던 불쾌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때문이다. 또 나이가 들고 이상한 편집증 같은 게 생기면서 다른 색깔의 것들이 섞여 있는 느낌이 불편할 때가 있어 요새는 읽더라도 한 작가의 단편집을 읽는 때가 많다. 하지만 <한국명단편 101> 10권에 실린 열한 개의 작품은 모난 데 없이 술술 읽혀 마치 하나의 노래처럼 느껴졌다. (약간의 과장이 보태졌지만 작품을 잘 선정한 것 같다는 얘기다.)

선정된 소설들은 현대의 소설이니만큼 주변의 사연들을 원고지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 강했다. 물론 그 속엔 나의 모습도 곳곳에 숨어 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 사는 모습은 내가 가장 모르는 법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보면서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 나는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라고 말이다.

편혜영 작가의 <저녁의 구애>를 읽으면서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의 한 시절과 겹쳐졌다. 소설 속 주인공이 죽음을 바라는 대상은 어려운 시절 호의를 베풀어 주었던 옛 은인이다. 하지만 피곤함과 몇 가지 불편함 때문에 주인공은 무심코 아직 죽지 않았다고?” 라고 반문할 정도로 간절히 어르신의 죽음을 바란다. 나 역시 그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다. 죽음으로 완성된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의 논문을 쓰고 싶어서 좋아하는 작가의 노벨상 수상보다 죽음을 바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그때의 언행이 오싹한 것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나는 언제부터 나의 작은 목적을 위해 누군가의 죽음이나 불행을 바라게 되었을까?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각박해진 나의 모습을 되짚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기호 작가의 작품은 이 단편집을 통해 처음 읽게 되었다. <수인>. 산골에 처박혀 소설을 쓰느라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해 나라가 망한 줄도 모르는 소설가의 이야기다. 작품 속 소설가는 다른 나라로 떠나기 위해(자신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하기 위해) 서점의 두꺼운 시멘트벽을 기약도 없이 곡괭이로 부숴야 한다. 평소 같았으면 다소 식상한 비유라 촌스럽다 여겼을 테지만,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계속 의심하면서도 곡괭이질을 멈추지 않는 소설가의 모습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이든 만 시간을 반복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둥의 자기계발서식 문장은 이제까지 내가 혐오하던 유의 얘기였다. 나는 그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어, 불어도 못하고, 배관기술이나 병아리 감별 자격증, 대형운전면허와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도 없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오로지 책 만드는 일밖에 없는 나에게 소설에서 곡괭이로 시멘트 벽을 부수는 소설가의 모습은 위로와 격려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렇게 오싹하고 치열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면 지금 하는 일을 진작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고단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던 힘 또한 담겨 있다. 김중혁 작가는 예전 김연수 작가의 친구로 소개되던 때부터 좋아했다. 단편집에 실린 <엇박자 D>는 읽을 때마다 H20<오늘 나는> <고백을 하고>를 흥얼거리게 된다. 남들과 다르기를 갈망하면서도, 또래 속을 떠나지 못하던 사춘기 시절, 내게도 엇박자 D’ 같은 동급생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나름 학교에서 유명한 음악 매니아였다. H.O.T를 필두로 소위 아이돌 문화가 시작된 시기였지만, 다른 애들과 다르고 싶었던 탓에 그런 음악은 시시하게 여겼다. 당시에는 불법이었던 일본의 음악들과 서양 밴드들의 음악, 아니면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추천해준 인디 음악 CD를 몇 십장씩 가지고 다니며 들었는데, 어느 날 반에서 이상한 애로 낙인찍혀 있던 아이가 아는 척을 해 왔다. 그 애는 항상 삐삐 롱스타킹처럼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다니고 항상 양 볼을 붉게 화장하고 다녀서 반 아이들이 약간 또라이취급을 하던 애였다. 그 아이의 쓸모는 학급별 장기자랑을 할 때뿐이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자우림 노래를 아주 그럴싸하게 잘 불렀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좋아하는 가수나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걸어 왔지만,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항상 거리를 두었더랬다.

그런데 몇 년 전 신문에서 그 아이를 홍대 여신중 한 명으로 소개하는 기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모질게 굴었던 내 행동에 대한 미안함이 이 아이한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구나하는 안도감으로 상쇄되었다.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이 아주 멋져 보여서 저절로 응원하고 있다. (나중에 노래를 들어보니 내 취향은 아니어서 가수만 응원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음악은 내 생활의 활력소다. 출퇴근 시간이나 집에 있을 때에도 항상 라디오나 CD 플레이어를 켜두기도 하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찾아다닌다. 공연장에서 듣는 음악은 그때 거기에서밖에 들을 수 없어서 더 특별하기 때문이다. <엇박자 D>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소설 속 가상의 공연장의 그 고조된 분위기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또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그 친구와 재회한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제법 따뜻해진다.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읽고 나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어둡고 무거운 소설이 대부분이지만 가볍고 밝은 것들도 섞여 있어 내 인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길고 큰 고통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즐거움. 모르고 지냈던, 혹은 깜박 잊었던 나 그리고 우리의 모습들을 책을 읽는 동안 다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이런 게 소설의 힘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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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ann22 2019-09-0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무척 좋네요. 이런 댓글 처음이에요.
 
부자가 천국 가는 法 -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불평등에 관한 논쟁
폴 크루그먼 외 지음, 양상모 옮김 / 오래된생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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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급여명세서를 받아보았을 때, 밀물같이 밀려들던 감격은 가장 아래쪽의 세금란을 보는 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말았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무려 10% 씩이나 떼어가다니!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신문에서 정치경제면을 조금이라도 읽기 시작한 때가.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학 시절 일본에서 잠깐 머물 때도 물건을 살 때마다 소비세 5%(지금은 8%로 인상되었다는 얘기도 들은 듯하다)를 별도로 내야 했다. 항상 동전을 챙겨 다녀야 하는 불편함은 별도라 치더라고, 작은 금액이지만 내 돈을 빼앗기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불평하는 나에게 한 선배가 우리나라 부가가치세 10%의 절반이지 않느냐며 다독거려줬다.) 한 푼이 아쉬운 서민 입장에서 세금은 안 낼수록 좋겠지만, 어디 나라 살림이 돈 없이 되는 일이던가.

오늘날의 국가는 많은 세금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세금으로 몇 안 되는 왕족과 귀족, 관리 들만 먹여 살리면 되었지만, 이제는 바야흐로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를 세워야 한다. 자연재해나 전쟁을 대비함은 물론, 도로나 건물 같은 사회 기반도 만들고 고쳐야 한다. 또 노인과 장애인 같은 사회 취약층을 위한 최소한의 생활비도 지원해 줘야 하고, 실업자들에게도 재취업할 때까지 적절한 직업 교육해주기도 한다. 명목을 따져 보면 불필요한 곳은 없고 죄다 부족한 곳뿐이니, 사람들은 그저 사회의 보호막이 조금이라도 촘촘해지길 바라며 일종의 보험처럼 세금을 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4~5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철에 가장 중요한 이슈는 세금과 복지다. 어릴 적에는 잘 몰랐지만, 막상 돈을 버는 입장이 되고 보니 100원도 아쉬울 때가 많고, 나라에서 세금을 내는 나에게 어떤 혜택을 줄 수 있는지 따지게 된다. 많은 후보가 세금은 적게 내고 복지는 늘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며, 한 푼이 아쉬운 서민의 마음을 현혹한다.(사람들은 알면서도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부자가 천국 가는 법은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즉 부족한 세금과 부족한 복지 문제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는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논의를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쪽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내라고 하면, 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절세를 해서 결과적으로 지금보다 더 세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었다(뉴트 깅리치와 아서 래퍼). 진짜로 그럴까? 그러고 보니 자본가들에 사이코패스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더 많은 돈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에 그 말을 들으면서 진짜 그런 사람이 있을까? 진짜 그렇게까지 해야지만 성공을 하는 걸까?’라고 대경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뉴트 깅리치와 아서 래퍼의 주장은 다 같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 세금을 내고 있는 사람들을 무능력자로 여기는 발언처럼 읽혔다. 하지만 곧 우리 사회에도 세금을 많이 내면 바보라고 여기는 생각이 만연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씁쓸한 일이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런데 내 결론은 간단했다. 부자든 아니든, 누구나 자신의 돈이 쓸데없는 곳에 쓰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이 있다. 가령 몇 백 억, 몇 천 억 같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커다란 건물들을 지어 대면서 학생들의 급식비는 지원할 재정이 없다고 하는 도지사나 시장, 본인을 위해선 몇 억짜리 피트니스 기구들을 사면서 국민들의 건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통령. 그들이 쓰는 세금은 자신의 개인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아닐 진데 가만 보면 꼭 그 돈을 자기 돈처럼 생각하는 듯싶다.

그렇게 따지면 무엇보다 세금을 내 봤자 공직자들의 사리사욕을 채울 뿐이라는 사회적 불신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 싶다. 당장 나부터도 ‘4대강에 쏟아 부었던 돈이면 무상 급식을 열 번도 더 했겠다따위의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허투루 쓰이는 돈을 줄이고 없애면, 사회에 돌아가는 몫이 더 커진다. 대통령의 소득 없는 해외 순방을 줄이고 저소득층을 지원하면, 사회의 안정성이 높아진다. 어린이, 노인을 위한 복지를 확대하면 중장년층의 부담이 줄어든다. 그렇게 차차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다면 세금을 더 내도 된다는 국민의 인식이나 사회 분위기가 형성될 게 분명하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을 사려면 적어도 며칠은 공부를 해야 한다. 보조금은 어떤 경우에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지, 대리점의 권유에 현혹되지 않고 어떤 요금제를 택해야 하는지, 다양한 멤버십 혜택은 어떻게 찾아 써야 하는지 등등. 정보는 점점 더 복잡해져서 공들여 찾아보고 핸드폰을 사지 않는 사람은 호구 취급당하기 마련이다. 기업은 소비자들을 속이지 않으면 이익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소비자들은 따로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불필요한 돈을 내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나라에서 단통법을 만들었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 상황은 예전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사회 곳곳에도 이런 비상식적인 문제가 많다. 국민들은 세금이 투명하게 쓰이고 있다고 믿지 못하고, 국가는 기업이나 국민이 세금을 정직하게 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기업은 탈세 등의 방법으로 비자금을 만들고, 이런 비자금으로 정부 모처에 이런저런 로비를 한다. 서로 속고 속이는 불신의 굴레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이미 답을 알고 있어 더 어려운 문제다. 부패의 사슬을 끊는 정직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든다면 불신의 벽은 낮아질 터이다. 국가-기업-국민, 서로 간의 불신을 해소하고 함께 도와야지만 지금의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사회적 공감이 절실하다.

생각해 보면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처럼 새로운 전환기를 맞을 때마다 우리는 좀 더 정직하고 상식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굴곡을 지나왔다. 사이코패스가 무서운 이유도 상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비상식을 바로잡을 때가 아닐까.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는 국가, 내가 낸 세금이 나중에 나에게 돌아올 거란 믿음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살고 싶다. (아참, 우리 사회의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하게 하려면 표지 디자인과 제목은 꼭 바꿨으면 좋겠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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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철학수업 - 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5
이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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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세미나에서 가장 싫어했던 시간은 질문시간이었다. 매주 돌아가면서 한 명씩 발표를 하는데, 그날의 발표자가 열 장 정도의 소논문을 나눠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프린트물을 조용하고 빠르게 (다시 말해 웅얼웅얼) 읽어 내려간다. 기계적인 발표가 끝나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질문을 해야 한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더듬더듬 궁금하지도 않았던 걸 의무적으로 묻는 것보단 차라리 발표하는 쪽이 편할 때도 있다. 내 순서가 되기 전에는 항상 심장이 쿵덕쿵덕 뛴다. 당혹스런 마음에 바보 같은 질문을 쏟아내면 한참 뒤에야 ‘이런 질문을 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기 마련이다.

나만 이런가 싶어 다른 친구들에게도 사정을 물어보니, 의외로 다들 비슷하다고 한다. 전날 미리 발표문을 보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차라리 혼자 차분히 읽을 시간을 주면 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을. 즉석에서 만들어낸 질문이 좋은 질문일 리도 없다. 무슨 질문을 하는지도 모르고, 빙빙 돌려가며 말을 늘려 그럴싸하게 포장해 대충 질문을 하고 나면, 내 차례가 지났다는 안도감에 어떤 답변이 돌아오는지 상관하지 않을 때도 있다. (물론 매주 이런 식은 아니었다.)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 입학했지만, 실상은 시간에 쫓겨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의무적인 질문을 뽑아내기 바빴다. 『삶을 위한 철학수업』에 나온 표현을 빌자면 “내 삶의 속도와 내가 사는 속도 간에 간극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꽤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말투도 느리고, 행동도 굼뜨다. 게다가 이해 속도도 더딘 듯싶다.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읽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제대로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질문을 해야 하는 시간은 내게 큰 스트레스였다. (이런 고민을 얘기했더니 교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수면 시간을 줄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도 비슷한 의문이 일었다. 나는 ‘진짜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나는 지금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살고 있을까?

이 책은 참된 나, 자유로운 나로 살기 위한 스무 가지 방법을 말한다. 고통을 피하지 말고 대면하자, 살면서 부딪히는 부정적 사고(事故)를 긍정적 사건(事件)으로 만들자, 수동적인 삶을 능동적인 삶으로 바꾸자,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자, 헝그리 정신과 궁상을 구별하자 등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요약해놓고 보니 흔하디흔한 책처럼 보이지만, 가벼운 문장은 한 줄도 없다.) 내용 가운데 가장 동감했던 부분은 우리의 삶과 속도에 관한 부분이었다. 저자는 지금 우리가 “빨리빨리”의 세상, 가속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며, 나를 옥죄고 구속하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의 속도’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삶의 속도를 나에게 맞춰 조절하면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만들고, 춤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속도는 시간 문제와 직결된다. 다른 일들을 빨리 처리해 버리면 나에게 쏟을 시간이 많아질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착각이다. 빨리 살아갈수록, 더 많은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탈리아에는 “시간에게 시간을 주라(Dare tempo al tempo)”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본래는 ‘어렵고 중요한 일일수록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라는데, 내게는 여유로운 삶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 사람들은 지나치게 바쁘게 살고 있다. 정류장에 미리 나가 버스를 기다리는 것을 어리석다 말하고, 길을 걸을 때조차 걷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거나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자칭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나지만, 며칠 전 운전을 시작하면서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딱히 급하지도 않은 길인데 무심코 계기판을 보면 속도가 100km/h를 넘어 있고, 전에는 기분 좋게 산책 겸 걸어 다녔던 길도 이제는 차를 끌고 가고 싶어 한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삶의 곳곳에서 과속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일의 전후나 내 마음을 살피지 않고 성급히 화를 내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순간의 분을 못 참고 다짜고짜 화를 내놓고 다음 날, 그다음 날에야 ‘아차, 내 잘못도 있었구나’ 하는 민망한 경험도 겪는가 하면, ‘찬찬히 잘 얘기했으면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남에게 떠밀려 선택을 했다가 후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사귀면서 알아가자는 말에 덜컥 시작했다가 끝이 안 좋았던 연애 경험 말이다. 어찌 보면 내 마음을 천천히 깊게 살피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피아노건 첼로건 기타건 어떤 악기를 배우든지 선생님들은 항상 느리게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신다. 빠르게만 연주하다 보면, 정확한 연주도 불가능할 뿐더러 나중에 느린 곡들은 연주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조금이라도 멜로디가 손에 익으면 빠르게 연주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 자꾸만 손이 다급하게 움직인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속도를 무시하고 의욕만 앞서다 보면 반드시 손가락이 엉키고, 어딘가 틀리고, 곡을 망친다. 곡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느리고 정확하게(largo, deciso)’ 연주하는 게 우선이다.

이제 빠르게 사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남들 하는 대로, 남의 속도에 맞춰 별 생각 없이 살면 되니까. 하지만 나의 속도보다 빨리 떠밀리며 살아가다 보면 발이 엉켜 넘어지고, 과속해 사고가 난다. 앞에서도 음악 얘기가 나왔지만, 참 신기한 것이 빠르게만 연주하는 사람들은 느린 곡을 잘 연주하지 못하는 반면(,) 느린 곡을 잘 연주하는 사람들은 빠른 곡도 곧잘 연주한다는 사실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빠르게 사는 법만 아는 사람은 느리게 살 수 없겠지만, 느리지만 명확하게 생각하며 사는 법을 익힌 사람은 완급을 조절해 가며 멋진, 혹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터이다. 내 삶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동안 철학은 아무리 인간과 삶을 말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이야기였다. 항상 궁금했다. 왜 나는 좋은 이야기를 듣고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까? 왜 나의 감동은 한순간에 그칠까? 그런데 이제 답을 알 듯싶다. 어쩌면 그동안은 책의 내용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침잠하고 사색하는 시간 없이 남들의 속도에 맞춰 바쁘게 살아 온 탓은 아닐까? 오늘부터 내 삶을 ‘느리고 정확하게’ 연주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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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 내가 부른 그림 2
이영훈 노래 / 미러볼뮤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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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도 그렇지만, 이영훈 노래는 밤에 혼자 듣기에 참 좋은 것 같아요.
2집 아트웍도 왠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호했던 느낌이 잘 표현된 것 같아서
요새 무한반복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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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 그림책은 내 친구 38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논장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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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다시 만난 그림책!
어린 시절 정말 좋아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던 그림책인데
이제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로타가 자전거를 선물받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제 가슴까지 두근거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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