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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철학수업 - 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5
이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평점 :
대학원 세미나에서 가장 싫어했던 시간은 질문시간이었다. 매주 돌아가면서 한 명씩 발표를 하는데, 그날의 발표자가 열 장 정도의 소논문을 나눠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프린트물을 조용하고 빠르게 (다시 말해 웅얼웅얼) 읽어 내려간다. 기계적인 발표가 끝나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질문을 해야 한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더듬더듬 궁금하지도 않았던 걸 의무적으로 묻는 것보단 차라리 발표하는 쪽이 편할 때도 있다. 내 순서가 되기 전에는 항상 심장이 쿵덕쿵덕 뛴다. 당혹스런 마음에 바보 같은 질문을 쏟아내면 한참 뒤에야 ‘이런 질문을 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기 마련이다.
나만 이런가 싶어 다른 친구들에게도 사정을 물어보니, 의외로 다들 비슷하다고 한다. 전날 미리 발표문을 보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차라리 혼자 차분히 읽을 시간을 주면 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을. 즉석에서 만들어낸 질문이 좋은 질문일 리도 없다. 무슨 질문을 하는지도 모르고, 빙빙 돌려가며 말을 늘려 그럴싸하게 포장해 대충 질문을 하고 나면, 내 차례가 지났다는 안도감에 어떤 답변이 돌아오는지 상관하지 않을 때도 있다. (물론 매주 이런 식은 아니었다.)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 입학했지만, 실상은 시간에 쫓겨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의무적인 질문을 뽑아내기 바빴다. 『삶을 위한 철학수업』에 나온 표현을 빌자면 “내 삶의 속도와 내가 사는 속도 간에 간극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꽤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말투도 느리고, 행동도 굼뜨다. 게다가 이해 속도도 더딘 듯싶다.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읽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제대로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질문을 해야 하는 시간은 내게 큰 스트레스였다. (이런 고민을 얘기했더니 교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수면 시간을 줄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도 비슷한 의문이 일었다. 나는 ‘진짜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나는 지금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살고 있을까?
이 책은 참된 나, 자유로운 나로 살기 위한 스무 가지 방법을 말한다. 고통을 피하지 말고 대면하자, 살면서 부딪히는 부정적 사고(事故)를 긍정적 사건(事件)으로 만들자, 수동적인 삶을 능동적인 삶으로 바꾸자,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자, 헝그리 정신과 궁상을 구별하자 등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요약해놓고 보니 흔하디흔한 책처럼 보이지만, 가벼운 문장은 한 줄도 없다.) 내용 가운데 가장 동감했던 부분은 우리의 삶과 속도에 관한 부분이었다. 저자는 지금 우리가 “빨리빨리”의 세상, 가속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며, 나를 옥죄고 구속하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의 속도’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삶의 속도를 나에게 맞춰 조절하면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만들고, 춤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속도는 시간 문제와 직결된다. 다른 일들을 빨리 처리해 버리면 나에게 쏟을 시간이 많아질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착각이다. 빨리 살아갈수록, 더 많은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탈리아에는 “시간에게 시간을 주라(Dare tempo al tempo)”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본래는 ‘어렵고 중요한 일일수록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라는데, 내게는 여유로운 삶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 사람들은 지나치게 바쁘게 살고 있다. 정류장에 미리 나가 버스를 기다리는 것을 어리석다 말하고, 길을 걸을 때조차 걷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거나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자칭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나지만, 며칠 전 운전을 시작하면서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딱히 급하지도 않은 길인데 무심코 계기판을 보면 속도가 100km/h를 넘어 있고, 전에는 기분 좋게 산책 겸 걸어 다녔던 길도 이제는 차를 끌고 가고 싶어 한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삶의 곳곳에서 과속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일의 전후나 내 마음을 살피지 않고 성급히 화를 내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순간의 분을 못 참고 다짜고짜 화를 내놓고 다음 날, 그다음 날에야 ‘아차, 내 잘못도 있었구나’ 하는 민망한 경험도 겪는가 하면, ‘찬찬히 잘 얘기했으면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남에게 떠밀려 선택을 했다가 후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사귀면서 알아가자는 말에 덜컥 시작했다가 끝이 안 좋았던 연애 경험 말이다. 어찌 보면 내 마음을 천천히 깊게 살피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피아노건 첼로건 기타건 어떤 악기를 배우든지 선생님들은 항상 느리게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신다. 빠르게만 연주하다 보면, 정확한 연주도 불가능할 뿐더러 나중에 느린 곡들은 연주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조금이라도 멜로디가 손에 익으면 빠르게 연주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 자꾸만 손이 다급하게 움직인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속도를 무시하고 의욕만 앞서다 보면 반드시 손가락이 엉키고, 어딘가 틀리고, 곡을 망친다. 곡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느리고 정확하게(largo, deciso)’ 연주하는 게 우선이다.
이제 빠르게 사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남들 하는 대로, 남의 속도에 맞춰 별 생각 없이 살면 되니까. 하지만 나의 속도보다 빨리 떠밀리며 살아가다 보면 발이 엉켜 넘어지고, 과속해 사고가 난다. 앞에서도 음악 얘기가 나왔지만, 참 신기한 것이 빠르게만 연주하는 사람들은 느린 곡을 잘 연주하지 못하는 반면(,) 느린 곡을 잘 연주하는 사람들은 빠른 곡도 곧잘 연주한다는 사실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빠르게 사는 법만 아는 사람은 느리게 살 수 없겠지만, 느리지만 명확하게 생각하며 사는 법을 익힌 사람은 완급을 조절해 가며 멋진, 혹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터이다. 내 삶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동안 철학은 아무리 인간과 삶을 말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이야기였다. 항상 궁금했다. 왜 나는 좋은 이야기를 듣고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까? 왜 나의 감동은 한순간에 그칠까? 그런데 이제 답을 알 듯싶다. 어쩌면 그동안은 책의 내용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침잠하고 사색하는 시간 없이 남들의 속도에 맞춰 바쁘게 살아 온 탓은 아닐까? 오늘부터 내 삶을 ‘느리고 정확하게’ 연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