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을 걷다 -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떠나는 섬 여행
강제윤 지음 / 홍익 / 2009년 1월
절판


어제는 꽃이 피는가 싶더니 오늘은 또 눈이 내린다. 제법 많은 눈이 쌓인다 했더니 햇볕이 나자 눈은 흔적도 없다.
삶 또한 그러하다. 돌이켜 보면 삶이 내 소망대로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삶에는 실패나 성공 따위란 없는 것이다. 성공한 삶도 없고 실패한 삶도 없다.
서로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삶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누구도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삶의 판관일 수 없다.
어제는 어제의 삶을 살았고 오늘은 오늘의 삶을 산다. 너는 너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늘 삶에 대해 서툴다. 그렇다고 내 삶이 실수투성이인 것을 책망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처음 살아보는 삶이 아닌가.

사람의 마음이 늘 무겁거나 가볍기만 하겠는가.
무겁기만 하다면 가라앉아 버릴 것이고 가볍기만 하다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추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균형을 잡아 주는 균형추.
마냥 마음의 오고감에 휘둘리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누지 못하는 것의 근원은 소유욕이 아니다. 불안이다.
모자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다 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누지 않고 자꾸 쌓아두려 한다.

많은 섬들은 요즘 어느 시대보다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고기잡이나 수산물 채취, 양식업 등으로 바다 일을 하는 주민의 수입은 도시 노동자의 소득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일의 양은 줄지 않는다. 남들이 더 많이 잡기 전에 내가 더 잡고 남들이 기르는 것보다 내가 더 길러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해서 삶에 대한 불안이 줄지는 않는다. 가득 채우고도 늘 모자랄까 두려워한다. 만족을 모르는 삶은 도시와 농어촌이 다르지 않다.
본디 일이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만드는 사회는 사악하다. 하지만 이 사회는, 국가는, 자본은 개인이 필요보다 더 많이 일하도록 끊임없이 선동한다. 개인에게는 온갖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강요하면서도 개인의 삶은 책임져 주지 않는다. 교육, 의료, 노후까지도 철저하게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사회. 그러니 소득이 늘어도 개인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는다. 개인의 불안은 사회의 불안을 잉태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국가 안보와 체제 불안을 조장하는 가장 큰 국가 세력은 자본과 국가 자신이다!

섬은 적막하고 섬은 아주 늙어버렸다. 요즈음은 섬의 장례 풍습도 바뀌었다. 사람이 죽으면 산이 아니라 완도로 간다. 상여 메고 가 묻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게 된 사람들. 나이 들고 병들어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 노인들은 자식들을 찾아 뭍으로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생애와 하직한다.
"다 내빌고 가지라우. 몸만 가제. 아깐 집조차, 밭조차 다 내빌고 가지라우."
다 버릴 수 있다는 장담은 쉽지만 실상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가진 것 모두를 버리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은 뒤에는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어코 손에 쥐고 죽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여서도의 노인들은 살아서 모두를 버린다. 섬을 더나는 것이 곧 삶을 떠나는 것이니 가능한 일이다.

'집도 이층으로만 해서 마을이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을텐디 몇 집만 잘 살라고들 집을 높이 올리니 못 사는 사람만 더 못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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