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오준호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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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때때로 우리는 이 말을 전혀 다른 2가지 상황에서 내뱉는다. 하나는 인간이 타인에게 무척이나 폭력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할 때, 다른 하나는 인간이 타인에게 친절하다 못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할 때다. 그리고 곧, 그 2가지 상황에 대해 이해를 시도하게 되는데,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전자에 대해서는 ‘인간’에게서 끌어낸 이해를, 후자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닌 것’에서 끌어낸 이해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고, 또 동물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로서 폭력성과 잔혹성을 이해한다.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것이 본성이라는 의견이다. 동시에 우리는 인간이 정신적 존재이고, 또 신과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로서 도덕성과 친절함을 이해한다. 인간을 만들어낸 물질과 전혀 다른 무엇으로부터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의견이다. 프란스 드 발은 이러한 우리의 통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정말일까? 인간 그 자체에서 도덕성과 친절함은 찾아볼 수가 없을까?

프란스 드 발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낸 ‘물질’을 탐구한다. 즉, 인간은 어떤 물질(동물)인가? 라는 질문에 인간은 ‘포유류’이고, ‘영장류’라고 대답한 다음 포유류와 영장류에게서 ‘도덕성의 기원’을 밝혀내려고 한다.

 언제부터 인간이 포유류를 길렀는지는 몰라도, 이제 개와 고양이는 인간의 동반자의 위치에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애완동물에게 좋은 사료를 먹이고, 비싼 수술을 하고, 심지어 무덤까지 만든다. 왜냐하면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그들의 강아지 또는 고양이와 어떤 감정적 교감을 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파충류를 기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개 또는 고양이와 같은 포유류를 기르는 까닭은 파충류가 주지 못한 어떤 것을 주기 때문이다.

 프란스 드발은 그것을 ‘공감’이라고 한다. 꿀벌은 군집생활을 하지만, 그들은 다른 개체에게 공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북이는 새끼가 태어나기 안전한 곳에 알을 낳으려고 애쓰지만, 그것을 새끼에 대한 감정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런데 포유류에게는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비단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강아지와 고양이로부터 알 수 없는 위로를 느낀다. 몹시 화가 나거나, 너무도 큰 슬픔에 젖어 있을 때, 우리의 친구인 강아지와 고양이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그들 또한 느끼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포유류의 특징이며,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이자 바탕이다.

 올해 개봉한 영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을 보고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저것이 인간(동물)이야. 침팬지와 인간의 행동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너무도 유사한 그들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영장류에 대한 확고한 판단이 생겨난다. 오래전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프란스 드 발은 인간이 영장류와 가까운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침팬지와 전혀 다른 영장류를 소개한다. 바로, 보노보다.

 보노보라는 영장류는 침팬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보노보가 너무도 착하고, 고귀하며, 아름답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보노보는 인간이 지닌 도덕성과 친절함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들에게 인간과 같은 도덕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인간의 도덕성이 완성되기 ‘직전의 모습’이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게 한다. 인간과 달리 보노보는 학교에서 윤리를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종교 또한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보노보가 취하는 행동 하나하나들은 우리가 가진 도덕성이라는 ‘감정’과 공명한다. 우리가 새끼에게 관대하듯이 그들은 새끼에게 관대했고, 우리가 과도한 분쟁 및 다툼을 피하려 하듯이 그들 또한 분쟁을 피하려 했다. 우리가 스스로 낳지 않은 아이를 길러내듯, 그들 또한 자신이 낳지 않은 새끼들을 길러냈다. 이제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유인원이 그럴 수 있을까.

 물론, 보노보는 도덕성의 화신으로 만들어진 동물이 아니다. 인간 또한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보노보를 보다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도덕성은 저 진흙 속에서 우리의 몸과 함께 진화해 온 게 아니었을까? 프란스 드 발이 주장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공감하고, 때로 친절하며, 때때로 인간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을 향한 잔혹한 행동을 하는 까닭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타인을 향해 친절한 행동을 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의 육체’에 있는 셈이다. 물론, 폭력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폭력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도덕성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태어났다고 모든 인간이 엄청난 도덕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서 놀랄만한 도덕성 또는 타인을 향한 애정으로 칭송 받는 이들은 ‘단지 그들이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이 폭력성을 진화해 온 만큼 동시에 사회성과 도덕성을 진화시켜왔다는 생각은 인간이라는 종의 미래에 한 줌의 희망을 던져준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잔혹하면서도 친절할 수가 있는가. 그 둘의 질문은 바로 이 땅위에서 대답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대답이 될 수 있다. 결국,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인간이 어떤 종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인간들의 손에 달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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