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BOB 보셨나요? 아니요.

  서점 단골들이 묻고 대답한다. 서점이 곧 문을 닫는다는 소문을 들어서인지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단골들이 요즘 자주 얼굴을 보인다.

  서점주인 C가 혼잣말하듯 말한다. 그러게요, 통 연락이 없네요, 라고.

  바로 이 시간 BOB는 이사온 후로 방치해둔 작은 방을 치우는 중이다. 상자 위에 상자. 상자와 상자 틈의 상자. 오직 종이상자로 채워진 공간. 이삿짐 센터 일꾼이, 이거 어디 둬요? 라고 물으면 그냥 저 방에 두세요, 라고 말하는 바람에 생긴 상자들의 방이다. 일부 상자는 B의 것이고, 대부분의 상자는 O의 것이며, 한 두 개의 상자는 BOB의 것이다. O로 불리던 시절, 마음 상태가 좋았던 시간이 비교적 길었던 덕분에 B였을 때의 상자를 거의 다 폐기할 수 있었고 버리기 아까운 것들만 일부 상자에 남겨두었다. O에서 BOB로 넘어가던 시절이 문제였는데, 그땐 이미 만사 귀찮아져서 책이며 노트며 옷이며 물건이며 등등 아무 상자에나 무작위로 집어넣은 채 이사를 오고나서는 들여다보지도 않은 것이다. BOB로 불리던 최근에는 아예 뭘 끄적이지도 사지도 챙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쌓일 짐이랄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이 방에 들어온 이유는 간밤의 꿈 때문이다. 꿈에서 드로잉 몇 장을 봤는데 오래전 다이어리에 끄적였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상자 네 개를 여는 동안 방 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끄집어낸 물건들을 그대로 둔 채 다음 상자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다섯번 째 상자 바닥에 숨어 있던 파란색 표지의 다이어리에서 문제의 그 드로잉들이 나타났다. 네모칸 안에 단순한 선과 선명한 색으로 표현한 드로잉들은 컴퓨터 그림판에서 그린 것을 잘라붙인 것이었다. <이방인 생존법>이라고 적인 드로잉들 옆에는 문장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이를 테면, '사람이 많은 장소로 갈 때에는 '나는 사람이다'를 뇌리에 충분히 각인시키고 나간다', '누군가 힐난하는 눈길을 보낼 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한다',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면 몸의 긴장을 모두 풀고 모든 것은 저 위에 계신 분의 뜻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등이다. 창밖이 까맣게 될 때까지 드로잉들과 문장들을 들여다보던 BOB는 늘어놓은 상자 속 물건들은 내버려 둔 채 다이어리만 들고 방에서 나온다.

  도서관에서의 자원봉사도 그만두고 칩거한지 꽤 되었다. 처음 몇 번은 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역시 아닌가, 왜 이렇게 불편하고 피곤하지, 이건 내가 아니다, 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그리고나서는 여기저기 몸이 아파서 집을 나서는 것도 힘든 지경이 되었다. 휴강은 폐강으로 이어졌고, 미안해서 도서관에 책 보러 가는 것도 못하게 된 것이 벌써 두 달 전의 일이다. 아무래도 '나는 사람이다'를 충분히 각인시키지 않고 집을 나선 것이 화근이었나보다.

  칩거중에 BOB는 자고 깨고 자고, 아주 가끔 손에 집히는 책을 읽고, 대부분의 시간 영화나 드라마를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보고, 거의 아무도 안 다니는 시간에만 나가서 필요한 물건이나 먹을거리를 사 오고, 날이 매우 흐린 날엔 종일 침울하게 있다가 울기도 하고, 그러다 아주 가끔 밝은 햇살에 기분이 좀 나아져서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으나 사람을 직접 만나러 나가는 일은 없었다. 만날 친구도 없었거니와, 서점이나 술집, 편의점에 다니면서 눈인사라도 나눈 이웃들과도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대개의 사람들은 심한 우울증을 겪는 중이라 했을 텐데 BOB의 경우는 인간으로서 본인의 존재감을 심히 의심하며 스스로 이방인 정체성을 두텁게 쌓아온 터라 '우울'하다고 힘들어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답답한 '경계'를 벗어날 수 있나 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꿈의 안내를 받아 <이방인 생존법>을 찾았으니 뭔가 돌파구를 찾은 셈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이방인 생존법>을 통해 생성할 수 있었던 몇가지 가능한 세계는 이러했다.

  첫째, 그동안 원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말로, 진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땅을 떠난다.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밤에 집을 나선 그는 통장에 얼마 안 남은 돈을 탈탈 털어 탈 수 있는 아무 비행기나 탔는데, 어느 나라에서 내렸고 거기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나중에 크프우프크의 논픽션 산문집에 등장하는 '어느 대책없는 이방인에 대한 기록'의 주인공이 BOB라는 설이 있는데 사실 여부는 오직 작가만이 아는 일이다.

  두번째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이방인' 정체성을 지우고 오직 '생존'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일단 '생존'을 했다는 것 만으로 자긍심을 가질만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 BOB는 얼굴을 푹 가리는 모자를 하나 사서는 매일 도서관 열람실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굳게 결심하고 합류한 곳은 공무원시험준비군단으로, 몇 달의 짧은 준비기간이었음에도 '이방인'으로서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남다른 답안갑별능력으로 한 번에 합격을 했다. 문제는 오직 이 땅에서의 '생존'을 목표로 삼았음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은 '이방인'의 정체성 때문에 꽉 막힌 조직사회에서는 숨쉬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결국은 도대체 이 세계가 '생존'을 위해 택한 것이 맞느냐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에 우주가 어떤 답을 내려줬는지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몇가지 BOB가 겪었던 또 다른 세계들에 대해서는 하도 말들이 많아 여기서 간단히 정리하기는 무리인 것 같다. 다만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한마디 하자면,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이 지금도 쉬지 않고 쓰고 있는 오래된 혹은 서점 가판대에 오른지 얼마 안 된 작품들에서 그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BOB는 연락이 없다고, 서점주인 C는 막 문을 열고 들어와 묻는 달의 궁전 주인에게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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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P는 처음 '시'라는 것을 느꼈던 그날을 기억한다. 어느 여름날, 시골집 뒷뜰, 우물 옆, 하얀 양은 대야에 찰랑이는 투명한 물, 그 물에 손을 넣었을 때의 시리도록 차가운 감각, 물 위로 쏟아지던 따가운 햇살, 얼음조각처럼 부서지던 빛나는 알갱이들......말하자면 P의 삶은 그날 그 투명하고 서늘한 물의 느낌을 다시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라고 서점주인 C는 말한 적이 있다. 독서모임 말미에 지나가듯 던진 말이라 P 말고는 주의깊게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꿈에 P는 어딘가를 쏘다니다가 어느 공원 옆에 이르렀는데 고개를 들고 보니 눈앞에 서점이 떡하니 서 있었다. 존재감이 너무나 생생해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한 발을 앞으로 내미는데 미끄러지듯 넘어졌고 P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우물이 떠올랐다.  서점과 우물이라니, 서로 전혀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장소와 사물이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해졌다. 네모난 서점, 동그란 우물, 알 수 없는 깊이, 들여다봄, 네모난 하늘, 동그란 하늘, 하나의 하늘, 비침, 너와 나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장들,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 몇가지 단어들을 읖조리고 있는데 우나무노의 소설을 읽다 메모해둔 것이 떠올랐다. "아, 오르페오, 오르페오. 이렇게 홀로, 홀로, 홀로 잠든다는 것은 단 하나의 꿈을 꾼다는 것이야. 단 하나의 꿈은 현실이고 외양일 뿐이지. 그러나 두 사람의 꿈은 진실이고 현실이야. 현실세계는 우리 모두가 꾸는 공통의 꿈인 것이야. 이어 그는 잠이 들었다." (P.116, 안개)라고 적힌 메모. 본인의 필체를 낯선 타인의 흔적을 대하듯 바라보다가 P는 벌떡 일어나 집을 나섰다.

  서점 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시인 P를 C는 반갑게 맞았다.

  - 소설은 좀 진척이 되고 있나요?

  - 아니요. 맴만 돌고 있어요.

  - 뭐가 문제죠?

  - 계속 같은 벽에 부딪혀요. 막힐 때마다 나름 길을 찾아낸다고 하는데 부딪히고 보면 같은 벽이예요.

  - 벽이 문제군요. 그럼...벽을...부숴야겠네요.

  - 아...벽을...,저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 어떤 선택을 해도 같은 벽에 부딪힌다면서요. 그렇다면, 다르게 선택한다고 하면서 실은 매번 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순간 P의 귓가에 쨍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빛으로 하얗게 바랜 우물 주위를 빙빙 도는 누군가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익숙한 뒷모습. 그가 뒤를 돌아본다. 낯익은 타인의 얼굴.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만나는 얼굴. 그 얼굴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같아. 경로가 다를 뿐,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 될 일은 되고. 벽이란 건 그저 머릿속 생각일 뿐이지. 그러니 그냥 가보는 거야. 여기서 빙빙 돌지만 말고 움직여보라고. 너의 그 a와 b, 네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는 사람과 사물들을 풀어놔봐. 그럼 풀릴 거야.'

  서점주인 C는 자기 말을 듣는지 듣지 않는건지 멍하게 서 있는 P의 어깨를 툭 친다. 퍼뜩 서점 공간으로 돌아온 P는 눈빛이 다시 밝아졌다.

  - 올해 말까지 정리하신다구요? 서점이요.

  - 예. 그 전에 살 책 있으시면 사세요. 할인중이니까요.

  - 서점이 없어지나요?

  - 누군가 서점하실 분이 계시면 넘기면 좋겠는데, 좀 기다려보려구요. 여하튼 소설, 꼭 완성하시길 바랍니다.

  P는 답을 못하고 웃는다.  빛나는 문장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우물은 그의 세계 안에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뜨거운 여름햇살을 단숨에 부수는 얼음 같은 물을 찾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미완의 소설을 쓰고 또 쓰는 부질없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그는 속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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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이란 건 없다.  낡은 여행 가방을 든 크프우프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고 있다. 단골로 드나들던 서점의 불은 꺼져 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다. 공항에서 누군가 뭐라고 물었던 것 같은데 크프우프크는 모르는 척 지나친 것 같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명이 시작되면서 멍한 상태다. 크프우프크는 꿈 속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뭐라고 묻던 자는 더 따라오지 않는다. 이날의 마지막 비행기다. 약간 출출하긴 하지만 어서 낯익은 곳으로 가고 싶어서 막 출발하려는 공항버스에 몸을 싣는다. 한 시간여 가수면 상태에서 흔들리다 내렸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훅 얼굴에 와닿는 겨울 공기가 상쾌하다. 기분좋은 한기, 익숙한 거리의 냄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한 걸음 떼는데 불꺼진 서점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형체가 보인다. 서점주인 C가 아직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캄캄한 곳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마음이 어지러울 땐 어둠 속에 가만히 있어요. 조금 있으면 마음을 휘젓던 것들이 가라앉고 평온해지면서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지요,'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C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의 평온함을 깨뜨리고 싶지가 않다. 크프우프크는 몇 걸음 옮겨 문이 닫혀 있는 옆 가게 앞에 선다. 창문을 가려놓은 커튼 틈으로 깃털 같은 것이 보인다. 커다란 드림캐처가 걸려 있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 악몽이 찾아올 리는 없을 텐데, 여기 주인은 낮에도 백일몽에 시달리는 걸까, 생각한다. 서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옆 골목으로 몸을 숨긴다. 만나면 반갑긴 하겠으나 이런 식으로 C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다. C는 문을 닫고 창문들이 제대로 닫혔는지 둘러본 다음 뚜벅뚜벅 길을 건넌다. 건너편 술집 달의 궁전도 닫혀 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인가, 공항버스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그 사이 뭘 하다 이렇게 늦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중간에 어딜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굴 만난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이명이 울린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잠시 멈춰 있으니 거리가 어둠으로 덮이기 전의 시간이 떠오른다.

  크프우프크 자신도 믿기지 않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었다. 소설 속에서 거의 불가능한 연애를 하던 주인공은 작가를 보자 빙긋이 웃었다.

  - 드디어 끝났어요.

  - ......

  - 그가 떠났어요. 이제 전 자유예요.

  - 힘들진 않나요? 외롭다거나.

  - 외로와요. 그래서 좋아요.

  주인공은 크프우프크의 팔짱을 끼더니 낯선 길로 이끌었다. 찾아간 곳은 주인공의 작업실이었다. 작업실은 텅 비어 있었다.

  - 아무것도 없네요.

  - 예. 다 버렸어요.

  주인공이 텅 빈 네모 공간을 춤추듯 빙글빙글 돈다. 크프우프크는 어지러워서 눈을 감는다. 주인공이 크프우프크의 손을 잡는다. 갑자기 닿은 냉기에 크프우프크가 흠칫 눈을 뜬다.

  - 이제 뭘 해야할 지 알려주세요. 여길 떠나야 하는 건지, 다시 채워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 그걸 왜 나에게...

  - 당신이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알려주세요.

  책임지라는 표정이다. 크프우프크는 난감해진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소설의 결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더 당황스러웠다. 뭐라 답해야할지 몰라 우물거리다가 일단 피하는 길을 선택한다.

  - 시간을 좀 주세요.

  오랜만에 찾은 자유에 매우 긍정적인 마음 상태가 된 주인공은 고개를 끄덕인다.

  - 알았어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 이리 오세요. 나가는 길을 알려드리죠.

  크프우프크는 손을 절레 내젓는다. 눈으로 괜찮다는 뜻을 전하고 작업실 문을 나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건지 거리가 매우 어둡다. 한 걸음씩 천천히 걷는다. 열보쯤 걸으니 어깨의 긴장이 풀린다. 거리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다. 불꺼진 상점들을 구경하며 걷다가 문득 생각난 듯 하늘을 올려다본다. 매우 깊은 파란색 하늘이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 소리가 난다. 까만 길 끝에 황금색 고양이 한 마리가 이쪽을 노려보며 웅크리고 있다. 편의점 지붕 위에 사는 고양이 중 하나일까. K는 아직도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을까. 시인 P는 그 사이 시집을 냈을까. 기억 저편에서 지인들의 얼굴이 하나 둘 올라온다. 그저 얼굴을 떠올렸을 뿐인데 가슴이 뭔가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허기. 다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공원 입구의 벤치에 몸을 앉힌다. 감나무 끝에 감이 한 개 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크프우프크는 감의 짙은 주황색이 반갑다. 자신의 손을 앞뒤로 살펴본다. 그 사이 꺼칠해진 갈색 손등과 붉은 손바닥.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 다시 올라오는 허기. 이번에는 꽤 구체적으로 라면 냄새까지 올려보내는 뱃속 기억.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크프우프크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누구라도 아는 체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늦은 아침, 이국의 바닷가 마을에서 깨어난 크프우프크는 욕실 화장실 거울을 통해 매우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만난다. 얼굴은 밤 사이 만난 세계의 기억을 감추고 어서 찬물이나 끼얹어 달라는 표정을 짓는다.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돌아와 집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크프우프크는 오늘도 배를 타고 나갈 것이고, 바다 비린내를 맡으며, 수면에 혹시 비칠지도 모르는 자기 그림자를 좇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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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로 리더는 수그리고 있던 등을 펴고 막 완성한 타로 카드 한 장을 들여다 본다. 뿌옇고 파란 달 카드는 음울해보인다. 유화 물감이 마르도록 벽면 책장 위에 세워놓는다. 달 카드 옆의 상자에는 17개의 메이저 카드가 들어 있다. 남의 손이 닿지 않은 카드를 갖고 싶어서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그림의 디테일은 좀 떨어져도 혼이 담긴 카드라 더 잘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창 밖을 내다 보니 서점 주인 C가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서점을 닫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건지 요즘 단골들이 자주 오는 것 같다. 몇달새 눈에 익어서 단골들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 처음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간 이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짧은 머리에 몸집이 매우 작은 여성이다. 오늘따라 더 힘이 없어보인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 저기요

그녀가 돌아본다. 울고 있지는 않은데 슬픔이 가득 배인 얼굴이다.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 저, 혹시...시간되시면 잠깐 얘기 좀...

하면서 타로 리더가 열려있는 가게 문을 가리킨다. 타로 리더는 대답 없이 고개가 갸웃해지는 그녀에게 다가선다.

  - 타로는 안 보셔도 되요. 그냥, 그림 그리시는 분 같아서, 보여드리고 싶은게 있어서요.

  - 그건 어떻게....

  - 지난번에 여기 주인분이 보여주셨어요, 전시 리플렛.

  - 아...

  그림 이야기에 경계심이 풀렸는지 그녀가 더 망설이지 않고 타로 가게로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시선이 벽면 책장 위에 세워 둔 타로 카드에 가서 멎는다.

  - 여긴 어디인가요?

  뜻밖의 질문이다. 타로 리더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본다. 그림 속 배경은 허공에 가깝다. 그림 전면에서 시작된 오솔길이 흐려지는 원경에는 아무도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성이 한 채 있다. 안개에 쌓인 성은 마치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돌무더기처럼 보인다. 전경에는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실재하지 않는 두 마리 짐승이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대고 있다.

  타로 리더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녀는 상자 속 다른 카드들을 본다. 그림을 본다기 보다는 책을 읽는 것 같은 표정이다. 연인 카드를 보던 그녀가 묻는다.

  - 이상한 집이네.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타로 리더가 그린 연인 카드에는 귀퉁이에 티피로 보이는 것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바로 티피를 알아본 것도, 여기에 이야기가 있는 것을 알아본 것도 놀라워서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시선이 안으로 더 들어간 것 말고는 슬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타로 리더는 티피 아니 '비둘기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서울의 Y역에, 시끄러운 목소리로 행인들에게 호통을 치는 노숙자 여인이 한 명 있었어요. 작은 리어카에 폐지를 잔뜩 모으며 다니는데 진로에 방해되는 행인들에게 거의 욕설에 가까운 말을 던지곤 했죠. 몸집이 아주 작아서 뒤에서 보면 끌고 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리어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죠. 세수도 거의 하지 않는지 꾀죄죄한 얼굴에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있고 옷은 아무것도 껴입어서 보기 안쓰러웠죠. 뭣보다 욕설이 꽤 세서 어쩌다 마주칠 상황이 되면 저도 모르게 피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어떤 아저씨한테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된 거죠. 그 분도 노숙자였는데 마시고 있는 술병을 뺏질 않나, 마구 욕설을 퍼붓지 않나,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거의 매일 봤는데, 일 때문에 타고 다니는 지하철 노선이 달라져서 한 계절을 거길 못갔죠. 그러다 아마 겨울이 시작되는 즈음에 그 역을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노숙자 두 분이 다 안 보이는 거예요. 아마 어디 노숙자 쉼터에라도 갔나보네 하고 생각했는데 어느 눈 오는 날 이었어요.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져서 지하철 입구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지하철 입구 쪽에 하얀 티피가 있는 거예요. 온갖 폐지로 얼기설기 만든 집이었는데 외관은 티피처럼 보였고 거기 눈이 하얗게 덮혀 있던 거죠. 이게 뭔가 하고 지나가는데, 막 그 티피를 지나가는 참에, 거기서 누군가 나오는 거에요. 천막 같은 걸 걷고 나온 사람은 그 노숙자 여인이었어요. 행색은 여전했는데 뭔가 달랐어요. 좀 밝고 순해졌달까. 이 분이 여기 숙소를 지었군 하고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려는데, 그 분 뒤로 따라 나온 분이 누구였을까요? 글쎄 그 맨날 싸우던 그 노숙자 아저씨였던 거죠. 자세히 보니 그 천막에는 그림까지 여기저기 붙어 있더군요. 그 사이 두 분만의 '비둘기집'을 지었던 거예요...

  이야기를 하면서 타로 리더의 마음이 잠시 다른 곳에 가 있던 사이. 짧은 머리의 단골, 그녀는 카드 속 연인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없이 울고 있었던 것을 타로 리더는 알지 못햇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타로 리더에게 그녀는, 그림들이 이상하긴 한데 좋다고, 여긴, 이야기가 참 많은 세상이군요, 라고 말했다.

  타로 가게를 나선 그녀는 평소처럼 골목길에서 골목길로 천천히 걸어간다. 간 김에 카드를 한 번 보고 올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바로 부질없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삶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누가 어찌 되든 자체의 법칙을 따라 굴러갈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이별을 하고,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고, 나는 걷고 또 걷고, 저 사람은 먹고 또 먹고, 그리고 달려가는 저 사람,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머릿 속 끊임없는 중얼거림에 멀미가 올라온다. 타로 리더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슬픔이 올라온다. 멀미와 슬픔이 출구를 못찾고 엉긴다. 하늘이 뿌옇다. 멀미와 슬픔이 엉긴 곳에 미세먼지가 더해져 가슴이 답답하다. 그녀는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치면서 다음 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이 도시 전체가 울릴 만큼 울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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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 앞 인도의 낙엽을 쓸고 있는데 뒤쪽에서 휘익, 바람이 분다. 머리가 긴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큰 길 쪽으로 돌아간다. 모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떠오른 것은. 빨간 단풍색의 털모자를 쓰고 몰바니아로 떠난 그녀. 서점주인 C는 바람 때문에 다시 흩어져버린 낙엽 무더기를 그대로 두고 서점으로 들어온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입구 쪽 벽에 붙여놓은 사진들을 뗄 참이었다. 올해 말까지는 서점을 비워줘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진들 만큼은 천천히 보면서 정리하고 싶었다.

  목이 긴 그녀는 창가 자리에 늘 턱을 괴고 앉아 무심히 책장을 넘기곤 했다. 책을 읽는 것인지 생각에 잠겨 있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묘해서 C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를 훔쳐보곤 했다. C가 그녀를 사진 속에 담은 것은 계절이 겨울로 넘어가는 어느 오후였다. 찬 비가 종일 내린 날이었다. 몇 시간 전부더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커피가 식은 듯 하여 따뜻한 커피를 들고 그녀에게로 가는데 문득 시간이 멈추었다. 손등에 얹혀진 동그란 턱에 살짝 주름이 잡혀있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다. 그녀의 시선이 창 밖의 감나무를 향하고 있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시선. 그러고보니 며칠 전 "감은 언제 다 따셨어요?"라고 묻던 게 생각이 난다. "제 나무가 아니라서요. 오늘 문 열 때 보니 감은 하나도 없던데요."라고 대답했었다. 감 없는 감나무, 열매도 없고, 이제 잎도 다 진 감나무를 그녀는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듯 바라보고 있다. 열매없는 감나무는 말이 없다. 더구나 잎도 한 장 남아 있지 않으니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건 나무의 침묵이라고 해야 하나.  C는 커피를 책장 위에 가만히 내려놓고 받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틱, 소리에 시계가 다시 돌아가고 그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C는 멋적게 웃는다.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내려가 있다. 그래도 뭐라 싫은 소리는 하지 않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녀가 태어난 할머니 집 마당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뭘 잘 기억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감이 익는 때 만큼은 잊지 않고 할머니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찬란한 색으로 물든 뒷산을 배경으로 잘 익은 감이 풍성하게 달린 나무를 보고 와야 그 해를 잘 보내줄 수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 해'라는 것이 살아있는 생명체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잘 보내준다는 건 무엇인지. 어쩌면 그녀에게는 모든 것을 살아있게 하는 능력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C는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그 아이가, 그 녀석이, 라는 식으로 사물을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이를테면 책을 사면서 "이 녀석은 실망시키지 않겠죠?"라고 말한다든가, "그 때 데려간 아이가 어디 숨어버렸어요"라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게 재미있어서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지난번 그 아이는 잘 있나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벽에 붙여놓은 사진 속 주인공들은 대개 단골들이라 어디 사는지, 뭐하고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그녀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었다. 그녀의 몸짓, 얼굴 표정, 말하는 습관, 자주 읽는 책 정도로 짐작할 따름이었다. 사람에 대해서 책을 대할 때 만큼의 호기심이 있었다면 사는게 조금은 덜 지루하지 않았을까, 하고 자문하기도 했지만, 사람을 책처럼 읽어나가는 재미도 있지 않냐는 말로 무마하곤 했다. 그런 C에게 그녀는, 비유하자면, 잊지 않으려고 나름 잘 꽂아두었다가 어디 두었는지 결국 잊어버리고는 생각날 때마다 온 서가를 뒤져 찾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찾고 나서는 몇 페이지 정성껏 넘겨가며 읽다가 다시 잊지 않을만한 곳에 잘 꽂아두는 것이다.

  서점은 올 해 말이면 문을 닫을 것이다. 어쩌면 몰바니아에서 돌아오는 길의 그녀와 아직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C의 여행가방이 공항 어디쯤에서 엇갈릴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문 닫은 서점 앞에 돌아온 그녀가 잠시나마 서운한 마음으로 멈췄다 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사진 속에서 턱을 괴고 있는 여자의 존재 만큼은 누가 뭐래도 확실하지 않은가, 라고 C는 혼잣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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