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폭풍이 북상하는 중이라고 했다. 하루종일 하늘이 흐리더니 일몰에 맞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늦가을의 차가운 비였다. 서점주인 C는 비오는 날의 이야기 번개 <산해경>을 열 참이었다. 공지 내용을 치고 보냄 화살표를 막 누르려는데 진동음이 울렸다.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이 시간에 스팸은 아닐 것 같고, 받아도 되는 번호일까 망설이다가 거절을 누르겠다고 한 것이 응답을 눌러버렸다. 이런,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를 얼른 삼키고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이름을 듣고도 누구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목소리를 한참 듣고 나서야 10년 전 쯤 영국 여행중에 만난 그의 모습이 겨우 떠올랐다. 베이컨의 초상화처럼 흐릿하게 뭉개진 얼굴이었다. 잘 지내냐고 묻더니 C가 어물어물 거리는 사이, 자기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묻기도 전에 말하는 것이다. 그 순간 늘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기억나면서 뭐라 말할 수 없이 불편한 심정이 올라왔다. 전화를 얼른 끊고 싶었다. 그는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좋다며 언제 한 번 얼굴이나 보자고 말했다. 실은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진심이었으나, 그러자고, 언제 술 한 잔 하자고, 말하고 말았다. 그는 처음보다 밝아진 톤으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기 번호를 저장해두라는 말을 마침표로 찍고는.

  언젠가 영국의 미술 비평가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베이컨은 "사람들은 사실 앞에서 불쾌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C는 기록에 대해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는 이유가 이거였나 생각하면서 베이컨의 화집을 며칠간 들여다본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나서 방금 받은 번호를 수신거부로 등록해버렸다.

  빗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작아졌다. <산해경> 회원 한 명이 눈 앞에 서 있었다.

  -  번개 치실 줄 알았는데요.

  -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네요.

  -  비가 많이 와요.

  -  그럼 이제 번개 치겠습니다. 책 좀 보고 계세요.

  금요일 저녁이어선지 세 명 밖에 모이지 않았다.

  - 오늘은 단촐하군요. 전 이야기거리가 떨어져서, 모모님이나 가을하늘님이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 막 이야기거리가 생기신 것 같던데...

  모모라는 닉네임의 회원이 뭔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서점주인 C를 쳐다봤다.

  - 훔쳐보려고 한 건 아니고, 비 좀 맞다 들어가려고 서점 앞에 서 있다 우연히 봤어요. 전화 받으시는 표정이 심상치 않으시던데...제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시고.

  촉이 발달했다고 해야 할까, 이야기거리를 발견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C는 뱃속 깊은 곳에서 스물거리는 불쾌감을 지그시 누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비가 그치면 딱 끝낼 거니까 계속 해달라고는 하지 마세요.

  C는 영국 남쪽 바닷가 마을, 우체국을 겸한 작은 상점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모임의 기록을 맡은 모모는 노트를 펴고 C의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적기 시작한다.

 "바닷가 풍경이 박힌 사진 엽서에는 글자가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의미없는 글자 몇 자 보다는 일몰을 보여주는 것이 나으리라.

모월 모일 모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계곡 위.

칼바람 부는데 잔디는 파랗고.

6월에 입고 있는 겨울 코트를 아무리 꽁꽁 여며도 파고들어오는 바람.

이빨을 덜덜 부딪히면서도 이곳의 일몰을 계속 보고싶어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즐겁게 잘 지내라는.

야박하게도 마음 하나 담기지 않은 인사(언제 술 한 잔 하자는 말처럼 실없는.)

그러나 이마저도 넣지 없으면 너무 냉정해보일 것 같아 빠트릴 수는 없는 인사.

그리고 ps. 여기 바다에서는 비린내가 나지 않아......"

  어떻게 유도를 해도 C는 지난 삶에 대해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의 이야기는 C가 3년 정도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가 다른 직장을 찾기 전의 몇달 쯤의 일이리라, 고 짐작될 뿐이다. 그 시점에 C는 잠깐 사귀던 애인과 헤어진, 아니 헤어지려고 했던 것 같다. 지난 연말 이야기 모임에서 C가 그 다른 직장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추정되는)를 했을 때 애인이 등장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몇 장의 엽서로 헤어질 수 있었던 모양이다.

  "돌아오고 몇 달 후까지도 이 마을에 대한 기억에는 나무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땅에 뿌리박은 나무의 향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집에서 나는 냄새.

영국 남자와 스페인 여자가 살던 하얀 집의 냄새.

우리나라 통나무집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냄새.

만나는 나무마다 맡아봐도 결국 찾을 수 없던 냄새..."

  바닷가를 따라, 처음 걸어보는 이국의 골목길을 따라 흘러가는 C의 이야기에서는 본인도 명확히 알아내지 못한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야기가 그 동네 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왔을 때 비가 그쳤고 모모의 노트에는 '냄새'라고 제목을 붙여도 좋을 만한 시가 한 편 남았다. 평소처럼 모모는 그 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모모가 이런 식으로 시를 쓰는 것이 께름칙해서, "제 이야기는 그냥 듣고 잊어주시죠" 라고 부탁하기도 했으나 낭독된 시는 의외로 좋았고, 나중에는 개의치 않게 되었다.

 모임을 파하고 홀로 서점에 남은 C는 서점 안 쪽 자신만의 서가에서 제발트의 책을 꺼냈다.

"그리고 더욱더 먼 곳

가물거리며 사라지는 마지막 빛 속에 잠긴

이방의 땅, 아직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아프리카 대륙 위로

탑처럼 솟은

눈과 얼음의 설산 (<자연을 따라. 기초시>, p.139.)"

   비 맞은 창에 손을 대니 손끝이 시리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이길 수 없다, 자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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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책에서 울리는 소리에 깨는 일. 전날 밤 늦게까지 쥐고 있던 책은 침대 옆에 떨어져 있고 언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피곤한데도 도통 잠이 오지 않아 편의점까지 나가서 사온 맥주를 혼자 마시며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잠이 든 건 같다.

  처음 그를 만난 건, 아니 본 건 3년 쯤 전이다. <달의 궁전>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R은 누군가 얼굴을 훔쳐보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옆 테이블의 그가 드로잉북에 그어놓은 선들은 누구의 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선을 들키자마자 그는 드로잉북을 닫았다. 그리고는 이어폰을 끼고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R의 친구가 도착하여 그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몇 주 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R은 잠시 데자뷰인가 의심했다. R과 그가 앉은 자리, 그가 입은 옷, 드로잉 북, 들켰을 때의 행동, 모든 것이 동일했다. 이번에는 R도 혼자였으므로 그에게 다가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뭘 그리시는 거예요?

  그리다니요, 뭘.

  그러면서 드로잉북과 연필을 들고 일어서는 그를 R이 대범하게도 잡았다.

  괜찮으니 제 얼굴 한 번 그려주실래요? 기꺼이 모델이 되어 드리죠.

  그가 놀란 듯하여 가능한 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말을 건넸으나 그는 굳이 뿌리치고 도망치듯이 술집을 나간다. 계산도 안 하고 가나 싶어 카운터 쪽을 봤는데 주인이 입모양으로 '계산했어요'라고 말한다. 자리를 정리하러 와서 설명을 해주기를, 이 손님은 늘 주문하면서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단골이세요?

  그런 셈이죠. 주인과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은 단골이랄까.

  하고 주인은 씩 웃는다.

  뭐 그런 사람도 있는거죠.

  여기서 끝냈어야 되는데, 평소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R은 그를 만나기 위해 <달의 궁전>에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입은 옷 때문인지도 모른다. 검은색 스웨터 양 팔꿈치에 동그랗게 덧댄 천에는 노란색 스마일 문양이 있었다. 황급히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은 그리하여 스마일로 남게 되었다. 대학 시절 실종된 뒤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없는 R의 친구도 늘 그렇게 귀여운 문양의 천으로 팔꿈치를 덧대고 다녔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을 찾고 찾다가 나중에는 어느 무당을 찾아갔는데, 걱정 말어, 이쁜 색시랑 살림차리고 잘 살어. 찾아서 데려올 생각은 말고, 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졸업한 지 10년이 넘어가면서는 얼굴도 가물가물해진 그 친구를 갑자기 떠올리게 한 스마일 팔꿈치의 그는 한동안 <달의 궁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나타나지 않은 날은 주인에게라도 이것저것 묻곤 했는데, 주인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손님들 눈치 안채게 얼굴을 그리는 것 같긴 했는데, 드로잉북을 펼쳐놓은 적도 없고 보여준 적도 없으니 뭘 그리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두 달 쯤 지났을 때, R은 다시 그를 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옆얼굴 쪽으로 관찰하는 시선을 느꼈으나 일부러 못 본 척 했다. 그에게 그림 그릴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 얼굴을 돌렸는데, 아뿔싸,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드로잉북은 열지도 않은 모양새였고, 그가 R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궁금하세요?

  아, 그게, 그냥, 그림 그리시는 것 같아서...제 얼굴을 어떻게 그리시나, 보고싶달까...

  더듬더듬 겨우 대답을 하고 있는데,

  궁금해하지 마세요!

  단호하게 말하고는 그가 일어서서 자리를 옮겼다. 이 날 그는 드로잉북을 열지도 않고 심각한 얼굴로 술만 몇 잔 마시다 갔다. 머쓱해진 R도 혼자 몇 잔 마시다가 일찍 술집을 나섰다.

  다음 주, R은 먼저 와 있는 스마일 팔꿈치의 그를 보았지만 모른 척 하고 일부러 멀찍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났다. 술집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와서 이미 취해서 얼굴이 벌개진 손님 한 명이 스마일 팔꿈치의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어깨를 툭 친 것이다.

  혹시 오작가님 아니신가? 어디 숨어계시나 했네. 잘 지내세요? 아니 어디 그렇게 잘 숨어계셨대요? 

 오작가라고 불린 그는 얼굴이 하애져서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둘러 나가려는데 좀 전에 아는 체를 한 손님이 그의 팔을 잡았다. 얼마나 꽉 잡았는지 스마일이 구겨졌다. 그가 팔을 빼내려고 애를 썼다.

  아이고, 왜 이러시나. 제가 잡아먹어요? 오랜만에 회포나 풀자구요. 얼마나 궁금했는데요.

  그러나 그는 손님과 눈도 마주치기 싫은 눈치였다. 팔을 빼내는데 온 힘을 쓰더니 결국 문 쪽으로 튕겨져 나가 머리를 부딪혔다. 놀란 R이 일어나 문쪽으로 급히 걸어왔다.

  괜찮으세요?

  절 좀 내버려두시라구요. 제발.

  오 작가라 불린 스마일 팔꿈치의 그는 거의 절규하듯이 말을 내뱉고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그에게 아는 체한 손님에게는 별로 들을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예전에 주로 인테리어용으로 쓰이는 그림들을 그리던 그는 솜씨가 좋아서 제법 수입을 올리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진짜 작품을 해보겠다면서 그 시장을 떠났다고 한다. 오작가라는 것도 그냥 부르는 이름이고 실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쓸쓸해져서 더는 그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그를 떠올릴 때마다 닫힌 드로잉북을 누르고 있던 손과 좀 내버려두라는 말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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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

  서점 문을 열자마자 들어와 카프카의 책을 찾는 그의 얼굴은 초췌했다. 워낙 마른 체구이긴 했으나 그가 서점 2층에 사는 BOB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외모가 달라 보였다. 그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가볍게 하고는 곧장 문학 코너로 걸어갔다. 평소와 달리 분명하게 어떤 책을 찾는 몸짓이었다.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읽던 책이라도 괜찮으면 꺼내 드릴까요?

  책등을 더듬던 야윈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안에서 꺼내 와야 해서.

  서점주인C는 자신의 책과 오래된 재고를 보관해두는 서점 안쪽 작은 방에서 색이 조금 바랜<변신>을 가져와 BOB에게 건넸다.

  저, 잠깐 읽고 가도 될까요? 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어서요.

  그러세요. 저기 편한 자리로 가시죠.

  손님이 없어서 자리에 여유가 있는데도 그는 부러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는 야윈 등을 구부리고 책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그런지 모르게 그의 등에 시선이 꽂힌 채 한참을 서 있는데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모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책을 소리내어 읽고 있는 것인가? 그보다는 그의 등에서 어떤 울림이 퍼져나오고 있었다. 가늘고 긴 등이 울림판처럼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확히 알아듣기 힘든 소리였다. 서점주인C는 입구에 있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손바닥으로 책장을 치는 소리에 흠칫 놀란 C는 BOB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BOB는 등 뒤에 C가 있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책벌레는 뭘 먹는 걸까요? 먼지? 아니면 종이의 섬유질?

  구석에 오래 처박아뒀더니 벌레가 생겼군요. 언제 저 안에 있는 책들 햇볕 소독이라도 해야겠어요.

  저도 벌레였어요.

  예?

  어릴 적 별명이요. 공부, 책, 이런거랑 연관되는 건 아니고, 좀 별나 보였었나 봐요.

  아...

  그래서 생각난건데, 전 거꾸로 해보려구요. 이미 벌레인 터라 사람이 되어 보는게 어떨까 싶기도 해서.

  엉뚱하게라도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BOB의 변신, 이라고 할 만한 소식을 들은 것은 1년 쯤 지난 어느 늦가을이었다.

M도서관 종합자료실에서 일하는 i가 전해준 소식이었다.

  처음엔 누군가 했어요. 서점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얼굴을 똑바로 본 적은 없었거든요. 표정도 너무 달라서 그 분이 맞나 싶었죠.

  집과 서점, 편의점만 왕복하던 그가 무슨 결심을 한 건지 M도서관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서가 정리를 몇 달 했는데 어느 날 그곳 사서에게 어렵게 말을 붙이더니 아이들과 영어책을 읽는 수업을 열었다고 한다. 예닐곱 명의 초등학생들과 빙 둘러앉아 로알드 달의 <Fantastic Mr. Fox>를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은 밝고 활기차 보였다고 하는데 서점주인 C는 그를 마지막 봤을 때의 인상이 남아서인지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i에게 수업 날짜를 물어본 C는 궁금증도 풀 겸, 오랜만에 도서관도 둘러볼 겸 화요일 오후 늦게 서점 문을 잠시 닫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M도서관 1층 문화교실 문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안에서 수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혹시 그와 눈이 마주치면 불편해할까 봐 모자를 꾹 눌러쓰고 지나가는 도서관 이용자인양 슬쩍 문화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아이가 방금 영어로 읽고 한글로 해석한 부분에 대해 BOB가 보충 설명을 해주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서는 i에게서 들은 대로 빛이 나고 있었다. 강사료를 받는 수업도 아니라고 들었다. 그 사이 형편이 좋아진 건가. 유리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BOB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무슨 일이세요?

  뚫어지게 문화교실 안을 보는 C의 모습이 이상해보였는지 마침 옆의 문화교실에서 나온 도서관 직원이 물었다.

 그 순간 교실 안에 있던 BOB의 시선이 유리문 쪽으로 향했고 피할 새도 없이 C와 눈이 마주쳤다. BOB는 생긋 웃으며 인사를 꾸벅했다. 그를 알고 지낸 이래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인사였다. 왠지 민망해서 C는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수업을 마친 BOB가 서점에 들른 것은 예상못한 일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BOB는 살집도 꽤 붙어서 보기에 좋았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요즘 소식이 궁금해서...

  C는 멋쩍게 웃었고 BOB도 씩 웃으며 말했다.

  아직 멀었어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은 거 같아요.

  좋아보이세요.

  이제 조금 껍질을 벗은 정도예요. 어느 정도까지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두고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려는데 BOB가 핸드폰 전화벨 소리에 급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문 여닫는 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아마도 뜬 눈으로 보낼 것 같은 그의 겨울잠이 어떤 탈바꿈으로 이어질지 궁금했으나 그건 지나봐야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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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우연히 풀려나왔다.  오후 늦게 가게로 나온 타로 리더는 서점주인 C가 문앞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좋은 날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앉아 있는 C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가게 셔터를 올리는 소리에 C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타로 리더는 싱긋 웃었고 C도 싱거운 웃음으로 답했다.

  날이 좋네요.

  예. 참 좋네요. 

  차 한 잔 하실래요?

  그럴까요.

  의외로 선선히 C는 타로 리더의 초대에 응했다.

  5분만요. 찻물 올려놓고 나올게요. 

  타로 리더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차주전자에 물을 넣은 다음 전원을 켰다. 투명한 티 머그에 국화차를 몇 잎 넣고 문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드실까요?

  그게 좋겠어요. 바람도 맞을 겸.

  타로 리더가 노란 국화차가 담긴 티 머그 두 개를 쟁반에 들고 나오자 서점주인 C는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하느라 옆으로 옮겨 앉았다. 따뜻하고 향긋한 차향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꿈도 읽으시나요?

  타로 리더가 C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글쎄요. 일단 들어볼까요?

  벌써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는 서점주인 C의 꿈은 이랬다.

  '오르막길 끝에서 꺽어지는 지점에 집이 한 채 있었다. 철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면 땅에 반 층 정도 들어간 높이의 단층집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리고 왼쪽 옆으로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긴 틈이 있었다. 작은 문 안쪽은 바로 부엌이었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 있었다. C는 그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며 서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한 걸음 뒤로 걸어 나와 왼쪽 긴 틈으로 걸어들어갔다. 햇빛이 들지 않아 차갑고 어두웠다. 걸어 들어가니 오른쪽 눈 높이에 작은 창문이 두개 있었다. 각각의 창문으로 방들이 보였다. 첫번째 방에는 창문을 향해 책상이 하나 있었고 누군가 고개를 푹 숙이고 노트에 필기를 하고 있었다. 무엇을 적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 숙인 사람의 등은 왜소했다. 벽에는 낡은 옷이 몇 벌 걸려 있었고 다른 가구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고개 숙인 사람은 노트에 푹 처박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몇 걸음 걸어나가 옆방 창문을 들여다 보았다. 어두운 방은 비어있는 듯 보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 등을 뒤로 한 채 누워 있었다. 가늘고 긴 형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벽은 서가로 꽉 채워져 있었다. 무슨 책이 있는지 보려고 고개를 들이민 순간 누워 있던 형태가 갑자기 움직였다. 움찔해서 뒤로 물러났다. 왠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다시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조금 더 걸어들어가니 오른쪽으로 꺽어져서 문이 하나 보였다. 그 문으로 들어가니 긴 부엌이 나타났다. 음식 냄새는 나지 않았는데 부엌 귀퉁이에서 형체가 보여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군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왜 그런지 불은 붙지 않았고 아궁이에 앉아 있는 형체는 추운지 몸이 점점 오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살금살금 뒤로 발길을 돌려 문 밖으로 나왔는데 공간이 바뀌어 너른 마당이 나왔다. 마당 가운데 평상이 있었고 초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마당의 풍경이 낯익어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언젠가 가 본 곳인가, 예전에 살았던 곳인가, 혹시 아는 사람인가. 그렇게 한참을 서 있는데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남자의 시선이 꽂혀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몸이 대문 밖에 나와 있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미로같은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는데 모퉁이를 돌 때 마다 낯익은 사람들과 부딪혔다. 이상한 것은 분명 낯이 익은데 누군지는 모르겠다는 것. 기억은 나지 않고 사람들이 나타날 때 마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빨리 하는데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하나? 순간 장면이 바뀌어 어떤 스님이 법문을 하고 있었고 법당 앞 마당에는 아까 골목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무서워서 빠른 걸음으로 도망쳐 나오는데 밖으로 나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마당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졌고 숨쉬기가 힘들 만큼 한참을 걸어나온 다음에야 너른 마당이 골목 끝으로 좁아졌다. 골목으로 들어가니 작은 창문 두 개가 다시 보였고 이번에는 창문 안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골목 끝으로 뛰었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밝은 곳으로 나오니 바로 앞에, 반 층 정도가 땅 속으로 들어가 있는 단층집의 현관이 보였다. 현관에 문패가 있어서 이름을 보려고 한 걸음 뗀 순간 꿈 밖으로 빠져 나왔다.'

  벌써 여러 번 꿈에서 본 집이었어요.

  예전에 실제로 가 본 집은 아니구요?

  예.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실제로 가 본 기억은 없어요.

  두 사람 손에 들린 티 머그에 국화꽃이 환하게 피어 올랐고 산들바람이 차향을 호젓한 공원으로 싣고 갔다. 타로 리더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차맛을 음미했다.

  꿈은 꿈 꾼 자의 것이니, 꿈 꾼 자만이 읽을 수 있겠지만,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타로 리더가 서점 주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꿈의 꿈이라 하고,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겠어요.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 저녁, C는 여행 가방을 하나 들고 집에서 나왔다.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다. 막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C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떠나보지 못한 집을 한 번 더 돌아보고 골목길을 빠져 나와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질리도록 뛰어다닌 골목이었으나 버스를 탄 순간 아득한 기억 속 공간으로 밀려났고, 수없이 많은 글을 끄적이던 작은 방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던 작은 창문도 종이짝 하나 만큼의 가치도 없게 느껴졌다. 골목길 그 집이라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기억해낸 작은 집은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더니 언젠가부터는 빛나는 한 점으로 그의 하늘 한 구석에 고정되었다. 골목길을 벗어난 그는 이제 가두어지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열에 들떠 끄적이는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니 지금 여기가 아닌 곳으로 계속 도망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걸 알게 되자마자 암벽 위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되었고, 이 광경이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긴 꿈에서 깨어났다.'  

  말을 마친 타로 리더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서점 주인 C도 한 모금 차를 마셨다.

  향이 참 좋네요.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소리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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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도서관 종합자료실에서 근무하는 i는 쉬는 날이면 서점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책이 쌓여 있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쉬는 날에도 책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누가 물었더니 i는 이렇게 대답했다.

  깨끗한 책을 만지고 싶어서 그래. 난 새 책 냄새가 좋아.

  지금 i는 얼룩이 지고 책 귀퉁이는 장을 넘어갈 때마다 접혀 있고 일부 페이지는 뜯겨 나간 책을 앞에 놓고 망연자실해 있다. i가 아끼던 책이다. 지난달 반납되었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책이 누더기가 되어 서가에 거꾸로 꽂혀있는 것을 조금 전 발견한 것이다. 최근에 대출반납된 기록은 없었다. 누군가 도서관 안에서 저지른 일이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 책 귀퉁이에 접어놓은 것을 펴고 뜯겨 나간 부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글은 이어지는 걸로 봐서는 그림이 있는 페이지만 뜯어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책을 살려보기로 했다. 다른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빌려 사라진 페이지를 확인한 다음 복사를 해서 해당 페이지에 붙였다. 얼룩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읽을 수 있는 책이긴 했지만 모양은 보고싶지 않을 만큼 흉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책을 새로 살 수 있다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사려고 했으나 절판된 책이었다. 누더기가 되었어도 읽을 수는 있으니 서가로 돌려보내야 했다. 이후로 그 책의 제목은 '누더기'로 바뀌어 불렸다. 얼마 후에는 '누더기'의 존재도 잊혀졌다. 뜻밖의 괴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이용자가 평소보다 적어서 i는 동료들과 시간을 나눠 도서관 장서의 배가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 '누더기'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책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i는 책 등에 인쇄된 낯선 제목에 순간 멍해졌다가 책을 집어 들었다. 레이저 프린터로 인쇄된 글자는 '괴물은 나'였다. 원제와는 근접하지도 않은 제목이었다.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책 형태의 조형물로 보였다. 여기저기 다른 책에서 뜯어온 것이 분명한 그림과 사진 이미지 그리고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텍스트들이 책의 형태로 묶여 있었다. 책의 분량을 보니 꽤 많은 책에서 뜯어낸 것 같았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많은 누더기들이 존재함이 분명했다. 텍스트들은 싯귀절과 소설의 일부 문장들이었다.

 "아! 이 참혹한 기형이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지 그때는 온전히 알지 못했다." (프랑켄슈타인, 151쪽) 친절하게도 어떤 책에서 인용했는지도 적혀 있었다. 

  이 날부터 직원들의 관심은 누가 이 괴물 책을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 박사인가에 쏠렸다. 일단 책에 묶여 있는 것들이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책들의 대출반납 기록을 확인하여 겹치는 인물을 찾기로 했다. 괴물 책은 의외로 볼 만 했다. 모양새는 좀 흉측했지만 이미지들이나 텍스트들이 새로운 구조로 얽히면서 미술 작품 같기도 하고, 내용상으로는 누군가의 작업 노트나 독서기록 같기도 했다.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없었지만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잠깐은 멈춰 볼 만한 매력이 있었다. 사라진 누더기에 대해서는 이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직원들은 '괴물은 나'를 돌려가며 읽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찾는 일도 시들해졌다. 후보가 3명 정도로 좁혀졌지만 수사는 왠일인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찾아왔다. 앞머리가 눈을 거의 가리고 있는데다 모자까지 꾹 눌러쓰고 있어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그가, 자료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와서는 그 책을 찾았다. 원래의 책도 아니고, '누더기'도 아니고, '괴물은 나'를 찾는 그. 바로 i와 동료들이 한동안 열심히 찾았다가 언제부턴가 잊고 있던 프랑켄슈타인 박사였다. i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작품'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그 차갑고 당당함에 압도당한 i는 아무 말도 못하고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괴물은 나'를 내밀었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료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 몇 분쯤 흐르고 나서야 i는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닫고 그의 뒤를 따라갔지만 도서관 정문 부근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그랬냐고 물었어야지, 아니 그러시면 안된다고 말했어야지.

  동료들이 다그쳤지만 i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글쎄 자기 '작품'이라잖아.

  다음 순간 정신이 돌아온 i는 '도서관 장서 훼손 금지'라고 커다란 문구를 출력해서는 자료실 여기저기에 붙이기 시작했다. 이 이상하게 불편한 느낌은 뭐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다음 날 '괴물은 나'가 있던 자리에는 원래의 책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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