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입술 색이 옅어서 생기 없어 보일 때가 많으므로 어지간하면 립스틱은 바른다. 꼭 발라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귀찮으면 몇 시간씩 생입술로 다니는 일도 많다. 하여 귀찮지 않기 위해서 집과 가방과 사무실에 모두 립스틱을 구비해놓았다. 반드시 손닿는 곳에 있어야만 바르기 때문에...

 

그런데 요즘 가방용 립스틱만 빼고 한꺼번에 똑 떨어져버렸다. 그래서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색조 화장을 잘 하지 않으니까 선호 브랜드도 없고, 화장품의 품질이 가격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간 로드샵 립스틱을 주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도저히 그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찾을 수 없는 강력하고도 급박한 충동이 들었다. 비싼 립스틱을 사야 한다..! 너무나 강렬한 충동이라 거의 강박에 가까웠을 지경이었다. 나는 때마침 옆에 우두커니 서있던 백화점으로 향했고, 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어떤 종류의 제품도 구매해본 적이 없는 브랜드를 골라 직진했다. 그리하여 선택된 곳은 바비 브라운이었다.

 

직원은 몹시 친절하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무얼 찾으시나요? 립스틱이요. 색상은요? 모르겠어요. 촉촉한 타입 찾으세요? .. 별로 상관 없는데요........ 참으로 충동구매스러운 발언을 하고 있는 내게 그녀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3개 정도의 색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중 두 개를 골라 입술에 발라달라고 했고, 그녀는 화장솜에 향기나는 리무버를 묻혀서 뭐 별로 올라가있지도 않은 내 입술을 정성스레 닦고서 깨끗한 브러쉬로 꼼꼼히, 정말 꼼꼼히 립스틱을 발라주었다. 립 리무버를 먹어도 되는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삼키지 않고 참았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웠다. 참 묘한 자세였다. 립스틱을 발라주려면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어야 하는구나.. 마음만 먹으면 이 여자의 입술을 훔칠 수도 있겠어.. 같은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아무튼, 평소에 나는 립스틱을 바르는 데 한 3초 내지 5초 정도 걸리지만 그녀는 1분이 넘어가도록 정성스레 색을 칠해주었고,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는 두 색조에 대해 그 어떤 객관적인 평가도 내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백화점 안의 조명이 너무 주황색이었고, 안경은 일 할 때만 쓰기 때문에 거의 앞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육감으로 둘 중 분명히 더 매력적으로 보였던 하나를 골라가지고 쿨하게 집에 왔다. 3.8그램 짜린데, 39천원이었다. 38천원일 수도 있다. 기억이 잘 안 나니까 계산의 편의를 위해 38천원인 걸로 하자. 그러면 이건 1그램에 만원짜리 립스틱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무게의 금값에 비하면 25%도 안 된다. 염가로구나.

 

그런데 놀라운 것은, 12000원짜리 1+1 로드샵 립스틱을 샀을 때보다 훨씬 즐거웠다는 점이다. 나는 정말 즐거웠다. 3.8그램짜리 스틱 한 개를 가방에 넣고서 지하철을 타고 내내 서있었는데, 3.8그램만큼 발이 더 피곤했어야 정상이지만 오히려 몸이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 보통은 출근 과정을 싫어하지만 빨리 내일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른 일어나서, 얼른 화장을 하고 싶어! 노란 조명 때문에 그 색깔조차 명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나의 립스틱은 그처럼 무조건적인 만족감을 나에게 선사해 주었으며, 놀랍게도 일주일 더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자꾸만 립스틱 생각에 즐겁다.

 

나는 이 기이한 만족감의 정체가 궁금했다.

 

평소 명품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데, 왜 이것이 이토록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한단 말인가? 만원 썼으면 만천원정도 즐거운 것이 나의 평범한 소비생활인데, 38천원을 쓰고 380만원만큼 즐거우냔 말이다.

 

 

 

립스틱 효과.

 

경제적 불황기에 나타나는 특이한 소비패턴으로, 소비자 만족도가 높으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사치품의 판매량이 증가하는 현상.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에게 비용 부담이 적은 사치품 소비는 자기 형편에 맞춘 작은 사치로서 불황기를 극복하는 합리적 소비패턴인 셈이다-라고 네이버에 쳤더니 나왔다. 내가 지금 립스틱 효과에 걸려들었나? 립스틱 1그램에 1만원을 준 것이 아니라, 바비 브라운이라는 브랜드 네임을 38천원에 구매하고서 사은품으로 립스틱까지 받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인가?

 

 

나는 립스틱 효과를 검정해보기로 했다.

 

나의 귀무가설은 이렇다.

 

GDP과 립스틱 매출액 간에 그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립스틱 매출액과 GDP 자체는 일차적으로 살펴보면 꽤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계절변동, 추세변동, 불규칙변동을 제외하고 순수한 순환변동만 뽑아보면 별 상관이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2004년의 자료부터 이용 가능했기 때문에 관찰치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나의 결론은 그러하다. 즉 귀무가설을 기각할 수가 없고, 결국 립스틱 효과는 없는 것 같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자세한 분석 결과를 아래 첨부한다. 안 읽는 편이 좋다.)

 

접힌 부분 펼치기 ▼

 

0. GDP는 통계청에서립스틱 매출액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서 자료를 얻었으며립스틱 매출액은 립글로즈립밤립라이너와 립스틱을 포함한 매출액이다해당 통계가 2004년부터 나왔다.


1. GDP와 립스틱 매출액(hap으로 표시간의 관계


산점도를 그려보면 위와 같이 두 변수 간에 양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GDP를 종속변수로립스틱 매출액(HAP)을 결정변수로 두면 위의 결과가 도출된다. F값도 높고 R제곱 값도 높고 P값은 낮고 좋다. HAP이 GDP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가설을 기각할 수 있다. (조금 낮아보이는 DW 통계량은 무시하기로 한다그렇게까지 엄밀하게 분석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AR(1)항을 넣었을 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별로 유의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밝혀둔다)

  

위 두 변수는 계절조정까지만 된 것으로 불규칙변동과 추세변동을 포함하고 있다공통적인 추세를 가지고 있으리란 사실을 감안하면 위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하여 순환변동치만 뽑아서 다시 검정해보기로 한다.


 

2. GDP 순환변동치과 립스틱 매출액 순환변동치간의 관계


2.1) 순환변동치는 각각 HP 필터를 적용하여 뽑아냈으며 람다값은 연간 자료에 공히 추천되는대로 6.25를 사용했다.


2.2) 내용

 


 산점도를 보면 딱 봐도... 별 관계가 없다.


 

 


전혀 뭐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가 나왔다.


 

 

그레인저 검정 결과는 위와 같다두 변수가 서로에게 그레인저 인과관계가 없다는 가설을 기각할 수 없다 (둘이서 서로 그레인저 인과관계가 없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

 

결국 순환변동치만 놓고 보면 참 둘 간에..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어보인다..

 

무슨 상관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로그로그차분 등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았고 여기에 밝히기까지 할 만큼 흥미로운 결과는 없었다위 두 가지를 명기하는 것은 내가 뭐라도 해봤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지 위 결과가 무슨 엄밀한 정확도라도 있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사실 GDP는 단위근도 있을 것 같고 엉망진창이다이런 식으로 분석했다가는 보통 큰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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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가 구할 수 있는 자료는 립스틱 제품군 전체의 판매액이었기 때문에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브랜드의 판매액만을 가지고 분석을 해보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립스틱 효과의 방점은 가난한데 립스틱을 갖고 싶었다는 게 아니라 가난한데 명품을 갖고 싶었다는 것에 찍히니까.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진정 자료를 구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화장품 회사를 다녀야만 가능한 일일 것 같다....

 

그럼 왜 나는 이 립스틱 하나를 사고 이토록 즐거울까?

립스틱 효과를 부정한다면, 다음의 이유가 가장 강력히 나의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아마도 나의 구매력에 즐거웠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돈을 번다는 게 좋다. 12000원이 아니라 38000원 짜리 립스틱을 써도 나는 괜찮다. 그 느낌이 즐거웠다. 소비능력이 곧 생존능력이 되는 사회에서 나는 지금 꽤 안정적으로 생존해나갈 수 있다립스틱을 사면서 그것을 확인했고, 립스틱이 눈앞에 보일 때마다, 입술 위에 이물감을 느낄 때마다 다시 상기할 수 있는 것이다. , 역시 인생의 기쁨이란 얼마나 수월하게 생존할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인가..

 

최근 워킹데드를 보고 있다. 좀비가 창궐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굉장히 자주 고민한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도 한 분기 이상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38천원을 주고 립스틱을 살 수 있는 지금 이 시대에서라면 꽤 생존 가능성이 높다. 나는 드라마에 상당히 몰입하는 편이니까... 아마 생존에 불안감을 느끼다가 립스틱을 통해 안도한 것 같다....라는 가설을 새로이 새워본다. 좀비물이 이렇게 정서에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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