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는 전쟁을 알았고-포병이었다-그의 예술은 공격적이었으며, 그 공격성은 전쟁광들에 대한 증오에 비례했다. 독일의 다다이즘 전체가 어느 정도는 그와 비슷했다. 베를린에서 열린 제 1회 국제 다다박람회는 "예술은 죽었다"라는 선언과 "타틀린의 기계미술이여 영원하라"라는 부제를 내걸었다. 참가자들은 독일의 가치관을 비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예술을 독일인의 의식에 강요해 독일의 가치관을 파괴할 작정이었다. 그 수단은 일종의 적극적 유행이었다. 다다이즘의 원래 정신은 전쟁의 그늘에서 펼치는 일종의 과장된 유희, 즉 상충하는 애국심들에 대한 경멸을 천진스러운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다다라는 말 자체가 '흔들 목마'의 아기말이었다. 취리히 다다이스트들은 한스 아르프가 "인류를 바보처럼 보이게 하려고 예술을 이용하기까지 하는 권위주의를 향한 어리석은 광기"라 부른 것에 맞서 익살스럽지만 확실하게 항의를 표현했다.

 

천둥 같은 포성이 멀리서 들려오는 동안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풀칠을 하고, 낭송을 하고,  시를 짓고, 노래를 했다. 우리는 이 시대의 광포한 어리석음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초등학생의 미술을 추구했다. 우리는 새로운 질서를 갈망했다.

 

1918년 7월의 다다이즘 선언에서 트리스탕 차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위대하고 부정적인 파괴 작업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쓸어 없애고 청소해야 한다. 광란의 정신 상태, 공격밖에 모르는 철저한 광기가 세계를 강도들의 수중에 넘겨 서로를 찢어죽이고 수세기를 파괴한 지금 우리는 개인의 정결함을 맹세해야 한다.

 

그에 따라 차라는 미를 암살하는 꿈을 꾸었다.

다다이즘 예술은 강렬하면서도 단명했다. 그들의 주요 작품은 포스터, 책표지, 도안 문자, 팸플릿, 시 낭송 등 우리가 미술가들과 시인들로 이루어진 운동에게 기대할 수 있는 매체들이었다. 이러한 단명성, 그 매체들의 덧없음을 차라는 공공연히 '전투 수단'이라고 불렀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난 취리히의 볼테르 카페에서 종잇조각, 누렇게 변한 스냅사진, 몇 장의 스케치로 다다미술 전시회가 열리곤 했다. 다다이즘은 훗날 아름다움이 발견되기를 거부한다. 이것이 다다이즘의 위대한 철학적 의미이다.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예술로서 거부당했던 것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의 자격을 얻고 예술로 인정 받는 훈훈한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그런 일이 실제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전위예술에 일어났다. 예를 들어 마티스는 많은 이들에게 미의 한 전형이 되었다. 당대에 욕을 먹었던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듯이. 이와 반대로 나는 다다를 내가 반항적인 전위예술이라 부르고 있는 것, 그 작품들을 아름답다고 인지하면 잘못 인지한 것이 되는 예술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그들이 의미하는 바도, 바라는 바도 아니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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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단토의 <미를 욕보이다>는 아무데나 펼쳐 읽으려고 했는데, 맥락없이 읽어지는 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무데나 펼쳐서 읽는데, 자꾸 앞으로 앞으로 찾아가며 읽다 보니 진도 자체가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글들을 읽으면 역시나 속이 시원하다.가려운데를 긁어주는 느낌이다. 미술이나 시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는 그런 어려움들도 그냥 받아 들이기만 하면 어떤 형식의 파괴나, 흔히 말해는 추해보이는 것들도 추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인식 없이 바라보게 된다. 지난 주말에도 시험기간에 책상정리하는 모양새로 굳이 안가도 되는 미술관 투어에 참여했는데,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하는 불편함 속에서도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역시나 강의 장소에 앉아 있을 때와 전시공간이나 공연공간에 있을 때 가장 만족감을 느낀다. 이번 미술관 투어에서 세 명의 도슨트들에게 설명을 들었는데, 어찌나 앵무새처럼 외워서 말하는지, 참...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설명이 매끄럽고 막힘이 없었지만,너무 기계적이고 겉핥기만 하는 듯했던 찜찜한 느낌을 이런 책을 만지면서 조금은 해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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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작은 미술관은 그야말로 미술관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볼 수 있는 읽을 수, 볼 수 있는 책이다. 여행지에서 가는 미술관들은 일단 인증하는 느낌으로 훑기가 쉬워서 여간해선 작은 미술관을 돌아 볼 여유가 없다. 하지만 갈 수만 있다면 가기만 한다면 작은 미술관 체험은 오랫도록 기억에 남을만한 정취를 제공한다. 유럽의 작은 미술관의 첫 섹션은 빈의 벨베데레 미술관인데, 작은 미술관이라고 하기엔 좀 머쓱한 느낌이 있지만, 루브르나 오르세와 비교해서라고 해두자.

 

"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은 고객의 취향에 잘 부응하는 상류층의 여자들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빈은 자유가 지나쳐 방종과 타락에 가까운 사회였고, 이 작품 역시 그런 퇴폐의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그림 속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유디트의 얼굴은 검은 머리카락과 주변의 금박 때문에 암흑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검은색과 황금색이 이토록 조화를 이루는 작품은 흔치 않다. 악에서 태어난 듯한 그녀는 그림 구석에 적장 홀로페네스의 머리를 잡고 누르고 있다. 마치 자신이 나온 암흑 속으로 그를 데려가는 것 같다.

1901년 평론가 리하르트 무티는 클림트가 그린 여성들을 보고 이렇게 평했다. "새로운 여성, 특별한 부류의 빈 여성이 클림트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유디트요, 살로메다. 그들은 황홀할 정도로 잔인하고 매혹적일 정도로 죄악에 가득 차고 환성적이도록 심술궂다"라고."

 

그래,유디트가 내리누르고 있던 저 머리...가 있었지. 안다고 생각하고 허투루 지나치는 순간들 속에 놓치고 지나고 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클림트가 너무 유명하고 상업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싫었는데, 요즘은 이런 거 저런 거 필요없도 그냥 다 좋다 주의가 되어 버렸다. 꽃도 야생화든 절화든 조화든 다 좋아져버린 것처럼. 싫었던 부분, 클림트의 장식적인 면도 좋고 클림트가 그린 오스트리아 호수 풍경들은 정말 더 좋다.

미술관에서 가서 차분히 작품을 감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일단 현장에 있다는 설레임과 주변의 번잡함이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아이들을 동행했음에야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십년 전에 방문한 벨베데레는 '키스'와 에곤 쉴레의 그림들만 기억이 나는데, 책을 읽으며 아, 이런 것들도 있었구나. ㅠㅠㅠㅠㅠ...한다. 작정하자면 빈을 목적으로만 비행기표를 끊으면 된다. 얼마든지, 오래, 조용하게, 그림들을 마음에 담을 수 있겠지라고 공허한 다짐을 해본다.

 

그리그리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거쳐, 이 책의 마지막 일정은 프라하 무하미술관이다.

무하의 그림은 회화라기 보다 그래픽디자인의 느낌이지만, 장식미술적인 느낌이라는 데서 클림트와 닿아 있다. 무하미술관은 그야말로 골목 안에 있는 작은 미술관이고, 그게 그거인듯 다 비슷하기 때문에 더 적절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 그림은 무하의 <황야의 여인>인데 무하가 슬라브 서사시 <러시아 농노 해방, 자유로운 노동은 나라의 근본>을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화려한 환타지 같은 그의 포스터들보다 이런 그림에 더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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