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동안에 한라산에는 큰 눈이 내렸다. 우리는 눈을 구경하려 비자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중산간의 숲을 찾아갔다. 눈으로 뒤덮은 비자나무숲은 생각만큼 아름다웠고 그 길을 걷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잠시 쉬는 동안 보온병에 담아간 물로 커피를 내려 마시기로 했다.커피를 내리던 내눈에 들어노는 것이 하나 있었다. 처음 보는 붉은 열매였다. 앵두 같기도 하고 석류의 속살 같기도 했는데, 흰 눈 위에 놓여 있는 모양이 참 고왔다. 나는 그 열매를 주워 생각도 하기 전에 입속으로 가져갔다.

 열매를 깨물자 과즙이 터져나왔고 나의 비명도 함께 터져 나왔다. 맛을 느낄 새도 없고 아리고 맵고 뜨겁고 따가운 감각이 입 전체를 휘감았다. 바로 입에 있던 열매를 다 뱉어내었지만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점점 심해졌다. 친구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라면서도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면 내가 먹은 열매의 사진을 몇 장 찍어 두었다.

 내려오는 길에 한 친구는 인터넷 검색으로 내가 먹은 것의 정체를 찾아주었다. 천남성이라는 식물의 열매라고 했다. 강한 염기성과 독성이 있어 조선 시대에는 사약의 주재료로 쓰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행스러운 일은 열매를 삼키지 않고 뱉었다는 것이었고 불생스러운 일은 내 입술과 혀가 퉁퉁 붓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숲길을 다 내려와 물로 입을 몇 번이고 씻어내고 나서야 통증은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그날 저녁, 나는 입속이 다 헐은 채로 낮에 먹은 열매에 대해 더 알아보았다. 친구의 말처럼 내가 먹은 천남성은 부자라는 식물과 함께 사약의 주재료로 쓰였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장면과 달리 사약은 마시자마자 피를 토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마시고 마서 위장에서 사약이 흡수될 떄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이 얼마간 더 따른다. 비운의 삶을 살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은 사약을 마신 후 약기운을 빨리 돌게 하기 위해 군불을 땐 따뜻한 방에 들기고 했다. 또 하나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사실은 사약의 말뜻이다. 사는 죽을 사가 아니라 줄 사자를 쓴다. 말 그대로 왕이 하사한 약이라는 것이다. 육신을 훼손하는 능지처참이나 참수형에 비해 조금 관대하다는 의미였을까.

 

놀라운 것은 이 천남성이라는 식물이 소음 체질의 사람에게는 약으로 처방된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천식과 중풍, 파상풍 관절염에 널리 사용되어왔다고 한다. 물론 자연에서 채취된 생약을 가공해 처방 재료로 만드는 한의학의 포제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말이다.

 

극약이 곧 극독이고 극독이 곧 극약이라는 말은 수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가 몸으로 들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고 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마음으로 들이는 숱한 사람들과 관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극약과 극독 중에서

 

순대를 좋아했다. 고기와 비슷한 맛이 나기 때문이다. 분식집 같은 곳에서 순대를 덮어두었던 비닐이 열릴 때 훅 끼쳐 나오는 김을 보는 일도 좋아했다. 올라오는 김이 적으면 조금 전 누가 순대를 사갔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고, 김이 풍성하게 오르면 순대를 사간 사람이 한동안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허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순대를 파는 분께서는 내게 간과 허파도 함께 넣겠느냐고 물어오는데 그럴 때마다 간은 먹지 않겠다고 했다. 한 친구에게 간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생긴 버릇이다.

 

친구는 맛있는 돼지 간을 분별하는 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순대와 혁명 중에서

 

고등학교 3학년, 수학능력 시험을 하루 앞둔 날 아버지는 평소 잘 들어오지 않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시험을 치르지 말라고 했다. 내일 시험을 보면 대학에 갈 것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을 공산이 큰데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무 불행하고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욱이 가족이 생기면 그 불행이 개인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번져나가므로 여기에서 그 불행의 끈을 자르자고 했다. 절을 알아봐줄 테니 출가는 하는 것도 생각해보라고도 덧붙였다.

 

불친절한 노동 중에서

-------------------------------  

나는 애인의 손바닥,

애정선 어딘가에 걸쳐 있는

희끄므레한 잔금처럼 누워

 

아직 뜨지 않은 칠월 하늘의

점성술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미신 중에서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8-15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5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