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 민족주의자와 경찰, 조폭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존슨 너새니얼 펄트, 박광호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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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권력체가 형성되기 위해선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합니다. 국가의 힘이 약한 곳에선 폭력 단체들이 의사(擬似)국가가 됩니다. 로레타 나폴레오니는 의사(擬似)국가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합헌성과 주권성 뿐이며, 국가와 다름없는 자본력과 인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 폭력 단체들과 폭력의 사용권을 걸고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며, 결국 국가가 완성될수록 폭력을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대한민국은 견고한 시스템을 갖춘 국가이며, 당연히 대한민국의 폭력은 오직 정부에 있습니다.

하지만 존슨 너새니얼 펄트는 대한민국의 폭력이 민간 차원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을, 그 폭력이 경찰들이 눈감아주는 수준이 아니라 경찰에게서 부탁받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소말리아 같은 과도기 단계의 정부에서 벌어질법한 현상이 세계적인 경제국가이자 확고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폭력 관계자들을 만났습니다. 고능력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들이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는 자국 시민들이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도 방치하는 것,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같은 권위주의 독재자들과 전투적인 민주화 투쟁을 벌여 문민 통치를 확고히 달성한 시민사회가 그런 행위를 묵인하는 것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강제 철거를 실시한 이들이 아니라 이에 저항한 시위자들이 사법제도의 폭력을 감당해야 했다. 경찰과 정부가 가혹한 탄압에 대해 비난의 포화를 맞고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경찰이 개입한 단 하루에만 집중되어 있다. 용산 사건은 언론도 시민사회도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경찰이 개입할 필요가 없었던 대다수의 사건의 피해자들에게는 그런 관심이 돌아가지 않았다. - p.137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만들어지는 태동기에 폭력의 역사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초기에 이승만은 폭력의 주도권을 제대로 쥐지도 못했고, 민심도 얻지 못했지만, 미국의 용인 아래 폭력을 사용하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져갔습니다. 대한민청, 서북청년회, 방첩대 등의 민간폭력단체는 정치인과의 연결고리가 단단했고, 정부 폭력 못지않는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승만의 독재행위에 대해 진보 사회세력이 반발했고, 결국 이승만은 도망치고 맙니다.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을 종식시킬 힘을 가지고 있던 사회세력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임기 전반엔 겉으로나마 민주주의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 민간폭력단체를 공격했고, 대부분의 폭력단이 몰락했습니다.

박정희는 민간 폭력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이 공고해지고 정부관료체계가 갖춰지면서 경찰이 폭력을 맡았습니다. 경찰이 깡패였고, 국가폭력이 먹히는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의 경험은 이미지화되어 아직도 공권력의 언저리에 남아 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와 사회세력은 또다시 충돌했고, 박정희 역시 몰락했습니다. 전두환은 광주에서 공권력의 폭력을 행사하며 뒤를 이었지만, 사회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3S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유흥이 허용되면서 민간 폭력단체 역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이후 점점 강해지는 민주화의 열망은 정부로 하여금 공권력의 폭력을 쓰기 힘들게 했습니다. 1987년 이후 경찰의 중립성과 자율성 확대는 끊임없이 요구되었고, 민주화 이후에는 권위주의 시대에 쓴 방법들을 더는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SJM은 시위자들을 진압하고 해산하고자 컨택터스를 고용했는데, 컨택터스는 민간 경비 회사로 이명박과 새누리당원들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더욱이 컨택터스는 이명박이 대선에 출마할 당시 개인 경호를 맡았고, 재개발사업에도 개입한 바 있었다. 7월 27일, 컨택터스 직원 200명이 헬멧, 방패, 곤봉을 갖추고 현장에 도착했고 노조원 150명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SJM 노동조합에 따르면, 노조원 한 명이 112에 전화했다. 한 시간 뒤 도착한 경찰은 공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경비 용역들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그 사이에 충돌은 몇 시간 동안 지속됐다. - p..158~159


공권력을 쉽게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정부는 다양한 분야에서 폭력을 통한 해결책을 사용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력 하청 현상입니다. 경찰과 불법 무장 단체들은 법원과 검찰의 후원을 받으며 불충한 시민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통제하거나 무력화한다는 명목 아래 투입되었습니다. 재개발 사업, 노점상 문제, 노조 탄압에 있어서 선두에 서는 것은 더이상 경찰이 아닙니다. 정부 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무력을 하청했습니다. 유성기업, 쌍용자동차 등 다양한 곳에서 무력을 행사한 것은 민간 폭력, 용역이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노조의 파업에 대해서는 폭력행위를 금지하면서 사용자의 직장폐쇄에 대해서는 폭력을 행사해도 직장폐쇄의 효력과 무관하다는 행정해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국가폭력은 유의미한 상징적 유의성을 가지고 있고, 국가와 시민사회 집단 모두의 정치적 정당성을 평가하는 해석상의 틀이 됩니다. 민중총궐기 당시 경찰 물대포를 맞고 의식불명이 된 사건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경찰의 폭력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용역의 폭력이었다면, 관심도는 크게 떨어졌을 것입니다. 무력 하청 현상은 폭력의 책임을 모호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력 하청을 통해 민간 폭력단체가 시민들을 폭행하고, 그것을 시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경찰이 외면하는 순간, 명백한 불법이며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무력 하청은 큰 시위로 이어질만큼 시민사회를 자극하지는 않지만, 시민들은 그 폭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용역은 사회적 갈등 해소를 아직도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이 낳은 현상입니다.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은 대화와 토론이라는 것을 정부와 기업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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