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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 - 불안형 내셔널리즘의 시대, 한중일 젊은이들의 갈등 읽기
다카하라 모토아키 지음, 정호석 옮김 / 삼인 / 2007년 11월
평점 :
쪽발이, 춍(チョン), 되놈, 가오리방쯔(高麗棒子), 르번구이쯔(日本鬼子)... 이것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주로 인터넷상에서 서로를 비하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입니다. 전세계적으로도 이웃나라끼리 친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한중일이 서로 으르렁대는 것은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직접 체험한 세대는, 역사적인 이유로 이웃나라 사람에 대한 혐오 증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존 일본 논단에는 한국이나 중국의 민족주의가 반일 감정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식의 논의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민족주의는 단지 다른 나라를 비판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저자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민족주의의 해석을 타국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일본 우파 논단의 정반대의 관점을 취합니다.
기존에 한중일 민족주의의 해석은, 역사 문제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 간의 민족주의적 응수를 마치 한 나라의 국민 모두가 단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논의해 왔습니다. 한중일 민족주의 대립을 국민 모두가 단일한 의견으로 바라본다는 관점을 저자는 당구공 모델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당구공 모델은 한중일 모두가 경험한 고도성장기에 사회의 중추를 담당한 세대에 어울리는 개념이였습니다. 이 시기의 사회는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적 통일감을 양성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고, 이러한 관점이 민족주의에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가 지나고 등장한 사회유동화라는 세계적 조류는 이러한 당구공 모델의 민족주의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개인화된 시장 경쟁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고용 문제 등을 반영한 서구형 민족주의, 개별불안형 민족주의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좌파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속죄를 일본인 전체의 해답으로 내놓은 데 반해,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우파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면죄를 전 일본인의 해답이자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경제가 발전하면서 일본 민족주의에는 생활보수주의와 초안정사회라는 자화상이 나타났고,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일본 좌파는 풍요롭고 안정된 사회를 약속하는 우파의 약속을 받아들이며 그 세가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일본의 고도성장기에는 견고한 관료제하의 사회운영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일본의 민족주의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중의 경영이라고 알려진 일본의 회사주의는, 고도성장기의 주류 세대, 단카이 세대라고 불리는 시대적 우연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는 시스템이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고부가가치 산업화를 둘러싼 논의는, 경제 외적인 이유의 이민 유입을 거부해 온 일본의 상황을 그대로 둔 채 저임금 노동력을 자민족 내부로부터 무리 없이 조달할 것을 장려했다. 결국 젊은이들을 그 최대 공급원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편의주의적이기 이를 데 없는 일본 특수성론은 당시의 틀로 말하자면 보수 측에서 나온 것으로서, 일본 내셔널리즘과도 높은 친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으로부터 보건대, 당시 젊은이들 이후의 세대는 당시 그들이 상정하고 있던 '국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민족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구획한 다음, 나머지 사람들은 다 저임금 노동자가 되면 만사 해결이라는 식의 내셔널리즘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 p.85
회사주의를 토대로 하던 전후 일본의 민족주의는 결국 젊은 세대에게 비용을 떠넘기고서야 가능했던 가치였습니다. 고부가가치 산업과 서비스업은 생산과정에서 대량의 저임금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데, 근면한 젊은이들이 순순히 그런 일에 종사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화이트칼라, 기업의 정사원이 되서 전철로 출퇴근하는것이 이상적인 사회인으로 인식되는 반면에 현실은 대다수 젊은이들에게 정사원은 커녕 시간제 근무 자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정규직 아버지와 편의점 아르바이트 아들이라는 조합이 흔한 일상이 된 것입니다. 기존의 개발 체제와 사회유동화 이후의 상황이 혼재함에 따라 나타나는 젊은이들의 불안감이 과거 세대의 성공에 대한 향수를 키우는 한편, 그 연장선상에서 대중 감정으로서 반한, 반중 감정이 나타났습니다.
인터넷상의 혐한, 혐중의 움직임은 한국과 중국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바탕으로 보수파 잡지 및 미디어의 중국위협론 따위의 언설을 재구성하여 인터넷 공간에 유입되면서 불거졌습니다. 이러한 중국위협론 등의 이론은 처음에는 기업 경영자나 중요 관리자들을 위한 논의였지만, 이러한 논의에 젊은이들이 인터넷상에서 동의하기 시작하면서 인터넷상의 혐한, 혐중은 기득권 세대의 미디어 정보에 젊은이들이 장단을 맞추며 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상태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결국 젊은이들에게 자국의 내력으로부터 생긴 문제를 은폐하는 대신 사이비 적을 제공하며 이를 민족주의적 형태로 표출하게 합니다. 현재의 동아시아 민족주의란 필연적으로 자국의 고도성장에 대한 재검토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국사 논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민족주의의 대외적인 공격성이 가장 눈에 띄는 형태로 보인다면, 그 내면에는 전 국민의 공통된 목표로 상정되었던 고도성장 이데올로기의 소멸, 국민들 간 입장 분열과 다원화를 일그러진 형태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존재는, 고부가가치 산업의 저임금 노동자 및 소비자로서 그네들을 적당히 조달하면 된다고 여겨 온 전후 일본의 회사주의와 문화론의 좌우 합작의 결과 같은 것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우울을 느끼고 있다면, 이는 새로운 거처라 여겼던 문화 영역이 중간층의 상하 분열과 함께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을 그네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 p.140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본 언론에서 쉽게 반일이라 단정지어 버리곤 하는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겉으로는 반일적인 형태를 띄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자국의 개발독재에 대한 이의제기이며, 고도성장에 대한 자부심을 중시하는 국가주의와 대립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일파 청산의 움직임을 일본에서는 단순히 반일 기운의 고조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친일파 비판의 근저에 놓인 것은 단순한 반일이 아니라 식민 통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의 개발주의와 친일파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 입장에서의 이의제기, 즉 나라 안쪽으로 향해 있는 비판인 것입니다. 결국 한국 민족주의란 역사적으로 생성된 반일적 형태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지만,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부독재 체제 아래 억압당하고 배제되었던 저항적 민족주의의 복권이라는 성격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관점에서 반일적인 형태는 이러한 주류 관점 외에도 일본이라는 기호만을 끄집어내 유희에 활용하는 취미적 민족주의도 있으며, 한국 정치사를 관통하는 민주화운동이 정권의 중추를 차지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반대편의 국가주의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반일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민주화라는 주류가 된 혁신파에 대한 반발로 비롯된 이 계층은 통일 지향을 비판하며 예전의 반공, 반북주의를 띄게 되는데, 이러한 형태는 표면상 반일처럼 보이는 요소를 일정한 형태로 포함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일본 자체를 향해 있다기보다는 한국의 국내 사정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원화된 민족주의의 근간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도성장기에서 사회유동화로 넘어가는 과정에 존재하는 젊은이들의 사회적 불안감이 동시성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적 주장을, 국가 간 외교 문제의 틀을 가지고 자국에 대한 공격이라고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합니다. 과거의 민족주의적 해석으로는 이러한 민족주의에 내재된 내부적 구도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전형으로 하는 취미적인 민족주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유희적인 부분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현재 한중일의 젊은이들이 점점 우경화된 태도를 보이는 행동의 근거에 사회적으로 버려진, 사회유동화와 고도소비사회 속에서 비전을 제시받지 못하는 불안감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 세대를 향해 어떠한 이념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옛 개발주의에 대한 향수를 떨쳐내고 새 시대를 열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