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제는 뭐 했어?”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남자가 따지듯 묻자, 여자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냥 집에서 자고 있었어. 피곤해서.”

 

그녀는 당연한 사실을 물어본다는 듯, 짜증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지금 금연 중이니까, 자꾸 짜증나게 하지 마. 제발 좀.”

 

그녀는 남자에게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며, 주머니에서 니코틴 껌을 꺼내어

 

씹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을 노려보며 입술을 비죽 깨무는 여자가 야속했다.

 

, 그거 아니?”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

 

여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 변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남자가 섭섭하다는 투로 담배 연기를 훅 뱉어내자, 여자는 불쾌하다는 듯

 

두 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 너 뭐하는 거야 ? 나 금연 중이라니까.”

 

여자는 그에게 뺨이라도 때릴 듯 화를 냈지만,

 

남자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만 태울 뿐 이었다.

 

담배 한 개비가 타는 시간 동안, 그 둘 사이에는 길고도 짧은, 짧고도 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그것을 깬 건, 역시 남자 쪽이었다.

 

처음에 말야, 내가 너한테 첫눈에 반해서 고백했었던 거 기억 나냐?”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 맛없는 니코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그 때, 네가 그랬었지, 내가 싫다고.”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이후로도 내가 계속 그래도 네가 좋다고 사귀자고 따라다녔고, 또 차였고......

 

정확히 몇 번 이나 거절당했었는지 기억도 잘 안나. 하지만-.”

 

여자가 그의 말을 가로채었다.

 

그래, 내가 결국 너한테 졌었지.”

 

여자가 껌을 휴지에 뱉어 돌돌 말아 길거리에 휙 던졌다.

 

그 때가 정확히, 열다섯 번째였지, 아마?”

 

그녀의 말에, 남자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기억력도 좋구나, 너는.”

 

그거 하나는 안 변했네.”

 

여자는 한동안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뭔데......? 자꾸 변했네, 안 변했네 하면서

옛날 얘기 끄집어내지 말고, 남자답게 속 시원히 얘기해. , 요새 왜 이러는 건데?”

 

“......”

 

남자는 한숨을 푹 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남자의 태도에, 여자는 답답함을 느꼈다.

 

요새 내가 전화도 잘 안......, 아니 못 받고, 데이트도 뜸해져서 그러나 본데......

 

그래서, 날 의심하는 거야?”

 

여자가 남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 나 말고 딴 남자 생겼냐?”

 

?”

 

?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만약 그렇다면, 내가 앞으로 너 귀찮게 안할게.

 

아니, 아예 네 인생에서 사라져 줄 테니까-.”

 

남자의 그 말에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 내가 요새 일 때문에 바쁘고 힘들어서 그랬다고 했잖아, 왜 자꾸

 

멋대로 상상하고 의심하는 건데?”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여자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 너 뭐 숨기는 거 없냐?, 나한테?”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짤막한 한숨을 픽 뱉고는 , 대답 대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가볍고도 진한 입맞춤이었다.

 

여자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없어. 하나도.”

 

여자는 이유 모를 한숨을 푹 쉬면서, 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녀의 윤기 나는 검은 생머리에서 은은한 샴푸 향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 왔다.

 

남자에겐 참으로 그리웠던, 그 냄새였다.

 

그는 잠시 동안 멋쩍은 듯,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자도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너랑 나랑 이렇게 만나서 데이트 하는 거......”

 

정말 오랜만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그녀의 붉은 입술은 어딘지 은근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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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일어났어?”

 

남자가 눈을 뜨자,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었지? 내 집에서 눈을 뜬 건.”

 

그녀가 니코틴 껌을 하나 입에 털어 넣었다.

 

남자는 흐릿한 눈을 비비면서, 대답 대신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몸에 오로지 얇은 가운만을 걸친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이 자신의 몸에 와 닿자,

 

남자는 한 번 더 여자를 품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여자는 생각이 없는 듯 그저 남자에게 가벼운 입맞춤만 하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남자가 여자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이만 집에 가. 다음에 또 보자.”

 

남자는 그런 여자의 태도에 적잖은 서운함을 느꼈다.

 

벌써.....? 무슨 일 있어?”

 

여자가 옷가지를 걸치며 대답했다.

 

내가 말 안했었나? 나 부업해.”

 

무슨 부업?”

 

남자가 다소 의심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바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화장은 오늘 따라 더욱 짙게 느껴졌고, 옷차림도 어딘가 좀

 

야해보였다. 어디까지나 남자의 기준에서.

 

게다가, 언제 칠했는지, 그녀의 손톱 끝에서 매니큐어가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수상쩍은 눈초리로 여자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역시 수상했다.

 

수상하고 또 수상했다.

 

대체 어떤 부업을 하기에, 저렇게 화장을 짙게 하고, 평소 칠하지도 않던 매니큐어 하며,

 

저렇게 야하게 입고 출근하는 걸까.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알아채곤, 짜증을 내며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

 

현관문이 신경질적으로 거세게 닫혔다.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그도 대강 옷가지를 챙겨 입고 현관을 나섰다.

 

엘레베이터가 이제 막 1층에 도착한 것을 보니 역시 그녀가 방금 타고 내려간 듯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남자는 엘레베이터가 다시 올라올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흐릿하게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우 빠른 걸음으로 택시에 올라탔다.

 

그걸 본 남자도 그녀가 탄 택시 바로 뒤에 대기 중이던 빈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부탁했다.

 

기사님! 따블로 드릴 테니까, 무조건 저 앞 차만 따라 가주세요.”

 

그리고 남자가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티 나지 않게요.”

 

기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급 화색이 돌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앞 차를 쫒아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 동안 부쩍 달라진 여자의 태도를 의심해왔다.

 

그리고 오늘은 왠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알아야 했다.

 

반드시.

 

그녀가 대체 무슨 부업을 하는지.

 

그리고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소홀해진 것인지.

 

제기랄, 칠하지도 않던 매니큐어는 왜 바르고, 왜 또 옷은 그렇게 야시시하게 입고

 

나가는 건데? 나랑 데이트할 때는 그런 적 한 번도 없었으면서.’

 

남자는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앞 차만 노려보았다.

 

그는 마음이 불안하여 다리를, 아니 온 몸을 떨고 있었다.

 

기사는 정신없이 앞 차를 따라가는 와중에도 그런 그가 신경 쓰였는지 계속

 

어이, 총각. 왜 그래? 괜찮아?”

 

하고 물어보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추격전이 끝난 것은, 여자가 탄 택시가 오피스텔들이 몰려있는

 

동네 앞에 멈췄을 때였다.

 

기사님! 그만, 그만 멈춰주세요.”

 

남자가 다급하게 기사에게 돈을 쥐어준 뒤, 택시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거스름돈은 다 가지세요.”

 

그 말에 기사는 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감사하긴,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남자는 멀찍이 숨어서 여자가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 여자를 붙들고 뭐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 까지 기다렸다.

 

일단 화를 낸다고 하더라도 뭘 알고 화를 내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남자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노파심에서 인지

 

여자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본 뒤, 제법 괜찮아 보이는 오피스텔 입구로 들어갔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자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짙게 화장을 하고, 야하게 차려입고, 도발적인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채로 오피스텔에

 

들어갔다고? 그것도 부업을 하러?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게 좀 지나치게 나갔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상황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재빠르게 그녀의 뒤를 쫓아 오피스텔로 들어갔을 때,

 

여자가 서둘러 엘레베이터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그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같이 올라가고 싶었지만,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남자는 엘레베이터가 몇 층에서 멈추는지 보고는, 때마침 내려온 옆쪽의 것을 타고 여자가

 

내린 층까지 올라갔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남자는, 순간 당황했다. 생각보다 한 층에 딸려있는 호실이 많아 여자가

 

몇 호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나오기 전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을 만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은 산란하기 그지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편함 !

 

우편함 안에 만약 미처 꺼내가지 못한 우편물이 있다면 그녀가 몇 호실에 있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남자는 떨려오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엘레베이터를 타고

 

우편함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여자가 올라간 층은 13층이었다. 우편 번호 함 13라인을

 

뒤져보았다. 가능한 한 경비원이나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재빠르게.

 

다급한 마음으로 1301번 함부터 차례대로 뒤져보다가, 05번 함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남자가 원하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우편물들이 쌓여있었는데, 받는 사람 이름이 틀림없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1305.

 

남자는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생각하던 최악의 장면을 보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과 불안,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뒤섞여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뒤, 엘레베이터가 내려왔다.

 

남자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13층 버튼을 눌렀다.

 

거기까지 올라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에게는

 

11초가 꼭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남자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제발 자신의 예측이 틀렸다고, 자신이 너무나 여자를 사랑한 나머지 있지도 않은 일을

 

상상해 제 멋대로 끼워 맞추기를 하고 있기를 바랐다.

 

어디까지나,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자신의 쓸데없는 의심이 만들어낸 환상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남자가 13층에서 내렸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때마침, 1305호로 인상이 다소 험악해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곳에서 그 사내를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남자의 연인인, 그녀였다.

 

남자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너무 충격을

 

받아 놀란 나머지 땅에서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한동안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물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뜻하지 않게 강한 충격을 받으면 이렇게 머릿속이 텅텅 비게 되는 건가.’

 

남자는 13층 구석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이 목격한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은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동안 여자가 자신에게 부쩍 소홀해졌던 이유가 바로, 이 망할 부업인지

 

뭔지 때문이었나 싶어 남자는 배신감이 들었다. 이가 부드득 갈리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른 일은 몰라도, 이번 일은 정말로 그냥 모르는 척 넘길 수가 없었다.

 

아니, 참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건, 남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럴 것이었다.

 

남자는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나 1305호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한번 심호흡을 한 뒤, 거칠게 문을 두들겼다.

 

!

 

!

 

!

 

!

 

! ! ! ! !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문을 두들기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진 남자는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얼마나 세게 두들겼는지 손이 다 아플 정도였다.

 

그러자, 안에서 여자가 문을 벌컥 열며 뛰어나왔다.

 

아이 씨, 어떤 새끼야? 작업 중인데.”

 

나야.”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뜻밖의 상황에 매우 당황한 듯 했다.

 

어머, 잠깐만...... 일하는데 갑자기 찾아오면 어떡해? 여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비켜봐.”

 

남자가 여자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여자가 그를 붙잡았다.

 

, ..... 잠시만, 지금은 안 돼. 일단 일 끝나고 얘기하자, ?

 

뭔가 오해 했나 본데......!”

 

남자가 여자를 거칠게 밀쳐냈다.

 

오해는 무슨 오해, 웃기지마.”

 

남자는 뒤따라오는 여자를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엔 몇 분 전에 들어갔던 그 사내가 옷을 다 벗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살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문신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덩치 좋은 사내는 밖에서 시끄러웠는데도 무신경하게 엎드려 있다가, 남자가 요란하게

 

들이닥치자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의 알몸이 노출되자, 그는 재빠르게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가렸다. 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겉보기와 다르게 그 동작과 말투가

 

어딘가 여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맛! , 당신......뭐에여?”

 

남자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뭔가 자신이 예측했던, 그런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방 안의 벽에는 빼곡하게 여러 가지 도안들이 붙어있었고, 침대 옆에는

 

다양한 색상의 잉크들과, 생전 처음 보는, 바늘이 달린 희한한 도구와, 그 밖에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 알몸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저 문신 가득한 덩치 큰 사내......남자는 잠시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은......대체 뭐지?’

 

.”

 

여자가 남자의 어깨를 툭 치며 잠깐 동안의 정적을 깼다.

 

지금 저 손님 전신 문신 중이니까...... 다 끝나려면 시간이 좀 걸려. 오늘은 이 건만 하면

 

끝나니까, 이따 서너 시간 후에 근처 XXX카페로 와. 내가 끝나고 연락할게.”

 

남자는 멍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을 나가자, 여자는 당황한 손님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손님, 놀라셨어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던 작업, 마저 하죠.”

 

거구의 사내가 어울리지 않게 훌쩍거리며 말했다.

 

네에, 언니......훌쩍, 저 넘나 놀랐어여. 훌쩍, 그 남자가, 내 걸 봤어여......훌쩍, 어떡해.”

 

여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진정시킨 뒤,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아이, 손님 참 겉보기랑 다르게 귀여우시네. ,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색을 넣어봅시다.

지난번에 보여주신 도안대로 할 게요 ~.”

 

네에..... 그대로 해주세여.”

 

거구의 사내는 방금 전의 일에 아직도 진정이 안 되는 듯, 여전히 훌쩍거렸다.

 

후우-.

 

남자는 오피스텔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역시, 자신이 뭔가 오해를 한 듯 했다.

 

그럼 그렇지, 그녀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하며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론

 

진작에 무슨 일을 하는지 솔직히 털어놓지 않은 그녀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오늘과 같은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바닥에 던진 다음, 발로 비벼 남아있던 불씨를 꺼뜨렸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여자가 말했던 그 카페로 들어가, 여자가 오길 기다렸다.

 

다행히도, 이 카페에는 책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어 그 때까지는 대강 시간을 때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은 그리 금방 지나가지 않았다.

 

하품이 나왔다.

 

마침내,

 

남자가 잡지 대여섯 권을 해치웠을 때쯤, 카페 안으로 여자가 들어왔다.

 

평소대로 연한 화장에 수수하지만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서.

 

남자가 늘 보던,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많이 기다렸지? 그 색 넣는 게 좀 오래 걸려서.”

 

여자가 어색하게 씩 웃어 보이며 남자의 앞에 앉았다.

 

, 그럼 이제 우리 오해를 풀어볼까? 나 사실, 전에 다니던 디자인 회사 관두고 문신사로

 

직업을 바꿨어.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다보니, 이쪽에도 관심이 생겨서 너 만나기 훨씬

 

전부터 문신을 틈틈이 배웠거든. 언젠가 이 길로 나서려고.”

 

남자가 다 식어버린 커피를 후룩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내 생각보다 빨리 이 길로 들어서게 되더라고. 그래서 최근에

 

아까 그 오피스텔에 작업실 차리고, 여러 가지 준비하고, 손님들 작업해주느라......

 

그 동안 좀 내가 너한테 많이 소홀 했던 거야. 그건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내가 문신 하는 걸

 

네게 말 안 해준 이유, 그건 대강 예상은 되지? ...... 뭐 미리 너한테 말 안 해서

 

오해가 생긴 건 내 잘못이지만.”

 

남자는 잠시 동안 여자의 말이 바로 접수가 되질 않아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자신이 대체 평소에 어땠기에 그녀가 이 일을 숨겼던 걸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남자는 늘 보수적이었다.

 

모든 면에서.

 

예를 들어 보자면,

 

그는 길 가다 문신한 사람을 보면 대놓고 매우 불쾌한 티를 냈으며, 그것 때문에 여러 번

 

시비가 붙은 적도 있었다. 남자는 늘 생각했다. 몸에다

 

저런 이상한 그림들을 그려 넣는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어딘가 좀 문제가 있는 자들일 거라고.

 

물론,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 중엔 남자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것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해묵은 편견일 뿐이었다.

 

예전에 비해 문신이 대중화 되고, 패션 아이템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일반 사람들도

 

많이들 했기 때문에.

 

문신에 대한 남자의 편견 때문에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는 일이 잦아지자,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이 문신사로 전업했다고 시원하게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들의 몸에 문신을 새겨주는 자신 또한 남자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서.

 

대강 짐작은 가지? 내가 왜 너한테 말 안했는지.”

 

여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남자는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대체 왜 문신 작업을 할 때 화장을 짙게 하고,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르며, 옷은 또 왜 그렇게

 

야하게 입는 것인지.

 

남자가 여자에게 그 부분에 대해 조심스레 묻자, 여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 너 말야, 문신 말고도 다른 것들도 보수적이었잖아. 내 화장이라든가, 옷차림에도.”

 

?”

 

남자가 여자의 말에 잠시 벙 쪄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사귀던 초창기에, 너 내 화장이나 옷차림을 자꾸 지적해서 우리 많이 싸웠었잖아.

 

기억 안나?”

 

여자가 새빨갛게 칠해진 자신의 손톱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남자에게 물었다.

 

, 자꾸 그런 걸로 충돌하다보니 서로 지쳤었잖아, 우리. 그래서 내가 져 줬지.”

 

여자가 남자의 손을 끌어당겨 꼬옥 쥐며 말했다.

 

널 좋아했으니까.”

 

여자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네가 바라는 대로 연하게 화장하고, 수수하고 여성스럽게 입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좀 스트레스가 쌓였나봐...... 그래서 너랑 안 만날 때나 일 하러 갈 때 평소랑 좀

 

다르게, 내가 하고 싶던 대로 꾸며 본 것뿐이야. 어쨌거나, 나도 여자잖아.”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너무 옭아맸던 걸까, 나만의 생각에 너를......’

 

여자가 남자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일종의 스트레스 풀이였지. 그리고 작업 할 때 그렇게 꾸미고 나가면 뭔가 집중이 더

 

잘 되더라고. 실수하지 않기 위한 나만의 주문이랄까, 그런 거지. 아무래도 사람 몸에 그림을

 

새기는 일이니까. 조심할게 많잖아.”

 

남자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랬구나, 어떻게 보면 내 잘못도 크네. 그래도 좀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그의 말에 여자가 피식 웃었다.

 

미안,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그게 무서워서 미처 말 못했어. 그건 진짜 미안해.

 

하아-. 어쨌건 이렇게 다 털어놓으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근데 어때? 이 매니큐어 색,

 

이쁘지?”

그녀가 새빨갛게 빛나는 자신의 손톱을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너무 새빨개. 쥐 잡았냐?”

 

뭐어? 이 자식이, 꿀밤 좀 맞자, 누나한테.”

 

누나는 누가 누나야, 동갑 주제에.”

 

그렇게, 그 동안의 쌓여왔던 오해가 풀린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다가, 웃음이 그친 뒤, 둘 사이엔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 한참 동안 말없이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여자가 남자의 손을 툭 치며 말했다.

 

, 우리......, 한 잔 할까?”

 

남자는 씩 웃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좋지.”

 

그 둘은, 미소 지으며 카페를 나섰다.

 

서로의 손을 꼬옥 마주잡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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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로 2018-02-0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주소가 바뀌는 바람에 1회차, 2회차분을 볼 수 없게 되어 다시 올립니다.

원래 2회차였던 매니큐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