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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 개정판, 원문 영어 번역문 수록 ㅣ 현암사 동양고전
노자 지음, 오강남 풀어 엮음 / 현암사 / 1995년 12월
평점 :
학교 다닐 때 쓴 것.
(당연히 잘 쓴 글은 못되고) 재밌다.
난 참 재밌는 아이야... ^__^
비교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잠언이 인생에 대한 각론이라면 전도서는 총론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비교하자면 공자의 논어는 잠언에 해당하고 노자의 도덕경은 전도서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두 사상이 거의 동시대 즉 춘추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대책’을 제시한 차원의, 같은 외부적 동기에서 나온 사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본서를 읽으면서 순수하게 묵상하게 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머리가 상당히 복잡해져 무언가를 논하기엔 정리가 힘든 상태였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또한 본서가 어떤 비범한 명상이나 체험, 인물따위에서 비롯한 산물이 아닌, 유교의 사상이 교조화된 시대에서 그에 대한 반발의 사회적 ‘의도’에서 저술된, 그런 선도적 목적과 개혁의 노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text를 그 자체로 깊이 묵상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많은 의문점과 결론지어지지 않는 복잡스러운 생각들을 대충 정리해보고 싶다.
우선 ‘도’의 본질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결부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처음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도가사상은 언뜻 보면 유사성이 있는 듯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도가사상은 올바른 정치와 삶의 자세를 위한 절대불변의 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절대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것이 아닐까.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불가지론’으로 정의될 수 있는 노자의 도에 관한 기본 생각은 우리가 진정한 진리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 되어질 수 가 없다. 그것은 ‘無’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이 있다. 후자가 진리자체를 거부한다는 데에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들도 진리가 혹시 존재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 되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거부의 의사가 담긴 결론이고 도가 사상은 그것을 깨달아 체득할 것을 가르치는 것에 차이가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장자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진정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된 꿈을 꾼 건지 혼동하는 이야기에서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흡사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내가 차원(dimension)을 적절하게 연결(match)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 한가지로는 ‘절대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관념주의 문화의 다른 시대/장소의 사상과 접목시켜볼 때이다. 각 문화에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AD 4세기 무렵을 기점으로 시작된 관념주의 단계의 서구사회에서는 신에 대한 봉사의 형태가 지역의 문화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롯하여). 여기에서 관념주의란 어떠한 절대적 가치의 실재를 믿는 것을 말한다. 그 가치가 절대적 신에게서 부여되었으며 그러므로 신적권위를 갖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자체로 악한 것’과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절대’라는 수식어와 모순적인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아즈텍 부족은 신에게 정결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지극히 반인륜적인- 바쳤다. 신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가혹한 대가를 치뤄 왔던 것이다. 노자는 서구인들이 믿었던 이 ‘절대적 가치’를 ‘도’라 하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절대적 가치’라 이름 지어지지만 지역문화에 따라 다양성을 지녔던 그 모순은 그 ‘절대적 가치’가 진정 ‘절대적 가치’가 아님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인가? 둘을 접목시켜보자면 노자가 더 우위에 있는 것을 ‘도’라 명명한 것이라고 이해되어지는데 -그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도라 하지 않는다 – 이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진정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절대적 신이 아닌 그러한 존재라고 한 역사적 시기와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상정되었던 ‘道보다 하위인’ – 도라고 불릴 수 없는 – 하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둘을 비교하기에 도가사상은 종교를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철학이라 할 수 있고 삶에 관한 지혜를 중심으로 하지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는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내가 전혀 비교 불가능한 차원의 양자를 무식하게 연계지은 것인가?)
마지막으로 ‘절대불변의 법칙’과 ‘창조주의 창조질서’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하여.
그가 말하는 ‘도’는 신이 아닌 만물의 움직임의 근거이다. 말없이 만물을 생성화육하게 하는 저 자연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는 그것을 ‘절대불변의 법칙’이라고 일컫는다. 계절의 변칙 없는 주기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우주의 생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절대불변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이해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절대적 진리란 것은 없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는 우주의 ‘법칙’, 즉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가 근거 없이 믿는 미신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 감각시대를 사는 ‘감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지함으로써 인간이 무엇을 추론할 수 있을까. 인간이 자연을 한정된 범주에서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과학이 발전해왔다. 하지만 과학이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고 작용하는지 훌륭히 설명해 내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아무리 객관적 진리라고 외쳤던 과학 조차도 실험자의 의도와 해석에 좌우된다는 그 실망은 가히 파격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과학에의 실망은 각자가 인지하는 세계가 각자의 진리라고 말하는 진리관으로 이어진다. 노자가 말하는 ‘영원불변의 법칙’ 그리고 엄연한 실제적 자연의 질서에 대해 이 시대의 사상은 어떤 결론을 내리나. 책을 다 읽진 않았지만 화이트헤드의 <이성의 기능>에서 이해한 바를 언급하자면 그는 그것은 모든 생물학적 현상을 완벽하게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기체인 생물은 어떠한 목적인(이성이 기능하는 출발점) – ‘산다’, ‘잘산다’, ‘더 잘산다’로 간략화되는 - 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물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몸 속에서 발견되는 목적적 인과에서 유추하여 우주에도 그러한 힘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대충 이러한 논리로 결국에는 창조론을 터무니없다고 여기고 무신론적인 우주관을 제시하는 것 같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인간의 육체와 실재하는 자아를 완전히 벗어난 형이상학적 초탈을 의미한다면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 경지는 고요히 흐르고 낮은 곳에 처하길 즐기는 물과 같이 감정적(인격적)으로 겸손하며 사심 없는 담담한 내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힌두교가 현상적/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연습하는 철학이라면 본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애써 바꾸려 작위하지 않는- 그렇게 행동해야 할 근거를 인식할 것을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이해했다.
<실은 노자는, 성인은 천지의 무위자연의 법칙을 몸소 인간에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성인이 하는 일은 하늘의 도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장 解義 중>
비록 역자의 해의이긴 하지만 이 구절에서 나는 노자의 사상이 초기 기독교에게 영향을 미친 스토아학파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좀 단편적인 비교이긴 하지만) 후자역시 인간이 inexorable law에 도달하려 train할 수 있고 철학의 목적은 자연의 법을 understand, obey and adjust 하기 위함이며 현명한 사람은 우주의 법(질서)에 mind가 부합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제9장이 제시하는 미덕은 ‘중용’인 것 같다. 조금 부족하게, 겸허하게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 태도는 어디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 물을 조금 부족하게 받아놓고 쓰는 사람은 현명하며 아낄 줄 알고 최선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물이 넘치도록 틀어놓은 채로 사용한다면 그는 헤프고 마음이 섬세하지 않으며 차분한 성품을 지니지 못한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밥을 먹을 때에도 조금 부족하게 먹는 것이 육체의 건강에는 물론 정신 건강에도 좋다. 욕망에의 절제 없는 개방, 즉 방종은 인간의 마음을 퇴폐적으로 만든다. 칼을 잘 다루어 보지 않은 사람은 칼을 갈 때 무조건 쓰임의 효율성만을 생각하여 더욱 날카롭게 갈 것이다. 그럴수록 예리하여 잘 자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을 많이 다루어본 사람은 적당히 날카롭게 갈 것이다. 부러지거나 꺾어지기 쉬울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면만 바라보고 극단으로 치우쳐 행동하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무엇이든 여러가지 면을 신중히 고려하여 적정 線을 파악하고 이루어가야 함이 마땅하다.
<건전한 정신이란 몸과 마음을 도에 집중하여 기가 흩어지지 않고 유화함을 체득하여 순수하고 꺠끗함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마음에 더럽혀짐이 없이 도에 집중된다면 심오한 경지에 이를 것이며, 그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반성하여 흠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10장>
‘영아와 같은 상태’라고 표현하였다. 어린아이는 세상을 많이 경험하지 않았고 머리가 자라지 않았으므로 순수하게 세상을 인식한다.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복잡한 술수로 처세할 줄 모른다. 배운 것을 의심하지 않고 거짓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더러움으로 물들지 않은 그 마음은 흠이 없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참으로 순전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이다.
20장은 철학적 가르침과 더불어 탄식과 푸념 섞인 듯한 표현이 감상을 자극한다.
<세상의 여러 사람들은 기뻐 웃으면서 소나 양의 맛있는 고기를 즐기는 듯,…나만은 홀로 휑하게 빈 가슴으로 평안하고 고요하게 있네..나른하고 고달파서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네…>
33장은 그 어느 장보다도 받아들이기 평이하고 귀감이 되는 교훈이다. 앞의 장들이 추상적이고 대의적인 반면 본 장은 비교적 소시민적이고 개인적인 교훈도 준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지혜 있는 자이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더욱 명철함이 있는 자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자이지만,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더욱 강한 사람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하고, 근면 역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자이다…>
전혀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정말 멋진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가르치는 이익과 손실에 대하여 나도 또한 가르친다. ‘남들은 강한 것, 있는 것이 이익이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약한 것, 없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42장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44장
날뛰어 움직이면 추운 것을 이기고, 고요히 있으면 뜨거운 것을 이긴다. –45장
고요함을 찬양한 내용이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현상으로 아주 재치있게 비유하였다.
나는 착한 사람을 선으로 대한다. 나는 착하지 않은 사람도 또한 선의로 대한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선인이 된다. 나는 믿음성이 있는 자를 믿는다. 그러나 나는 믿음성이 없는 자도 또한 믿는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성인이 된다. –49장
모든 사람을 이렇게 대함으로서 그들을 진정 그렇게 변화시키는 사람은 정말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지닌 사람이다.
사욕이 생기는 구멍을 막고 사욕이 들어오는 문을 닫으면 몸이 다할 때까지 노고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구멍을 열어 놓은 채 거기에서 생기는 일들을 잘 처리하려고 하면 몸이 다하도록 구제되지 못할 것이다. –52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분(忿)을 풀며, 그 광채를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 섞여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심원×신비한 동일이라고 한다. –56장
사욕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문을 닫고 그리하여 날카로운 것을 둔하게 만들어 질박함을 지키고, 분노하는 격정을 풀어 누그러지게 하여 다툼의 근원을 없애 버린다. 특히 남의 눈에 드러나 보이는 광명을 흐리게 하여 티끌과 함께 있으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해의>
언어적 표현 자체가 문학적 감흥을 주는 장이다. 메시지 또한 그렇다. 외우고 싶은 구절이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허하게 저자세를 취하면 작은 나라가 거기에 붙게 되고 –61장
크면 클수록 높으면 높을수록 저자세를 취하라는 가르침.
훌륭한 전사는 무용을 부리지 않고, 싸움을 잘 하는 자는 성내지 않으며, 적에게 가장 잘 승리하는 자는 적과 대전하지 않고, 사람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 앞에 몸을 낮춘다. 이것을 다투지 않는 덕이라 하고, 이것을 남의 힘을 쓰는 길이라고 한다. –68장
백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잘
싸우는 것이다. –孫子
한 번 생각하고 반응하는 나에게 두 번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한 발짝 물러서는
여유로움…그 진부한듯한 교훈을 새롭게 깨닫게 해준 것이다.
알면서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상덕이다.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71장
사람이 살았을 떄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으면 곧고 강하다. 초목도 살았을 때에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으면 말라서 야물다. 그런 까닭에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속성이다. 그런 까닭에 군사가 교만하여지면 멸망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여진다. 강대한 것은 아래에 있고, 유약한 것은 위에 있다. –76장
가장 경탄을 자아내는 장이다. 그 비유의 절묘함과 유약함의 힘.
산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생명의 태어남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작위’로 삶을 메우려 한다. 욕심, 쾌락, 야망…을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삶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물질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그리고 자기PR시대로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드러내기를 추구하는 현대인들과 그런 경향을 자연스레 많이 답습하는 나. 그런 나에게 이 어찌보면 진부하면서도 실천하기엔 낯선 그런 교훈들이 ‘도덕경’이라는 권위로 인한 새로운 뉘앙스로 내게 깊이 생각해보고 좀 더 여유로움을 지니게 하는 소중한 가르침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생각해본 것을 덧붙이자면 노자가 제시하는 정치는 작은 생선을 삶는 것처럼 백성들을 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법령을 자주 변경하거나 많이 만들어내서 국민의 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제한하고, 명령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60장>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멍청’하고만 있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은 그것이 쉬울 때에 처리하고, 큰일은 그것이 미세할 때에 해결하라.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데서부터 일어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미세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63장
대충의 그림은 그려지지만 과연 이 사상은 현대의 정치에 어떤 효용성과 의미를 지니는가. 도무지 적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토록 범죄가 갈수록 잔인하고 극악해질뿐더러 수단방법도 과학기술의 무궁한 발전에 부응해 고차원적인 시대에, 또한 원조교제 등 윤리체계가 무너지는 시기에 무위 자연의 사상은 괴리감만 줄 뿐이다. 아마도 도덕경의 저자들이 현 세대를 보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 같다. 백성들이 너무 지혜로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