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1987년 뉴욕여자는 도시에 있다. “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면서도 그 삶을 빼앗아 가려고 애쓰는 것이 이 도시다.(11)” 폴 오스터의 [폐허의 도시]에 시간과 공간은 특정되어 있지 않다그러나 작가는 미국의 유대인으로서 습관적으로 살아가다가 만나는 낯섦삶의 부조리함을 바라보고 있다그 공간이 익명이기에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을 바로 대입하기가 오히려 어렵지 않다모든 것이 불확실하고죽는다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은 현대사회에서 현대인이 겪고 있는 그것이다.


폴 오스터가 그린 마지막 며칠[폐허의 도시]의 원제는 [In The Country of Last Things이다은 성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이후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증상이다. 유태인인 주인공 안나 블룸은 도서관에서 만난 라비에게 자신은 어릴 적 이미 하느님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당장의 일도 알 수 없는 도시에서 안나가 가장 바라는 유일한 것은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안나 블룸, 익명과 운명의 이름

 

[폐허의 도시]에서도 도시는 그저 도시이고 주인공의 거처는 3구역, 5구역, 도서관일 뿐이다. 주인공 안나 블룸의 이름 역시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소설의 익명성이나 특정하지 않은 명칭들은 소설의 마을이나 도시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라는 점과 세상에는 도처에 이런 곳이 있다는 점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폐허의 도시]에서 폴 오스터는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안나 블룸(Anna Bloom)이라는 이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블룸은 운명(Doom)과 우울(Gloom) 사이에 핀 꽃 또는 자궁(Womb)과 무덤(Tomb) 사이에 핀 꽃이다. 인간은 탄생과 사망 사이, 죽기 전까지는 우울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견뎌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 운명에는 끝도 없다. 끝이 있어도 알 수가 없다. “내 이름이 오토Otto인데, 이 단어가 앞에서 시작하나 뒤에서 시작하나 똑같단 말이지요. 그러니 끝이 없어요. 끝났다 싶으면 다시 시작해도 똑같으니 말입니다. () 안나Anna도 앞에서 시작하나 뒤에서 시작하나 똑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가씨가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 거랍니다. 안나 양, 그게 바로 운명의 축복입니다.(199)”


안나 블룸의 이름이 암시하는 여자의 운명은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한 영웅으로 제시한 시지프의 운명과도 같다.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초월적인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시지프 신화], 188)”


[폐허의 도시]에서 안나 블룸은 옛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매일 새로운 행동을 낳는다. 예전의 그 흔들림 없어 보이던 가정(假定)이나 전제가 한순간에 헛된 것,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딜레마다.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잘 이용하여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한때는 우리를 인간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니 이 얼마나 황당한 모순인가?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발버둥쳐도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점에서 보면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허무한 짓거리가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 아래 살아가는 안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살거나 자살하지 않고, 좌절을 각오한 채 매일을 살아가는 인간인 카뮈의 부조리한 영웅을 발견할 수 있다.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는 디아스포라

 

폴 오스터는 미국 뉴욕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지만 아버지 쪽이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다. 폴 오스터는 [달의 궁전]이나 [고독의 발명]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역으로 아버지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유대인의 혈통이라는 사실이 작품에서 중심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폐허의 도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떠오르게 한다. 고향을 잃고 방황하며, 소속된 공동체 없이 서로가 타인이기만한 현대에는 디아스포라가 유대 민족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에게 벌어지는 현상이 된다.


[폐허의 도시]의 안나 블룸은 오빠 윌리엄 블룸을 찾기 위해 도시로 왔다. 신문기자인 윌리엄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소설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오빠를 찾기 위해 왔지만 오빠를 찾는 일은 중요하지가 않다. 측량사가 되기 위해 왔지만 측량사로 일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K와도 같다. 안나는 오빠의 생사를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모르는 상태에서는 희망을 품을 수도 절망할 수도 없다. 이 상황에서 최선은 이런저런 의심만 하는 것, 그게 축복이다.(63)” 안나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도시를 떠날 계획이다. “상상할 수 없으니 무슨 일이든 다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곧 무()의 세계이기도 하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 도시를 떠난 뒤 우리는 윌리엄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280~281)” [폐허의 도시]는 완성작임에도 미완성이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폴 오스터는 카프카의 사망 15주년에 붙여 카프카를 위한 페이지들을 남겼다. 이 짧은 산문은 카프카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오스터 자신의 주인공인 안나 블룸에게도 들어맞는다. “만일 그의 여행이 어떤 최종 목적이라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최종적으로, 그가 시작했던 그곳에서 그 자신을 발견함으로써일 것이다. () 약속된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것에 가까워진다는 것에 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떨어진, 한 팔만한 거리에, 한 삶만한 거리에 두고, 그리하여 도착에 가장 가까이 갈 때가 자신의 목적지로부터 가장 멀어질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나아간다. 그리고 한 걸음에서 다음 한 걸음까지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아니, 그 자신조차도 아니고, 그가 될 것의 그림자이다. 아니, 그 약속된 땅조차도 아니고, 그것의 그림자이다.([굶기의 예술] 30~31)”

 

보이지 않는 신, 해체된 권력

 

[폐허의 도시]의 도시는 마치 무정부상태를 방불케 한다. 시 권력은 자주 바뀌고, 따라서 정책도 자주 바뀐다. 대부분의 건물에 건물주가 없고, 따라서 부동산 사기와 약탈이 횡행한다. 도시 행정이 엄격한 것은 단 하나 쓰레기와 시체의 처리다. 똥을 허락 없이 수거하는 일이 두 번 적발되면 사형이다. 물품 재활용은 부활 센터에서, 시체 재활용은 변형 센터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른바 공권력은 오토 프릭의 시체를 몰래 매장했을 때만 등장한다. 그밖에는 50년짜리 방파제 프로젝트의 실패와 여행 허가증을 받는 데 늘어선 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정부는 완전히 무능하다.


[폐허의 도시]에 구원은 없다. 폐허의 도시 사람들 역시 각자도생을 추구할 뿐이다.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남거나 아니면 자살을 해야 한다. 때문에 도시에는 빨리 달려서 기력을 소진하고 죽으려는 죽음의 질주자’, ‘최후의 점프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추락사’, 자살을 돕는 안락사 클리닉’, 대신 죽여주는 암살클럽이 있다. 도시의 사람들은 점점 기억이 사라지는데, 다른 장소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경우 회상은 고통을 더하기만 한다. 두 세계에서 권력은 마을과 도시의 사람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정작 사람들의 삶이 해결을 요청할 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시지프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모든 자명한 사실들, 진리는 결실이 없다고 말한다. 폴 오스터의 [폐허의 도시]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 보편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안나 블룸이 떠나려는 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다. 그 속에서 불안을 느끼며 부조리와 직면해야 하는 우리는 또 다른 안나 블룸이다.

"주변의 모든 것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매일 새로운 행동을 낳는다. 예전의 그 흔들림 없어 보이던 가정(假定)이나 전제가 한순간에 헛된 것,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딜레마다.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잘 이용하여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한때는 우리를 인간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니 이 얼마나 황당한 모순인가?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발버둥쳐도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점에서 보면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허무한 짓거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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