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시민들 슬로북 Slow Book 1
백민석 글.사진 / 작가정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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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를 좋아하고 자주 읽는 이유는 여행이라는 말을 입에 머금은 순간, 낯선 곳에 대한 흥미와 기대감에 사로잡혀 엔도르핀이 분출되기 때문이다. 내 모든 시간과 돈을 여행에만 쓸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 차안으로 선택한 것이 여행 에세이인 것이다.

오늘 하루만 살 것 같은 자세로, 지금 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이곳의 나와 이별한 뒤,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 듯, 정신만 그러하지 육체는 호락호락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적으로나마, 육체보다 먼저 새로운 여행지를 갈망하고 대리만족하고 맛보는 것이리라.

 

이번에 마주하게 된 여행 에세이는 <아바나의 시민들>이다.
하지만, 쿠바 여행기라는 점에서 익숙하지 않은 에세이다.
여행의 장소로 쿠바를 생각해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바나라는 생소한 이름도 낯설기에 책을 읽는 초반에는 책장을 넘겨야하는 손가락들도 어색함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했다.

특히 인상깊었던 점은,당신이라는 2인칭시점으로 작가의 감정과 생각들을 써내려 간다는 것이다. 이때였다. 문장의 주어를 당신이라고 칭하는 것의 오묘하면서도 역설적인 매력을 느낀 게.

책을 읽는 초반에는 작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당신이라 칭하며, 독자 당신에게 말하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작가 자신의 자아에게 그 순간 작가가 느꼈던 느낌과 감정들을 추억하며 고백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은 더 이상 작가가 아닌, 내가 되어, 내가 진짜 쿠바에 가서 느낀 나의 체험이 되고 생각이 되고 감정이 되는, 감정 이입 이상의 새로운 것이 된다.

또한, 쿠바에서 찍은 사진을 중심으로 쿠바에서의 나날들을 기록하는데, 신선했던 것은 사진 속 피사체들의 생각과 감정을 추리하는 작가의 시선이다. 보통 여행 에세이는 여행지의 감성이 묻어나는 사진들의 나열(보통은 인물보다는 배경이 많은), 그 속에서 추출된 작가의 사색과 통찰을 기록한 것이 많지만, <아바나의 시민들>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론 배경적인 사진들도 잇지만, 쿠바의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사진이 가득하다.

사진을 찍힌 순간에 피사체들이 느꼈을 감정이나 생각들을 추측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과, 사진을 찍은 작가 본연의 1인칭 시점이 동시에 담겨, ‘당신이라는 표현으로 혼합되, 너무 주관적이지도  그렇다고 너무 객관적이지도 않는, 솔직하고도 담백한 쿠바와 시민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스마트폰과 함께하며, 전자기기로 도배되어 바쁘게 살아가는 한국에서의 삶과는 정반대인, 소수의 와이파이존이 이상하고 불편하지 않으며, 스마트폰보다는 사람들과 나 자신과 풍경들 속에서 특유의 여유를 장착한 쿠바 사람들의 모습이, 책장을 넘길수록 복잡한 내 머릿속을 잔잔함과 평화로움으로 물들였다.

 고도의 스마트화와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게 발전이며,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여태까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지만, <아바나의 시민들>을 읽으며 오랜만에 삶이 풍요롭다는 게 어떤 것일지생각해보게 된다.

쿠바의 삶은 스마트화와 발전과는 거리가 멀고, 발전과 성과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편하기 짝이 없고 답답할 수 있다. 하지만 쿠바의 그들은 여유를 즐길 줄 알고, 자신을 자연 속 배경으로 물들일 줄도 알며, 순간에 취할 줄 안다. 낯선 외국인이 카메라를 들이대도 경찰을 부르거나 경계하지 않고,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할 때 간을 보거나 재지 않는다. 나와는 정반대인 그들의 모습이, 어느새 자본주의에 물들어 각박해진 나에게 물음을 건넨다.
 
백민석 작가의 쿠바가 나의 쿠바가 되고, 같은 시간 속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낯설지만 부럽기도 한 삶을 따라가본 따뜻하면서도 평화롭고 잔잔한 여행 에세이다.



목마름과, 이런전런 사고와, 격렬한 햇볕에 반비례하는 어두운 상념 속에서 문득 당신은 중얼거리게 된다. 고통과 즐거움은 서로 다르지 않으며 에스프레소의 쓴맛처럼 고통이 때론 즐거움의 풍미를 더 깊게 할 것이라고. -53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아바나에서 가장 볼만한 피사체인데, 사진은 휘발될 운명의 추억에 물상을 부여해, 한정된 형태로나마 현실에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당신은 그러니까 그들을 당신의 남은 생애만큼 당신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궁극적인,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76

이제 당신의 이웃들은 음식점이나 근린 공원처럼 모이라고 만들어진 장소가 아니면 모이지 않는다. 당신의 이웃들은 벤치에 앉아 잡담할 만큼 한가롭지 않으며, 서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이웃이 알까봐 전전긍긍한다. 서로 일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서로 대충 알기를 바란다. 그래서 당신은 아바나의 시민들 앞에서, 평화롭고 정겨우며 서로를 속속들이 알던 당신의 과거에 잠시 다녀온 듯한 기묘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168

당신의 기억력은 믿을 수 없고 당장 망각이 걱정스럽다. 혹자는 사진에 찍힌 것만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진 없는 추억들은 언젠가 휘발되어, 오염되고 왜곡된 흐릿한 흔적만 남게 되지 않을까.-172

하지만 절망에 대한 감각은 현장이 아니면 느끼기 어려운 찰나적 감각이다. 인간은 절망을 그리 오래 견디지 못한다. 인간은 잠시도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다. 절망은 쉽게 휘발적이다. -198

익숙한 삶의 습관을 가차 없이 하루아침에 포기해야 할 때의 흥겨운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아바나는 인터넷 중독을 치료하는 아주 훌륭한 휴양처가 된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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