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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보림문학선 4
오카다 준 지음, 박종진 옮김, 이세 히데코 그림 / 보림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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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카다 준,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여름방학의 막바지, 초등학교 6학년생인 이치로는 동네 아이들과 공원에서 야구 놀이를 하게 된다. 담임선생님이 내어 준 “같이 등교하는 아이들하고 여름 방학 때 다 함께 놀기, 한 번 이상” 이라는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이치로와 함께 등교를 하는 아이들은 공원을 마주하고 서 있는 ‘스카이 하이츠 맨션’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다. 그럴싸한 이름과는 달리 스카이 하이츠 맨션은 그저 그런 보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그 아이들 가운데에는 이치로와 같은 고학년도 있고 저학년 아이들도 있다. 남자 아이도 있으며 여자 아이도 있다.

스카이 하이츠 맨션 앞에 있는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아주 커다란 미끄럼틀이 하나 있다. 어찌나 큰 미끄럼틀인지, 미끄럼판은 몇 명이 나란히 앉아서 탈 수 있을만큼 넓고 미끄럼틀 가운데에 묻혀 있는 토관은 어른이 똑바로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다.

스카이 하이츠 맨션에 사는 열 명의 아이들이 한창 야구를 하고 있던 도중, 아마모리 아저씨가 공원에 나타난다. 언제나처럼 검은 옷차림에 파이프를 문 모습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투덜거린다. 아마모리 씨는 역시 스카이 하이츠 맨션 201호에 살고 있지만 그 괴팍한 성격 때문에 아무와도 친하지 않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그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인사도 잘 받아 주지 않고, 어쩌다 마음이 내킬 때에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이 전부이다.
그 괴팍한 아마모리 아저씨가 공원 한가운데에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우산을 펼치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열 명의 아이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미끄럼틀 아래로 몰려 들어가고 거기서 한 개씩 한 개씩 저마다 숨겨왔던 신기한 이야기를 풀어내게 된다.

아이들이 하나 둘 꺼내기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신이 분명 경험했지만 자기 자신도 그것이 진짜였는지 꿈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신기하기만 한 이야기들이다.
데루오의 한밤중 오케스트라, 이치로와 교코의 바닷가, 소노미가 만난 말하는 메기, 지로의 청띠 제비나비, 다이스케의 분필로 그린 구름. 유키의 그림자 인사, 노부코가 탄 커다란 종이비행기, 그리고 사치에와 가쓰지의 이야기까지.

아이들의 이야기에는 전부 하나같이 아오모리 아저씨가 등장하지만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것이 정말 아오모리 아저씨였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와도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는 아오모리 아저씨 이기도 하고, 그 일을 겪은 후에 얼굴을 마주하더라도 전혀 자신은 모른다는 낯빛이기 때문이다.
서로서로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후에야, 아이들은 자신들이 겪은 그 신기한 일들이 전부 아오모리 아저씨가 만들어 낸 일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아오모리 아저씨가 마법사라는 것도.

이야기가 끝나 가고 비도 점차 그쳐 갈 무렵에서야 아이들은 또 한 가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 무뚝뚝하고 괴팍한 아오모리 아저씨가 사실 자신들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어쩌면 아이들이 경험한 그 모든 신기한 일들은 아오모리 아저씨의 마법이 아닌 따듯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스카이 하이츠 맨션에 처음 이사와 혼자서 투덜거리기만 하고 있던 데루오에 대한 관심, 혼자서 집에 남겨진 이치로와, 이제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워하고 있는 교코에 대한 관심, 쓸쓸히 쭈그리고 앉아 발코니 너머 쏟아지는 빗줄기만 바라보고 있던 소노에에 대한 관심, 엄마에게 괜한 짜증을 내고 혼자서 조금은 후회하고 있는 유키 등에 대한 아오모리 아저씨의 따듯한 눈빛이 그런 마법 같은 일들을 만들어 낸 것일지도.

아이들이 그렇게 아오모리 아저씨의 다른 모습을 알아가고 있을 무렵, 아버지가 스카이 하이츠 맨션의 관리인인 가쓰지는 아오모리 아저씨가 오늘 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조금은 슬픈 소식을 아이들에게 전한다.
갑작스레 쏟아진 비 때문에 미끄럼틀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스카이 하이츠 맨션의 아이들은, 혼자서 외로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아오모리 아저씨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따듯한 마음을 전하기로 마음먹는다.


아오모리 아저씨의 눈에는 아이들과 맨션의 사람들이 보내어 오는 그 따듯한 배웅의 인사가 마법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아오모리 아저씨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과거의 상처를 마법처럼 조금은 치유받고 스카이 하이츠 맨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여러분……, 여러분, 고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에게 의미가 되는 데에는 큰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지레 부담스러워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작은 관심어린 시선이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마법과도 같은 커다란 힘도 그 작지만 따듯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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