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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는 주제에 관한 몇 권을 추려보았다. 흉흉한 세상이라 예년만큼 송년모임도 흥하지 않을 터, 먹고 마시는 책이라도 읽으며 흥성흥성 기분 냈으면 하는 바람. 동양사니 서양사니 고전 문학이며 현대 소설이며 그 다양한 분야의 교양은, 책들을 즐기며 덤으로 챙기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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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식탁 / 장징
여러 해 전 <장정일 삼국지> 일러스트를 그릴 때, 고대 중국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바로 이 <공자의 식탁>. 다양한 음식 뿐 아니라, 중국 대륙 방방곡곡의 다양한 문화가 시대 순으로 소개되어 있다. 도대체 저자 장칭은 이 많은 자료들을 언제 다 읽은 것일까. 부럽다. 또한 이 많은 음식들을 어디서 구해다 맛본 것일까. 더욱 부러운 일.
그리스 문화사 / H.D.F. 키토
고전은 서사시다 / 강대진
고대 희랍 문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 톡톡 튀는 입담이 일품이다. 뒷부분에 나오는 그리스의 음식 문화. 의외로 소박한 식사를 했다더라. 하지만 그 덕에 장수를 누렸으니. 아무튼 읽어보시면 별별 이야기들이 다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덕은, 이 정보들이 그냥 잡다하게 나열되지 않고, 대단한 통찰력에 의해 잘도 엮여 있다는 것. 이 다양한 주제들을 일이관지하는 지은이 키토 선생의 내공이 다만 부러울 따름. 물론 이 책은 그리스 고전을 소개하는 입문서인데, 이러한 주제라면 강대진 선생의 <고전은 서사시다> 역시 강력 추천.
라블레의 아이들 / 요모타 이누히코
필자보다 공부도 훨씬 많이 하고 맛있는 음식도 훨씬 많이 먹고 다니는 친구가 “이 책 최고”라며 권해줬는데, 아, 과연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할까 난감. 몇 꼭지 제목만 나열하자면, “롤랑 바르트의 덴푸라”, “귄터 그라스의 장어 요리”,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푸딩”,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돼지고기” 등등. 저자의 학식에 혀를 내두르고, 메뉴에 군침을 흘리게 된다. 가장 부러운 것은 저자 요모타 이누히코가 이 모든 요리를 만들어 직접 시식한다는 사실. 그저 시샘할 뿐. <공자의 식탁>을 지은 장칭 선생도 깜짝 등장하여, 학식과 음식의 대단한 내공을 과시.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 프랑수아 라블레
지독히 유명한 고전이지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봐도 그냥 포복절도 재미있는 책. 서두에 안 씻은 곱창을 먹었다는 메슥메슥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조금 슬펐다. 작품에서는 이걸 먹고 거인 영웅을 수태하지만, 나는 단지 입맛만 잃었을 뿐. 아무튼 이야기 내내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라블레의 아이들>은 이 작품을 염두에 두고 책 제목을 지었다나. 이 책의 지은이가 프랑소와 라블레니까. 저자의 대단한 입담만으로도 읽는 즐거움은 충분.
명정사십년 / 변영로
아주 짧은 책. 그러나 어찌나 재밌는지, 한 번에 다 읽기 아까워서 몇 달 동안 나누어 읽었다. 입담만 놓고 본다면 세계 문학의 반열에 들어도 아쉽지 않은, 수주 변영로 선생의 걸작 에세이. 저자 본인이 사십년 동안 술 마신 이야기를 솔직하게 기록하였다. 그렇다고 고백록은 아니고, 오히려 반성을 빙자하여 술자리 추억을 자랑하는 그 뻔뻔함이 매력 포인트. 제목부터 명정, 술 취할 명(酩)에 술 취할 정(酊)이다. 국한문 혼용체가 이토록 아름답다니! 작금에 되살림이 불가함을 한하노라. 내게는 사연이 있는 책. 며칠 동안 밤새 술을 마시다가 정신이 몽롱한 채로, 친구의 서가에서 발견한 책이다. 이 얼마나 운명적인가.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 최규석
지금껏 먹는 이야기를 즐겁게 했는데, 먹히는 쪽은 어떨까? 즐거울까? 이 책에 실린 단편 만화 <사랑은 단백질>을 보자. 자취방에 모여 사는 주인공들(<습지생태 보고서>에 나오는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치킨 배달을 주문한다. 그런데 배달을 온 치킨 집 사장은 다름 아닌 닭 아저씨. 자기 아들 병아리를 튀겨 왔다. 전혀 즐겁지 않은 설정이 매우 우스운 대사들과 너무 진지한 그림체와 엮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다. 자주 보기 드문 수작.
주문이 많은 요리점 / 미야자와 겐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집. 그 중 ‘주문이 많은 요리점’은, 굳이 말하자면 요리점의 이야기이다.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데, 미리 이야기할 수도 없고. 답답하다. 이 동화의 내용을 아시는 분들은, 왜 이 리스트의 이 부분에 이 책을 살짝 끼워 넣었는지 눈치 채셨으리라.
10과 1/2장의 세계 역사 / 줄리언 반스
제목을 보면 역사책 같지만 사실 소설책. (물론 역사 코너 서가에 꽂아 놓은 곳도 있기는 했다. 쩝.) 제목대로 10과 1/2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인데, 연작도 아니고 장편도 아니다. 내용상 따로따로면서도, 또 묘하게 엮여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현대 소설. 첫 번째 단편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인데, 어떤 동물은 잡아먹히고 어떤 동물은 살아남는다. 도대체 어떤 기준인가? 방주에 몰래 탄 밀항자는 노아와 가족들을 비웃는다. 여기까지는 재미있는 블랙코미디. 그러나 두 번째 단편부터 똑같은 모티프가 심각한 상황으로 바뀐다. 유람선의 교양 있는 승객들이 졸지에 인질이 되어, 하나씩 둘씩 ‘도살당하는 신세’로 전락하니까.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승객들은 죽음을 맞는가? 읽다보면 모골이 송연. 그러면서도 끝까지 흥미진진하며 유머를 잃지 않는다. 블랙 유머이긴 하지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백석의 시에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옴은 유명한 이야기. 겨울에 하얀 눈이 쌓일 때, 이북 어딘가 국수(냉면)를 내려 먹지 않을까 애틋한 생각이 드는 것은, 순전히 백석의 덕분이다. 틈나면 백석의 시를 읽고 있지만 십 수 년째 내 마음을 사로잡은 수수께끼가 있다. “…뱃사람들이 언젠가 아홉이서 회를 쳐 먹고도 남어 한 깃씩 노나 가지고 갔다는 / 크디큰 꼴두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슬프다”라는 시가 있는데, 그쯤 되면 꼴뚜기가 아니라 전설 속 ‘대왕오징어’가 아닐까. 분명 맛도 틀릴 터이다(냠냠). 백석 시에 등장하는 음식문화를 연구한 책 <백석의 맛>을 읽어 봐야겠다.
추천인 : 김태권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한겨레 일러스트학교를 수료했다. 2002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며 만화 《십자군 이야기》를 작업했다. 중세 이슬람과 유럽의 역사를 현재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재해석하여 지식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일간지에 연재되던 《장정일 삼국지》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2010년 현재 서울대학교대학원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십자군 이야기》,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공저),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어린왕자의 귀환》등이 있고, 《장정일 삼국지》와 《철학학교》, 《에라스무스 격언집》 등에 삽화를 그렸다.
김태권 님의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