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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면, 마음에 품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질 겁니다. 분명 ‘저 놈이 또 무슨 수작이야?’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속는 셈 치고 딱 오 분 만 들어보세요. 솔직히 우리 사이에 신뢰가 너무 없다는 생각, 하지 않으십니까? 네. 네. 이해합니다. 물론, 제가 신뢰를 쌓을 만 한 사람은 아니었지요. 그건 인정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이렇게 앙금이 남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이 이야기만은 꼭 들으셔야 합니다. 듣고서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지요. 설마, 사나이가 한 입으로 두 말이야 하겠습니까.
오케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물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네? 빨리 시작하라고요? 아이쿠.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된 사연인가 하니, 참!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잠시 제 독서 편력에 대해 설명해야겠군요. 책 따위는 안 읽을 놈이 웬 독서 편력, 이라고 생각하셨죠? 사실 저도 불과 삼 개월 전까지는 책과 담을 쌓은 놈이었습니다. 책을 읽기 보다는 텔레비전 야구 중계나 아내의 어깨 너머로 보는 드라마를 더 즐겼죠. 가끔 읽는 책이라고 해 봐야 밤에 잠이 안 올 때 펼쳐드는 개역 개정판 성경이 전부였습니다. 혹시 불면증 있지 않으십니까? 그럴 땐 성경이 최곱니다. 저는 뭐 “주께서 가라사대 궁창이 있으라.” 부분만 읽어도 바로 잠이 쏟아지거든요. 네? 기독교시라고요? 그것도 독실한? 하하. 그럼 할 수 없지요.
아무튼 책 하고는 담, 아니 아예 댐을 쌓아버린 제가 변하게 된 건 이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긋지긋한 전세난에 허덕이다가 도심 외곽으로 밀려난 게 바로 삼 개월 전이지요. 덕분에 원래 집보다 사십 분 이상 차이가 나게 되었죠. 다행이 지하철이 있어서 출근에는 큰 불편이 없었습니다만, 문제는 긴 시간 지하철을 타는 동안 아무 것도 할 게 없더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휴대전화 오락으로 버텼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더군요. 삼십 분 이상 하면 눈이 뻑뻑한 게 영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남들 다 하는 것처럼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죠. 가는귀가 먹더군요. 부르는 소리를 몇 번 못 알아들었던 건 다 그런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이어폰 다음에는 무료 신문이었습니다. 신문사 별로 다 모아놓고 읽었는데, 이 기사가 저 기사 같고, 저 기사가 또 요 기사 같아서 곧 신물이 났습니다.
결국 선택한 방법이 ‘책이라도 한 번 읽어볼까’였습니다. 저와 달리 아내는 독서광입니다. 남들 다 산다는 옷은 제쳐두고 책만 줄기차게 주문하더군요. 전 그 책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일단 관심을 가지고 보니 정말 많더군요. 책장에도 모자라 집 안 구석구석에 책을 쌓아놓았더라고요. 한 마디 해 주려다가 참았죠. 남편이 속 좁게 그럴 순 없지 않습니까? 아무튼 그 많은 책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걸 짚었습니다. 제목이 무려 ‘야동 수집가’더군요. 오호라. 마누라가 이런 것도 보네. 뭐, 이런 심정으로다가요.
저는 지하철에서 책을 펼쳤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야동이라 적힌 제목을 떡하니 보여줄 순 없어서 왼손으로 슬쩍 가리면서 읽었죠. 시작부터 아주 삼삼하더군요. 꽤 하드 고어 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읽으면 읽을수록 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내용이 나왔습니다. 생각만 해도 볼이 발개지는 그런 장면 있잖습니까, 응응하고 옹옹해서 아잉으로 끝나는 그런 장면들. 하나도 나오지 않더군요. 나오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애를 죽이는 범죄자가 등장하고, 그걸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 나오고, 아무튼 복잡하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어서 다시 표지를 확인해 봤더니, 에라이 젠장, ‘야동 수집가’가 아니라 ‘아동 수집가’였습디다. 대 실망을 하면서 책을 덮으려는데 다음 내용이 궁금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 나쁜 놈은 어떻게 됐단 말이야? 뭐, 이런 심정이었죠.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씨, 참 재미있더군요. 세상에 책이 재미있었다 말입니다. 저로선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습니다. 그 후였습니다. 아내의 책을 하나 둘, 슬금슬금 읽기 시작한 건.
혹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바둑 입문서 같은 걸 들고 계신 걸 몇 번 보긴 했는데, 아마 좋아하시리라 믿습니다. 딱히 좋아하시진 않더라도 댁에 세계문학전집 한 질 쯤은 있겠지요. 십 몇 년 전엔 그런 걸 외판원이 팔고 다녔죠. 네, 저도 그 세대긴 합니다. 참!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아. 책 읽는 걸 좋아하냐고 물었죠? 전 삼 개 월 전과 달리 지금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네!”라고 대답할 겁니다.
야동, 아니 아동 수집가를 시작으로 저는 책, 그 중에서도 미스터리 스릴러에 빠져버렸습니다. 한 번 손에 쥐면 눈을 떼지 못하겠더라고요. 모든 책들이 말이지요. 처음에는 영미권 작품들을 섭렵했고, 뒤늦게, 그러니까 두 달 전부터 일본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아내의 권유였죠. 아내는 훌륭한 독서 지도사였습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었죠.
“여보. 그 책은 몇 명 안 죽어.”
“그건 고작 내장으로 줄넘기 하는 정도란 말이야.”
“요걸 읽으면 내가 인간이란 사실이 싫어지지. 후후후.”
일본 미스터리도 참 재미있더군요. 특히 무심한 듯 덤덤한 문체로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살살 긁는 게 딱 제 스타일이었습니다. 급기야 각종 카페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카페가 뭔지는 아시죠? 차 마시는 곳 말고, 거긴 다방이죠, 아무튼 카페란 건……, 네? 아신다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 카페에서도 열심히 활동을 했는데, 한 달 전쯤이었나요, 엄청난 책이 나온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나게 재미있어서 둘이 보다 한 명이 죽어도 모를 정도라는 거지요. 어떻습니까? 이쯤 되면 구미가 당기지 않았겠습니까? 좋아하시는 낚시에 비유를 해 보자면, 엄청난 낚시터가 있는데 입질이 너무 많이 와서 둘이 낚시하다 한 명이 빠져죽어도 모른다, 뭐 이정도겠지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제가 들려드리고 싶었던 이야기인데요, 그 책, 그러니까 엄청나다고 소문난 그 책의 이름은 <고백>이었습니다. 제목이 참 간단하다고 생각하셨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2009년 일본 서점 대상 수상작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비해서 무척 단순한 제목이었습니다. 우리 끼리 하는 이야긴데, 자고로 제목이야 말로 강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용의자 X의 고백’이나 ‘제물의 고백’ 혹은 ‘도착의 고백’ 정도는 돼야지요.
아무튼 제목 때문에 조금 깔보며 펼쳐든 이 책은, 그러나 정말로 엄청난 놈이었습니다. 거의 최홍만 급이었지요. 뭐, 그만큼 대단하단 이야기입니다. 제목 그대로 누군가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각 장별로 ‘성직자’, ‘순교자’, ‘자애자’, ‘구도자’, ‘신봉자’, ‘전도자’라는 이름이 붙은 일종의 연작장편소설입니다. 미나토 가나에라는 작가가 썼다더군요. 각 장이 모두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그러니까 ‘고백’입니다. 저희들 쪽에선, 그러니까 이런 소설을 즐기는 사람들은 ‘스포질’이라고 책 내용을 말하는 걸 꽤 조심하는데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조금 말씀드리지요.
유코라는 이름의 선생이, 일본 야동에 많이 나오는 이름이지요. 허허. 아무튼 그 선생이 중학교 종업식에서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 자기 딸을 죽인 범인이 여기에 있다는 거지요. 선생은 무심하게 우유 이야기로 시작해서 누가 범인인지 서서히 까발리기 시작합니다. 어떻습니까? 요 정도만 들어도 ‘긴장잔뜩 궁금팽배’지 않습니까? 선생은 과연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선생의 딸은 어떻게 죽게 된 걸까요. 책장을 넘길수록 끔찍한 진실이 드러나고 충격적인 반전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와락, 이런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달려들게 됩니다.
이 책은 제 모자란 머리로도 무척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기특해 하실 건 없습니다. 그래봐야 늘 말씀하시듯 아메바 수준인데요. 제가 생각이 많았던 건, 기기 막히게 잘 넘어가는 부드러운 문체와 흥미진진한 내용 속에 작가가 묵직한 주제를 담아놓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꽤 능숙하게요. 그러니 저 같은 놈도 ‘생각’이란 걸 했지요. 먼저, 과연 소년범의 처벌은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당한가, 따위의 고민을 좀 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청소년 범죄가 심각하지 않습니까? 과연 고놈들을 어떻게 처벌하면, 피해자들의 울분도 풀고 그 새파란 것들도 개과천선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말입니다, 동네에서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주위 어른들이 다 야단을 치셨습니다. 혼꾸멍이 나는 거죠. 그래도 그분들을 원망하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그 야단 속에 애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그 어린 나이에도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요즘 아이들에겐 ‘야단’이 부족한 게 아닌 가 싶습니다.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야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말입니다. 만약 주위의 누구라도 그런 야단을 쳤다면 <고백>에 등장하는 두 꼬마 범죄자가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을 했던 거죠. 어울리지 않게 너무 진지했나요? 저도 이런 진득한 면이 있는 남자입니다. 후후. 네? 이야기나 빨리 마치라고요? 손목시계를 확인하시는 걸 보니 바쁘신가 보군요.
그럼, 또 생각해 본 건 사람들 마음속에 숨은 ‘악의’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겁니다. 각 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펼쳐놓는 고백 속에는 여러 가지 악의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참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오줌을 찔끔 거릴 정도는 아니었고요. 각자의 작은 악의들이 모여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거죠.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 그걸 감싸고 있는 보호막이 너무 얇아서 조금만 충격을 줘도 빠져 나오고 마는 그 악의를 <고백>은 무척 섬뜩하게 보여줍니다.
제법 어려운 이야기를 잘난 척하면서 들려드렸습니다만, 다른 걸 다 떠나서 <고백>은 기똥차게 재미있습니다. 내용도 짧아요. 책장도 금방 넘어가죠. 그래서였습니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2장까지 읽고, 출근하는 길에 거의 다 읽게 된 건요. 그런데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 오는데 딱 한 장, 그러니까 맨 마지막 6장이 남은 겁니다. 아무리 빨리 읽어도 무리겠더라고요. 저는 잠시 갈등을 했습니다. 네? 그 순간에 갈등을 해 하느냐고요? 애서가들은 말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도 책이 제일 중요한 법입니다. 때로는 출근보다 말입니다.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6장을 남겨놓고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똥을 누고 밑을 안 닦은 느낌이라면, 혹시 만분의 일이라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승강장 의자에 앉아 나머지 부분을 읽어버렸습니다. 아!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의 그 포만감이라니! 곧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지각을 한 겁니다. 늦게 출근하다 부장님 눈에 딱 걸린 건 그것대로 재수 없는 일이긴 했습니다만, 제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십사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장님께선 오랜만에 낚싯대에 어마어마한 입질이 왔는데 그걸 팽개치고 출근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 뭐라고요? 당장 나가라고요? 그리고 시말서를 쓰라고요? 네? 일단 그 전에 책부터 빌려달라고요? 후후. 부장님. 맨 입으로는 안 되죠. 잠깐. 재떨이는 던지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