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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불교사상 탐구
신규탁 지음 / 새문사 / 2012년 3월
평점 :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 대한민국 불교를 바라보며.
-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탐구> 1~4장
‘인연, 이판사판, 찰나, 아비규환, 아수라장, 업보’같이 우리가 흔히 쓰는 일상 언어에서도, 소중한 문화유산, 유적지가 가득 담긴 국사책 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우리 삶에 매우 깊숙이 녹아있는 존재다. 나는 특히 불교에 묘한 친근함을 느끼곤 했다. 종교적 믿음이나 강한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내 주위에는 불교가 가까이 있었다. 학창시절 개량한복 교복에 바짝 자른 동자승 머리를 하고 우리는 ‘영통사’ 앞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향냄새에 취해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대학교에 들어와 혼자 사는 자취방도 바로 봉원사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수능 대박 기원 플랜카드가 걸리고 부처님 오신 날이면 사람이 북적거리는 신기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여전히 불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무지에서 오는 경이로운 단계를 벗어나 ‘한국 철학’ 수업을 듣고 책을 읽으며 한 꺼풀씩 불교의 참된 이면과 마주하다 보니 불편한 진실이 너무나도 눈에 보인다. 이권을 잡기 위해 폭행과 살생을 서슴지 않는 악랄한 급조승, 정치판과 다를 바 없는 돈 넣고 돈 먹기 식의 선거 제도, 전통을 제대로 계승하지 않고 멋대로 바뀌어버린 예불문, 일제에 맞서 싸우기만 했다는 거짓된 환상과 달리 근대화의 흐름에 맞추어 변질한 일제강점기 불교. 하지만 날카롭고 신랄한 비판으로 진정한 전통과 마주하는 순간 불쾌함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함마저 드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역사를 바로 보는 순간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더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을 한 장씩 넘기며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종단의 출현, 불교 관계 법령, 불경의 한글 번역, 대웅전 예불문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한국 불교는 태고사 초대 주지 한암 중원 선사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조계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사찰령’, ‘불교재산관리법’. ‘전통사찰 보존법’의 영향력 아래 휘둘리는 타율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특히 한국 불교는 중국의 법 전통에 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던 시기 도첩, 선발 시험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조선 시대 선종은 『경덕전등록』,『선문염송』, 교종은 『화엄경』,『십지론』을 시험 과목으로 삼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의 통치를 받으며 정치권력의 개입에 취약한 모습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선교 일치적 요소가 많은 서적을 대상으로 하는 경향성을 보인 경전 번역이나 전문적으로 전통과 단절된 예불을 비교하는 부분도 유익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부분은 ‘불교의 민중화 운동’에 앞장선 용성 선사의 노력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산중불교로 중생과 단절된 불교의 한계를 직시하고 일본의 억압을 당당히 거부한 민족대표였다. 특히 어려운 한문으로 진입 장벽이 높은 불경을 익숙한 한글로 번역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찾아보니 단순히 불교가 아니라 21C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점도 많았다.
“오늘날 철학, 과학, 천문학, 정치학, 경제학 등 배울 것이 많은 시대에 한문만을 가지고 수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문명발달의 장애만 될 것이며, 설사 수십 년 동안 한문 공부를 하여서 큰 문장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 중국 사람들은 중국 글을 좋아하나 우리 조선 사람들은 조선 글이 적당할 것이니 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전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 연구의 한 나침반을 지으리라.”
글로벌을 외치며 단순히 영어 강의 비율에 목메는 대학교가 겹쳐지지 않는가?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기괴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영어’라는 문턱에 다시 발목 잡히며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그의 깊은 통찰을 다시 마음속에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용성 선사는 민족 문제에 적극 참여하며 교묘하게 탄압을 이어나가는 일본 불교에 맞서 싸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익히 유명한 한용운과 함께 1919년 3.1 독립선언의 대표로 활동했고,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는 일을 허용하는 일제의 전략에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며 한국 불교 정화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런데 과연 현재 한국 불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용성 선사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나가고 있을까? 무소유는커녕 탐욕에 가까운 기업형 사찰의 이해 타산적 경영 전략, 주지 스님의 막강한 권력 속에 무시당하는 승려의 인권은 분명 수십 년 전 불교의 썩은 살을 도려내려 했던 용성 선사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석가탄신일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도 흉흉한 소식이 들려온다. 조계사 주지 토진스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했는데 사실 백양사 인근 호텔 스위트룸에서 벌어진 밤샘 도박과 관련이 있다고들 본다. 가장 깨끗하고 맑아야 할 일선 승려의 마음에 탁한 먼지가 쌓이고 더럽게 얼룩진 탐욕이 불교 신자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부끄러울 따름이다.
결국, 우리는 용성 선사가 거듭 주장한 ‘법성(法性)’에 주목해야 한다. 법성 사상은 모든 사람은 누구나 본디 선천적인 양심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어리석음에 가려져 우리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인데 어리석음에 따라나오는 욕심을 관찰하기 위해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부질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리 승려들은 오히려 참된 진리를 거짓된 믿음으로 바꿔치기를 했다. 그들은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수많은 중생이 자유롭게 불성을 발휘하는 길을 오히려 막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누구나 품고 있는 양심이란 작지만 강한 힘에 주목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당연히 맑은 정신을 품기 위한 건강한 육체를 위한 노력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아프거나 나약한 건강 상태라면 누구나 유혹과 거짓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 또 미약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라 심오한 부처의 가르침과 수행 방법에 무지하다. 하지만 절에서 풍기는 이유모를 편안함과 청량함, 포근함이 좋다. 흉흉한 소식이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지만 밝게 웃는 아이를 보며 터져 나오는 맑은 미소도 어찌 보면 법성 사상의 온전한 나타남이 아닐까?
피 땀 흘려 한국 불교를 일궈낸 다섯 사람
-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탐구> 5~8장
용성 진종, 한암 중원, 운허 용하, 운암 성숙, 태허 홍선. 제2부에서는 대한민국 불교를 위해 피 땀 흘려 노력한 위대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본다. 일본에 의한 타율적인 근대화 과정, 미국 군정, 독재 정권의 억압을 겪으며 대한민국, 그리고 불교는 격동의 시기를 겪는다. 종교로서 주어진 임무보다는 권력과 밀착하여 본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비구-대처 간 싸움은 끝이 없어 보였다. 급조승으로 종단 권력을 빼앗고 절대 권력으로 부패한 주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다섯 명의 청정한 수행자는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사명감으로 나라를 위해, 나아가 우리 인간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들이 피와 땀으로 지켜낸 우리나라, 우리 불교가 수십 년이 흐른 2012년 과연 어떤 모습인가? 그들이 일궈놓은 밭에 부지런히 새싹을 틔우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최근 (문제 회피식으로 늘어놓는 변명을 들으니 더 황당하고 화나는) 승려 도박, 성매매, 음주 사건을 비롯해 하나의 대기업이나 다름없는 몇몇 사설 사암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세속의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은 수도자의 모습은 사라진 21세기 불교계는 다섯 승려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떠올려야 한다.
우선 ‘근대화의 선각자’ 용성 진종은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대각교 운동을 펼치며 법성 사상을 이야기한 스님이다. 그는 깨달음은 화두 참구를 통해서 얻었지만, 그 깨달음에 대한 이론적 설명 작업은 화엄의 법성의 교학사상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토대를 가지고 용성 진종은 새 불교 운동을 펼치며 미신적 성격을 철폐하려 노력했다. 자연스레 한국 불교에 수많은 제자를 남기며 영향력을 끼쳤고 남녀평등, 제가 불자 대상 한글 법회를 열며 근대에 걸맞은 불교운동을 이끈 위대한 인물이다.
그리고 ‘친절한 간화 선승’ 한암 중원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소통하는 스님이었다. 그는 반조와 간화에 특별한 우위가 없으며 수행 방법상 큰 차이가 없다고 이론적 토대를 다졌다. 일단 ‘반조’는 빛이 반사되어 비치는 일로 마음을 쉬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일상과 인연이 있는 곳에서 그것들을 살피고 또 살피는 일이다. 인간은 6경(색, 성, 향, 미, 촉, 법)을 우리의 의식 작용에 의지해서 지각하지만, 이는 생, 주, 이, 멸하는 것으로 허망하고 영원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허망한 의식 작용을 잠시 멈추고 여래장 자성청정심, 불성, 본성, 자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간화’는 간화선, 즉 화두를 관찰하는 선을 말한다. 선은 당에서 시작했지만 간화선은 남송에서 시작되었다. 쉽게 말해 화두가 제 기능을 하려면 골똘하게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암 중원은 ‘무자’화두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화두를 인지했고 내가 나를 살펴볼 때 마음이 들뜬 상태가 아니라 차분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 번째 ‘겸손한 화엄 학승’ 운허 용하는 애국자이자 교육자이며 수행인이자 지식인이었다. 조선 시대, 일제까지 내려오던 법성 불교를 계승 발전시키며 현대식 교육에도 앞장선 인물이다. 동국역경원을 창설해 대장경을 번역하려 했고 중고등학교를 건립하며 바른 가치관 성립에 큰 도움을 준 업적을 남겼다. ‘차 마시고 경전 읽고 번역하던 중’ 운허 용하는 경을 보고 그것을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바르게 판단 가능하므로 좋은 기운, 습관을 자꾸 쏘여주고 마음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생각이었다. 나아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부처님의 본의를 충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며 중생들을 위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다음으로 항일 구국 운동을 펼친 사회주의자, 봉선사 출신 좌파 노선의 ‘민주사회주의 애국자’ 운암 성숙이 있다. 그는 ‘선국가 후이념’을 신조로 계급혁명보다 민족해방을 우선시했다. 사회주의 노선이라 남북 대치상황에서 조금 다루기 까다롭거나 껄끄러운 부분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근대화처럼 역사적 사실로만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가 남긴 독립을 위한 업적이나 자유와 행복을 위한 노력,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평등하다.’, ‘세속의 영예보다는 보편적 진리추구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불교적 사상을 훗날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승속 일체의 종단 설립장’ 태허 홍선을 기억해야 한다. 승려의 결혼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일본의 영향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는 담대한 태도의 승려였다. 그는 현재 민중들의 요청과 새시대의 감각을 수용하지 못하는 불교 현실을 비판하며 법화경 신앙을 해답으로 들고 나왔다. 그는 법화경의 맥을 찾으려 대각국사 의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정당성을 탐색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수행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태허 홍선은 대한불교불입종, 즉 법화경을 믿는 종단, 승속 혼연일체가 되는 대중의 종단, 자아완성, 생활운동을 전개하는 새로운 길을 닦아놓아다. 이러한 움직임은 겨레 사랑 사상의 고취와 한국 불교의 법맥을 계승하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토대를 굳게 다졌다는 의의를 지녔다.
문득 공부를 마치고 나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부를 해볼까 생각했다. 신규탁 교수님이 매번 강조한 ‘훈습’, 좋은 향기가 몸에 배어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갖 잡념과 불안, 고민이 조금은 수그러들지 않을까 하며 복을 비는 마음으로 말이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생각을 비웠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차분하게. 하지만.....
힘들었다. 5분이라는 시간조차!!!!
잠시였지만 스마트폰이 손안에 없다는 생각에 초조해졌고 머릿속은 온갖 잡생각으로 가득 찼다. 조금 지나자 시험 기간에 누적된 피로 탓인지 졸음까지 몰려왔다. 침대에 뒹굴며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외부에서 오는, 그리고 내부에서 오는 훈습에 소홀했는지 한심함을 느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고, 훌륭한 책을 읽으려 애썼지만 김이 제대로 내 마음속에 배어들지 않았나 보다. 아니 지금까지 마주한 것들이 단순히 나의 쾌락을 충족시킨 탁한 기운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다보니 진실한 마음에서 내 마음속 소리에는 더욱 무관심했단 걸 깨달았다.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며 항상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했다. 지금 내 몸과 마음속에 배어있는 탁한 기운, 욕망의 향기를 서서히 씻고 내 마음 속 진정한 울림에 귀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쉬지 않고 노력해야한다. 더 나아가 나를 넘어 가까운 가족, 친구, 선생님, 이웃에게 기분 좋은 향기를 전하고 이 세상에 하나 뿐인 자신의 소중함, 무한한 가치를 일깨워줘야겠다. 이게 진정한 불교의 의미가 아닐까? 우리 모두는 부처란 말처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는 연속적이고 중층적이라는 것이다. 겉 토양을 보면 미국식의 현대판인 것 같지만, 그 겉을 한 겹 걷어내면 그 속에 일본 제국주의 흙이 나오고, 이 흙을 한 겹 걷어내면 그 속에는 유교의 봉건성이 나오고, 이 흙을 한 겹 더 걷어내면 그 속에는 불교 사상이 깔려 있다. 바닥을 다시 캐보면 그 속에는 긴 세월 쌓여온 무속적인 삶의 흔적들이 깔려 있다. 때로는 이런 역사의 퇴적물이 한데 뒤섞여 현재에 동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속에서 불교는 ‘유교적 봉건‘의 비판과 극복에도 소홀했고, 일제에 의해 주도된 ‘뒤틀린 근대‘의 비판 극복에도 역시 소홀했다. 역사는 중층적이고 연속적인데도 말이다. 이런 복합적인 공동체의 하나가 현재의 한국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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