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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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교수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에 부풀었다.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손에 쥘 것인가, 아니면 시간적인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더 할인된 값으로 집에서 편히 맞이할 것인가...라는 쓸데없는 고민을 한참 하다가, 결국 서점으로 가서 액면가 다 주고 데리고 왔다.

인문, 철학 분야로 분류되는 책이다보니 솔직히 구입이 망설여지기도 하는 것이, 과연 책에 든 지식을 내가 다 소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실은 나의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라도 알아낸다면 굳이 다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실제 서점에서 만나본 책선생은 생각보다 작고 얇은 분이었다. 이전 책인 <고민하는 힘>처럼 두꺼운 옷도 안입으셨다. 세월 때문인지 몸값은 좀 오르셨군. 내용을 보니 나같은 저능인에게도 생각만 더 하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신 듯 하다. 눈 앞에 있는데 더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 

 

전작인 <고민하는 힘>에서는 내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마치 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한올 한올 조언해주었다. 당연하게도 이 책은 나의 고민을 완벽하게 해결해주려고는 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저자는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 당면 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더욱 절실히 고민하고 그 힘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인 1900년대 초에도 있어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두 거인,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와 대문호라고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는 '고민하는 힘'으로 당대의 사회 속을 살아갔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도 그와 같은 시선으로 현 문제들을 조망하고, 절망을 극복해보자는, 우리의 자각을 도모하는 희망메시지가 담긴 책이었다.

 

 

세상, 도대체 왜이러는 걸까요

 

요즘은 어떤 시대인가. 나는 이제까지 내가 배우고 익힌 근본적인 틀에서 이탈하여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괴리감이 너무나 괴롭고 쓸쓸했다. 분명 안되는 것인데도 접근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른으로서 순수함의 타락. 그리고 세계 곳곳에 만연한 물질만능주의와 안일한 긍정주의는 아직 애어른으로 머물고 있는 나를 '왜 그렇게 사냐고' 무차별하게 꾸짖고 있었다. 게다가 성적 비관과 교내폭력으로 세상을 등진 어린 청소년의 비애, 노쇠했다 하여 자식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노인들의 허무한 자살, 외모지상주의와 물적 섹슈얼리즘이 낳은 성폭력문제 등, 인간에 대한 존엄함이 옅어지는 현실에 막막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인간은 어찌 이렇게 변함이 없을까. 성경을 통해 본 고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주 가까운 초기 자본주의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전 시대 사람의 역사를 보고 '쯧쯧 어리석기는'이라고 말할 처지가 못된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져야 하는데 인간의 본성은 좀체 깨어나질 않는다. 혹시나 깨어나는 찰나의 순간이 있다면 그건 죽음을 앞에 둔 시점이려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본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인간의 이러한 욕망에 의한 결과들은 이제 시시각각 곪아 터져서 문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살아선 안된다는' 직시를 주고 있다. 가르쳐주시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나약함과 어리석음, 안일함의 결과로 나와 같은 인간의 생명이 댓가로 치뤄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고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고민 속에서 더 낫고 영원한 가치를 찾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제까지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과학도 영원하지 않게 되었다. 저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과학의 맹종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일깨운 사건으로 인식했다.

 

책을 발견하자마자 대단한 인상을 받았다. 저자의 전신이 표지에 척하니 인쇄된 모습이라니. 입을 다물고 의연히 나를 쳐다보는 듯한 모습은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다. 이제 내 할 말을 하겠다.'는 의지마저 보인다.

201페이지 되는 A5크기의 작은 책이건만 지금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고민하는 문제인,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작은 것 하나 놓침이 없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마치 삶이란 복잡해보여도 연결고리를 찾으면 어렵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 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읽어나가는데 어렵지 않다는게 이 책의 또 하나의 자랑이려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그 말은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고민

 

<살아야 하는 이유>는 <고민하는 힘>의 두번째 책으로, 저자가 극도의 신경증에 시달렸던 아들의 죽음과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원전 사고를 목격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극한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 보내는 '삶의 의미 찾기'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문제의 실마리를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문학작가), 막스 베버(사회학자), 윌리엄 제임스(심리학자), 빅토르 에밀 프랑클(유대인 정신의학자)의 저서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이들은 모두 초기 자본주의시대를 살아온 대표적인 인물들로, 지금의 '자본주의 끝판의 광경'을 자본주의가 시작할 때 부터 인지하고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온 인물들이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고통은 자본주의가 변질되면서 비롯되었는데, 오로지 성과와 돈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의 도덕과 태도가 말살될 지경에 이른 탓이다. 부가 모든 꿈을 이루어줄거란 생각은 자연재해와 과학의 무자비함에 고개를 숙였다. 이게 나를 제외한 누군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 어리석음의 댓가는 분명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이라 확신한다.

자본주의의 변질이 가져다준 문제는 다방면에 걸쳐 일어났는데, 저자는 이를 크게 자의식 과잉, IT산업이 낳은 직접 접근형 사회의 도래, 과학의 맹종으로 말하고 있다.

 

저자는 서장에서 세상에 만연한 '평범한 인생의 행복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극히 평범한 행복론이란, 태어나서 그럭저럭 괜찮은 학교에 들어가고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고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나쁘지 않을 만큼의 돈을 벌어 집도 사고 괜찮은 노후를 보내는 그런 행복이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만'이 깔려있으니 평범해보이는가? 하지만 이것은 아주 고난위도의 행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이것이 범적인 행복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두가 이를 쫓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행복조차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인 사람들은 어떨까. 이들은 영원히 불행한 것일까.

이러한 행복론은 가진자가 자신의 부를 세상에 드러내고 생색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몸이 아프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에 행복하고, 비록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꿈이 있기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행복론'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행복은 각자가 느끼는 것이지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반복하는 고민의 여정은, 때로는 오직 나만의 세상만 바라보고 질주하는 경주마의 생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자의식의 비대는 결국 주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바깥과 나의 연결고리의 상실은 공포와 실망을 남겨, 삶을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나도 얼마 전까지 '진짜 나'를 찾는 것에 열중했었다. 워낙 살기가 팍팍하니까 남이 하는 것을 쫓기 보다는 나만의 것을 찾아 그것을 잘 육성해보면 좀더 편한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심리학의 영역이라 생각되는 '남들과 다른 나만의 것 찾기'는 하면 할 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왜냐하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그저 '그런 것 같다'라는 뜬구름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정말 그럴까?'라는 의심마저 생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는 인간의 특수성을 찾으려면 결국 남의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남과는 차별되는 자기다움을 가지려면 그 점이 남과 차별된다고 남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여기서 모순이 생겨버린다.

따라서 나의 본래적인(진짜의/자기다움) 모습을 탐구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과 상생하는 기초 안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조류에 같이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고민하여 얻어낸 가치를 기준으로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의 극복해야 할 점과 받아들여야 할 점을 구분하는 것이다.

 

과학은 어떨까. 저자도 말했지만 나 또한 이 세상이 '과학의 신격화'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을 맹종하는 처사는 정말이지 과학을 종교처럼 '믿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확실히,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믿고 따르는데, 과학은 그런 인류에게 큰 믿음을 안겨주었다. 재차 시행된 실험에서 같은 결과를 보여주면서 이를 실생활에 쓰이도록 하니 살기 참 편해졌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을 편하게 해준 과학에게 고마워하고 좋아한다. 나 또한 과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을 통해 인류는 적은 자원으로 더 나은 효과를 얻는 방법을 알아냈고 그 결과 이웃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활용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지식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이 과학이라는 것은 결국 기존에 존재했던 만물의 자연 법칙에 있어서 인간에게 좋고 편한 방향으로 그 한 줄기를 일부 갖고 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미지의 세계는 존재하고 알 수 없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과학을 이용하므로써 어떤 결과를 받게 될지는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일본에서 일어난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그것이다. 원자력의 위험함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더라도 '과학적이니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내온 댓가다. 물론 우리로서는 최선으로 대책을 마련하고, 혹시 있을 사고에 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그리고 이러한 사태로 인해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큰 슬픔과 괴로움을 맛보았는가.

 

 

거듭남을 위하여

 

이 책을 재차 읽으면서 느낀 것은, 저자인 강상중 교수가 전작에서는 쉬이 드러내지 않은 부분에 대해 이번에는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과학과 기술에 마음을 두고 살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신에 대한 믿음'이다. 원전 사고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과학 기술로 인한 재앙'으로 인해 과학이 더이상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걸 안 지금, 종교적 믿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모두 잃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절망적인 물음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믿음인 셈이다. 이는 서장에서 신이 행복재를 불평등하게 분배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행복의 변신론'이 지배하는 현 세상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야 말로 신께서 복주시는 자라고 말하는 '고난의 변신론'이 사회에 널리 보존되기를 바라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소세키나 막스 베버, 프랑클 등의 거인들도 숱한 고난과 역경을 통해 앎을 얻는 '거듭나기'과정이 있었다고 강조하면서, 저자도 우리 시대에 발생하는 각종 사건 등을 삶에 대한 반성과 함께 '거듭나기 위한 과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은 한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달으라고 주신 '사건'을 그저 닫고 피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마치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 양, 어떤 회개나 반성도 없이 사건을 덮고 숨겨서 "별 문제 아니오~"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다가는 정말 중요한 것은 얻지 못하고 화는 배로 불어서 조만간 당신을 삼켜버릴 것이다.

 

 

저자가 나쓰메 소세키, 막스 베버, 빅토르 에밀 프랑클, 윌리엄 제임스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진 문제의 해결 방향을 모색하려고 했던 것은, 이들이야말로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회의 거센 흐름을 피하지 않고 전면으로 맞으면서도 결코 섞임 없이 자신의 소리를 내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사회 조류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리라 여겼던 것이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문제들은 이전에도 있어왔고, 그 해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불현듯 '생각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에서 프랭클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그럼에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려네"라는 말이 참 마음에 와닿는다. 그는 인생이란 "인생이 던져오는 다양한 물음"에 대해 "내가 하나하나 답해 가는 것"이라 말했다. 크리스천인 나라면, 지금 나에게 도래한 고난에 대해 "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라며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예, 받아들이겠습니다."라며 말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고난을 받아들이다. 이것은 무거운 결단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을 극복한 선배들을 우러러 보는 데서 위안을 얻는다. 그러므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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