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즌 빈스 블랙 캣(Black Cat) 12
제스 월터 지음, 이선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가끔 세상살이에 지치거나 참을 수 없이 우울해질 때, 누구나 이런 생각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모든 걸 지우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떨까? 과거를 등지고 모든 걸 리셋해서 전부 다 바꿀 수 있다면... 불현듯 생각나서 밤마다 하이킥하게 하는 망신스런 기억이나, 생각하면 폐부 깊은 곳에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돌이킬 수 없는 가슴 아픈 일, 지난 실패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사람들... 마법처럼 모두 한꺼번에 떨쳐버릴 수 있다면.. 그러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의 주인공인 빈스 캠든은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그런 드문 기회를 잡은 남자이다. 신용카드 위조나 하고 가끔 차도 훔치던 뉴욕의 조무래기 범죄자였던 그는 마피아 조직과 운 나쁘게 엮이면서 FBI 증인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과거를 세탁하고 이름도 바꾸어 워싱턴주의 스포캔이라는 낯선 소도시에 정착한다. 그리고 조용히 행복하게 자알 살았습니다.... 하면은 이 감동적이고 재미난 소설은 탄생할 수 없었겠지.  

아주 양심적으로 새 사람이 되지는 못했어도, '당신을 허기지게 만드는 도넛'이라는 이상한 상호명의 도넛 가게의 제빵사로 성실하게 일하며 성공적으로 일반 시민으로 정착한 듯 보이는 빈스. 완전히 갱생하지는 못한 그가 아직도 하는 사소한(?) 잘못들이란, 사회에 큰 물의는 일으키지 않는(어디까지나 별 몇 개 정도는 단 사람의 시선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도박, 마리화나 판매, 신용카드 위조 등의 늘 하던 취미 내지는 부업들이다. 돈이라면 사는데 부족함 없이는 벌고 있고(이 곳에선 딱히 쓸 데도 없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짝사랑 상대도 있고, 나를 좋아해주는 여자도 있으며, 친구들도 생겼다. 그런데 왜 그는 새벽 1시 59분에 일어나서 자기가 아는 죽은 사람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일까.   

 

이 소설은 조무래기 잡범이었던 한 사내의 위트있고 감동적이며 유쾌하고 재미있는 갱생기를 다루고 있다. 써놓고 보니 무척이나 재미없게 느껴지는 소개문구이지만, 이건 리뷰를 쓰는 나의 부족한 글솜씨 탓이지, 결코 작품이 후져서가 아니다. 이 책이 감탄스러운 것은 우선, 굉장히 참신하고 독창적인 감각의 미스테리라는 점이다. 소설은 1980년, 지미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의 대선을 앞둔 일주일 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미국의 분위기가, 조무래기 범죄자 빈스의 일생 일대의 위기와 굉장히 독창적인 방식으로 엮인다. 당시의 장기 침체된 미국 불황의 영향으로 도시 빈민들이 대거 조성되면서, 그 부정적인 영향 하에서 자라난 소년이 결국 조무래기 범죄자가 된 결과를 고찰하는 사회파 소설이냐고? 아니, (다행히도) 이건 그렇게 촌스러운 소설이 아니다.  

미디어 리뷰 중에서 '추리소설의 유연한 가능성을 입증했다'고 하는 평이 개인적으로 인상깊었고, 이 작품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찰이나 형사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대도시의 뒷골목을 외로운 이리처럼 떠도는 사설탐정이 나오는 것도 아니며, 조무래기 범죄자가 도시 밑바닥에서 구르면서 배신하고 배신 당하며 세상사의 비정함을 역설하는 종류의 범죄소설도 아니다. 어쩌다보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범죄자로 살아오던 사내가, 독특한 방식으로 평범한 삶의 가치와 책임감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야기인데, 거기에 민주주의라는 이상한(?) 양념이 곁들여졌다. 선거권에 대해서 고찰하는 신용카드 위조범이라니, 그리고 그걸 이야기하는 범죄 소설이라니!

엉뚱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자기 삶의 매듭을 풀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빈스와, 그를 추적하는 젊은 듀프리 형사 얘기가 나름 범죄소설 답게 위트있게 전개되다가, 독자들은 느닷없이 지미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의 머릿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게 된다. 선거일을 이틀 남긴 선거 운동 막바지 지점에서, 선거 결과를 결정적으로 판가름낼 호메이니 인질 납치 사건에 대한 대응을 거듭 고민하고 마침내 결정하는 카터와, 정력적이고 유쾌한 농담으로 참모진들을 웃기며 자신에게 유리한 사태를 관망하는 레이건의 묘사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작가는 단순한 범죄 소설 이상의 야심을 보여주고 있고, 그 시도는 꽤 신선하고 성공적이다. 이 부분은,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과거의 길과 선택되지 않은 길의 갈림길에서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작은 차원의 이야기와 보다 큰 세상의 이야기를 참신한 감각으로 겹치고 있다.       

위트와 유머, 지성이 반짝이는 소설이다. 지금까지 이 책을 총 세 번 읽었는데, 결말을 알고 읽음에도 불구하고 읽을 때마다 재미있고 신선함을 느낀다. 이는 내용이 지닌 참신함 때문만이 아니라, 특유의 속도감 있고 위트 있는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가 처음에 시나리오로 썼던 것을 소설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정말로 영상을 염두에 둔 듯이 대화나 장면 구성이 생동감 넘치고 감각적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유머감각. 긴장과 이완을 노련하게 조절하면서 동시에 책을 손에 쥔 독자들을 피식 피식 웃게 하는 유머 감각이 대단히 뛰어나고, 곳곳에 등장하는 촌철살인의 블랙 코메디적인 요소도 매력적이다. 주인공 빈스를 비롯한 캐릭터들은 개성있으며 거의 대부분이 인간적이고 사랑스럽다.

여러 모로 볼 때 상당히 완성도 높은 소설이다. 미스테리 영역에서 볼 때도 그러하며 일반 소설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미스테리 장르 특유의 재미나 장르 법칙을 기대하고 있는 독자라면 다소 실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완성도나 작품성 면에서 이 책에 흠을 잡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음.. 굳이 단점을 억지로 찾아보자면,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너무 인간적이고 착하다는 점. (심지어 마피아까지도..) 그리고, 기본적으로 화이트 칼라가 쓴 윤리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이 작품에 양념으로 등장한 정치 얘기는 결코 계몽소설처럼 촌스럽지 않고, 진보/보수를 가르는 지나치게 편협하거나 혹은 나이브한 시각도 아닌 듯 하며, 또한 이 작품이 보여주는 소박한 상식과 윤리의 세계관이 참으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기에, 이 점은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리라. 참신한 감각으로 범죄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매력적인 소설. 분명 상을 받고도 남을만한 작품이다.    

 

  

며칠전 제스 월터의 새 소설이 국내 출간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