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 의식 연구의 권위자 최준식 교수 최고의 강의
최준식 지음 / 시공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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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의 각박한 삶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기란 여간 쉽지가 않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거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 나를 이입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진정한 내가 그 어디에도 없다. 인간망의 관계 속에 휩쓸려 다니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나를 찾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책 '무의식에서 나를 찾다'는 결코 자신이 다른 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의식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최준식 교수는 그 답을 무의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인간은 왜 살고 있을까를 필두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거기에 대한 답은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원초적인 행복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올바른 답을 내놓기 어렵다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거기에는 참된 나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자아 찾기는 자기 주체의 실현이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굉장히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나'라는 존재는 나름의 주관된 의견을 가지고 있고 '나'의 생각을 올바르게 판단하며 살고 있다고 자신한다. 예를 들어 종교인, 정치인, 운동권에 소속된 사람은 자신들이 얼마나 바른 일을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갇혀 다른 이들에게 언제나 자기의 주장만이 올바르다고 말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힘 또는 강압, 강요까지도 할 수 있다.

저자는 이와 함께 부모의 역할도 말한다. 인간은 사회라는 제도를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가정'이라는 제도 안에서 사회를 경험하게 되며 그때부터 자신의 부모를 통해 세상에 대한 선입견과 더불어 부모의 사고체계를 답습하게 된다. 세뇌라는 말이 아이러니컬하지만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기 전에 자신의 습관, 사고 방식, 인간관계 등을 그들의 부모에 의해 기준잡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사회에 나가 자신보다 많이 알고 있거나 자기보다 강한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종속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집단 속에 머무는 것이 편하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기 이전에 모든 것이 결정되고 그것을 수긍만 한다면 그 삶을 편하게 느끼며 편승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어차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았던가..그런 생각들이 자기 자신을 사회 속에서 인습적인 인간으로 살게 만드는지 모른다.

 

저자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유한한 존재'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말한 '비본래성'에 주목하였다. '비본래성'이란 세상의 통념대로 휘둘려 사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 '나'라는 존재는 없다. 내 삶의 주체가 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익명의 주체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산다. 익명의 주체들은 언제 어느 때고 나를 공격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과 무관한대도 불구하고 타인의 상처를 헤집고 핡퀴고 그들을 간섭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기를 아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죽음을 제대로 직시할 때 내가 누구인지 어떤 게 진정한 삶이었는지 신은 누구인지와 같은 문제를 진지하게 맞이한다고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정한 주체의 삶이란 언젠가는 죽지만 그 죽음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하며 죽음이 오기 전에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진정한 삶에 대한 성찰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듣고 산다. 내가 잠시라도 괴롭거나 불행하다 느낄 때면 주변에서 듣는 말이기도 하다. 말이 쉽지 어떻게 해야할 지 난감할 때가 많다. 오히려 직면한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히기 보다는 돌아가는 편이 많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마음을 열고 좋은 답을 찾을 수 있는 지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인간은 자유를 희구하지만 사실은 자유로부터 도망치려한다는 것이다. 자유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 자유의 책임을 스스로 지는게 힘든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얻게 되는 집단의 힘과 권력을 무자비하게 이용한다. 그들은 누군가 책임져 줄 사람이 뒤에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일말의 후회나 죄스런 감정조차도 갖지 않는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인들이나 2차 세계대전에 패하고도 전쟁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은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여놓고 있다. 그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는 안중에 없고 오로지 상부에서 지시받은 것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지키느냐만이 중요한 것이다.

이를 보면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세계관, 공동 의식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한 무리들에 속하면서 그것들이 마치 자신의 참된 주관인냥 행세한다. 저자는 이런 것들이 모두 집단 최면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오로지 커다란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생각은 그것들에 맞춰 움직일 뿐이다. 순간 애국심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국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건 애국심이다. 국가는 개개인의 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라는 집단에 소속된 사명감을 가진 인간만이 존재하며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다. 애국심이라는 명분으로 만행하는 책 속의 갖가지 사건들을 들여다보면서 도대체 그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이 든다.

사회심리학자 애쉬의 실험에서 보다시피 정답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답을 말하는 그룹이 등장하면 그 사람들의 답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는대도 불구하고 자신의 답을 포기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있다. 다수의 의견에 묻혀 소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이런 사례에서도 충분히 나타난다. 그는 구원파 같은 사이비 종교, 중세시대의 마녀 사냥같은 모순된 집단이 추구하는 바를 한 인간이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얼마나 자신의 주체성이 쉽게 무너지는지도 알려준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예를 들기도 하는데 톰 행크스가 열연한 주인공 검프는 지능이 낮은 사람이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가 뛰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는 모습을 설명해준다. 주인공 검프는 그냥 뛰는 것인데 사람들은 마치 그가 어떤 의미를 두고 뛰는 것인냥 한다. 몇 년씩 뛰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그를 따라하기 바쁘다. 그런 그가 뜀뛰기를 그만두자 같이 뛰는 의미를 두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흩어진다. 남이 하니 따라했는데 그 주체가 없어지니 자신들도 더 이상 뛰는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진짜 나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인본주의 심리학에 대한 설명도 하고 있다. 심리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프로이트가 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연구는 바로 '무의식'이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은 1차적인 학설이지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무의식의 발현을 성욕에서 출발했다. 이전의 계몽주의자들이 말한 이성적 인간과는 상반된 견해로 인간은 이 무의식이 억압을 받게 되면 정신병으로 발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환자들을 상대로 진행되었기에 모든 인간에게 대입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인 매슬로는 이런 문제들을 확장시켜 인간의 욕구가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생리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소속에 대한 욕구, 자기존중에 대한 욕구, 자아실현 욕구 더 나아가 자아초월욕구 등으로 단계를 나눠 보여준다. 이 단계들은 어느 하나라도 월단할 수 없고 하나하나 실현해 나가면서 도약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다.

참된 자아가 자기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왜'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진정 나 스스로 좋아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장자의 이야기 중 신발이나 허리띠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그것들이 나에게 꼭 맞으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편하지만 꼭 맞지 않으면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즐거워 하는 것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주체성을 회복하는 순간이지만 자기를 계속 의식한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타자로부터 자꾸만 침범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를 찾기 위해 무의식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 첫번째로 국민교육헌장의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처럼 우리 각자는 해야할 일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아실현이란 이런 자신의 잠재 가능성을 실현하여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을 해야하며 그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두번째는 의식적이지 않더라도 무의식은 그 자신의 사명, 소명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자아 실현이 안된 아이의 경우 부모의 필터링을 거쳐 아이에게 각인되어 버리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그 가치관이 바뀌기는 어렵다. 사고 체계가 후인습적인 교육체계에 의해 틀이 굳어져 버리는 것이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하지 않았던가..진정 우리의 내면,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떤 삶이 좋은 것인지 그것이 행복한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의 사유보다 무의식의 사유가 크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의식의 사유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문제는 다르다. 저자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로 무의식의 깊이를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성욕의 근간인 무의식 이론을 확장시킨 칼 융의 이론처럼 무의식은 인류 지혜의 보고이자 원천으로 본다. 음양의 조화처럼 무의식의 발현도 의식의 발현과 마찬가지로 해석 될 수 있으며 인간 의식의 심층에는 대극을 합일하려는 기운이 있다고 하였다. 융의 해석처럼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다. 현실 세계에서 해석되지 못하는 무의식은 지혜의 창고이기 때문에 꿈에 대한 해석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를 만나는 방법으로 저자는 최면을 이야기한다. TV쇼 등을 통해 우리는 종종 최면을 접하게 된다. 그런 의식들을 통해 만나다 보니 최면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한국에 비해 미국 의학계는 최면을 의술로 인정한다고 한다. 프로이트도 최면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의 최면법은 권위적이었고 환자와 상생하는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하게 된 치료법은 자유연상법이다. 그것은 떠오르는대로 이야기하는 도중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말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욕망이나 현재의 문제라는 것이다. 최면법은 권위적이었던 프로이트가 최면을 배척하게 되면서 연구가 진전되지 않다가 1960년대 이르러 재조명 받게 되었고 점차 진보하여 다양한 의료 행위와 범죄조사 또는 스포츠, 입시 등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최면에 대한 다양한 오해들도 많은데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하는데 일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최면의 역사와 함께 최면의 진행 방법, 그리고 최면 현장 예시 등을 소개하고 있어 무의식을 만날 수 있는 방법으로 최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무의식은 정말 깊이를 알 수 없다. 어떤 세계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세계를 통해 진정한 참된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인 듯하다. 세상에 휩쓸려 나라는 존재를 잃고 살아가기 보다는 주체적인 삶을 살다 가는 것이 내가 바라는 일이지 않을까? 우리가 좀 더 지켜보고 연구해야 할 숙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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