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생 1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착수 ㅣ 미생 1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미생: 나, 그리고 아빠를 위한 응원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쉼표를 찍고자 휴학을 했다. 휴학생활의 대외적인 이유는 교환학생을 가기 위한 토플 성적 준비였다. 요즘은 이력서에 글로벌 경험도 써야 하니까, 그러는 게 좋겠지. 군대와 대학교 생활을 쉴 틈 없이 달린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지금까지 일을 하고 계시는 아빠의 조언이 핑계에 도움이 되었다.
나는 부모님의 온실 안에서 자라면서도, 아빠처럼 재미없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도 아빠의 휴대전화에는 시시때때로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 가족보다는 회사가 중심인 삶,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처리하는 사무직의 삶.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는 부모님의 일터에 대해서,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서 조사해오라는 숙제를 내주지만 그 숙제는 이제야, 내 대신 윤태호 작가의 미생이 해주었다.
바둑에 어린 날을 모두 바친 장그래는 프로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후견인 덕분에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상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한다. 오로지 바둑이 중심이 되었던 생활 때문에 장그래는 고졸에 컴퓨터도 다루지 못한다. 유일한 특기인 바둑으로, 원 인터내셔널의 수를 읽어가고 또 한 수를 두며 회사생활에 스며든다. 사회생활이란 말대로 회사를 다니는 일은 녹록치가 않다. 엘리트인 안영이, 현장을 중시하는 한석율 등의 동기와 김대리, 오차장 등의 상사와 소통하며 장그래는 ‘상사맨’이 되어간다.
나는 바둑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한 회가 시작할 때마다 그려져 있는 수를 읽을 수가 없다. 지금은 그저 대단한 대국을 따라갈 뿐이다. 미생이 끝난 후에나 나는 복기하고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직 인턴으로라도 사회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는, 미생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보다는 장그래가 마주치는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하나하나 배우려고 노력했다. 안영이가 되면 좋겠지만, 서툰 장그래가 지금 그리고 미래의 내 모습 같아서.
그리고 컷과 컷의 중간마다 아빠가 떠올랐다. 미생에서도 직장인의 삶은 하루하루가 진짜 전쟁터처럼 그려지지만, 우리 아빠의 하루도 그렇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에도 실탄을 준비해야 한다. 쉰이 넘어서 토익스피킹 레벨6을 받아야 한다는 회사의 말에 정말로 아침식사에 코피를 흘릴 정도로 공부하는 아빠의 모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오차장과 같았다. 팀원들이 더 쉽게 일할 수 있도록 인사 배치를 위해 다른 팀과 협상을 하기도 하고, 자기가 일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침 일찍 회사를 가는 아빠의 모습. 지금까지는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일을 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취업 준비생이 되면서 그리고 미생을 보면서 아빠는 자아실현을 회사생활에서 하고 계셨구나, 생각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역사책을 가지고 있다. 원 인터내셔널의 인턴시험에서 간부들이 한석율을 보고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렸듯, 비슷한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빠의 동료 분들도 모두 모험이 담긴 두꺼운 기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윤태호 작가의 전작인 이끼와, 그의 인터뷰를 찾아보고서 작가가 만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세상’이구나 느꼈다. 지금 미생은 단행본으로 4권까지 나왔지만, 인터넷에서는 계속 다음 이야기가 연재되고 있다. 장그래가 뛰어다니는 현장과 사무실이 지금까지 세상의 축소판이었다면, 앞으로는 세상과 원 인터내셔널의 연관과 또 그 고리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려지기를 기대한다. 내가 미생을 아빠와 나의 응원가로 여겼듯, 윤태호 작가는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응원가를 불러주고 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