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리데기'를 읽었다.

새삼 작가 확성영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손님'도 읽다 말았고 그렇게 치면 그의 책을 제대로 읽은게 이번에 처음인 셈이라지만..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하나의 이야기(줄기)속에 담을 수 있다니.. 조감도를 펼쳐 놓은 듯 그렇게 세계를 보고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렇게 느끼고 깜짝 놀라 잠시 눈을 떼고 생각했던게 어느 부분이었더라- 압둘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의 손자 알리를 만나고, 아, 아니면 바리가 에밀리 부인의 발을 맛사지 할 때 봤던 남아프리카의 풍경 때문이었나.. 아무튼 바리 이야기를 소설로 잘 끌어나가다가 종교애기도 하고, 남아프리카의 원주민들 모습도 꿈 속에서 제법 생생하게 그러나 공격적이지 않게 그려넣은 그 솜씨, 대범함이라니.. 직접적이진 않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면 그에 대한 내 생각이'찌릿'하고 섰다.

언젠가 한 년 정도는 런던에서 살아보고 싶다. 젊을 때. 아, 바리는, 소설속의 바리는 정말 나랑 비슷한 나이겠구나. 소설속 '북선'의 모습이 마치 까마득 옛날인 것 처럼만 느껴져서 자꾸 아프간이니 이라크, 런던 테러 사건이 나오는데 깜짝깜짝 놀랐다. 이건 작가의 의도일까 아니면 내 무지함 혹은 편견의 반증일까..

알마티에 있으면서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우즈벡 여행을 할 때 이스마일 사마니 묘 등을 둘러보며 가졌던 의문들은 뒤늦게 해결됐고, 한국에 와서 아프간 인질 사건을 보면서 그때 알마티에서의 종교적인 분위기들이 떠올랐다. 소설속 바리의 종교관은 말하자면 cool하다. 무슬림 가족과 한 가족이 되고, 라마단 등 그들의 관습을 함께한다. 할머니가 말한 하늘님이나 그들의 알라 신이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아 지구가 조용할 날 없이 자꾸 싸우지만 아주 간단하게 그건 우리가 쌀밥을 먹고 그들이 차파티를 먹는 것과 같다고 해도 될 것이다. 

참, 그리고 소설속에 드러나는 민족들의 특성, 언어같은 것들이 파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이나 같은 이슬람권 국가로 말이나 풍습이 비슷하다고 할 때, 그런 것들에 대한 (난, 차이등의)묘사가 너무 사실과 같아서 나는 반가움을 느끼며 동시에 이 작가의 노력이며 열정, 그냥 황구라가 아니구나 하는 진실성을 느낄 수 있었다.

앞에 쓴 것 처럼 에밀리 부인의 남아프리카의 기억, 바리의 고향 북선, 탈북자, 조선족, 한족들이 사는 국경지대의 중국, 알리와 할아버지가 믿는 이슬람 교와 그러한 타지인들의 런던 살이(런던 중심가의 얘기는 빠져있다), 꿈을 좇아 혹은 고향에서 떠밀려 한 달 배 길로 낯선 도시에 도착한 이들,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삶, 샹 언니와 아기 홀리야 순이를 통한 용서(엄밀히 말하면 이 단어는 본 기억이 없지만.. '미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바리, 그녀의 할머니, 칠성이, 발을 만지고 사람들의 인생을 읽을 수 있는 바리의 능력, 이승의 지옥과 저승의 지옥(지옥은 없다고 했던가..), 어디서나 힘든 혼들, 바리공주 이야기와 생명수..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소설속에 있다. 바리는 서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홀리야 순이의 목소리로 바다의 원혼들에게 대답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생명수를 구했다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건 아니다. 세상을 구해낼 생명의 물이 있다면, 그걸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할 뿐.. 근데 조금 전에 그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압둘 할아버지가 말하듯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리고 샹 언니의 죽음을 들었을 때 바리가 흘리던 눈물.. (용서의)눈물이 어쩌면 생명수 일 수도 있지 않을까(상투적으로 말하기는 싫지만..). 어쨌든 그럼 생명수를 찾아야 할까,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이 삶을 살아나야는 걸까.

 

음.. 관타나모 수용소와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전쟁의 두려음, 뉴욕과 런던의 테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쟁 그리고 파키스탄과 인도, 북선과 남선의 분쟁. 정말 파키스탄과 인도가 그렇게 된건 영국 때문이고 북선과 남선이 이렇게 된건 미국 이 나쁜 새끼들 때문일까. 그렇지 뭐.(한반도 문제에 대해선 당연히 미국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으면서 인도-파키스탄 문제에 대해 머뭇거리는 나를 본다. 이건 뭐.. 국제관계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재 보자는 건가.. 그럼 한반도 문제는 감정적으로 보고있다는 건가? 그냥 뭘 모르는 거지. 진실성도 없고-파키스탄과 인도분쟁에 대해) 내가 언젠가 이것과 조금 다른 답을 내 놓을 수 있게 될까. 더 통찰력 있고 깊이 있고 지식이 많아지면 답은 다를까. 

어쨌거나 나는 이 소설에서 종교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참 맘에 든다. 바리데기의 생명수 보담도.. 바리는 샤먼이고 그녀의 할머니가 그랬고 아버지는 미신이라고 질색했지만 어쨌거나 바리는 그 능력으로 할머니를 만나가매 살아 올 수 있었던 거 아닌가(그러고 보면 직접적으로 그녀의능력이 그녀를 살렸다거나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홀리야 순이를 잃은 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날 수 있었고 발 맛사지로 살 길을 찾았으니까). 런던에는 무슬림인 알리와 압둘 할아버지 리즈에 그들의  가족들이 있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고향에 따라 불교, 도교 그리고 교회를 다니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를 위해 음식을 하고(서로의 음식을 이해한다는 건 아주 중요하다). 함께 즐기고(결혼식), 서로를 굳이 이해하거나 설득시키지 않고도! 잘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뭐가 그리 어려울 까. 사람들은 왜 자꾸 다른 이를 설득해야만 한다고 믿는 걸까. 그게 그들의 믿음인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