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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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먼저 읽었다. 그 저서에 대한 후기를 찬양 일색으로 어느 카페에 올린 적이 있다. 찬양 일색이 거슬렸는지, 그가 왜 자살했는지도 책에 나오냐는 댓글이 달렸다. 빅터 프랭클은 자살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의 다른 생존자 프리모 레비와 헷갈리신 것 같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 이후로 내게는 다른 물음이 떠올랐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빅터 프랭클과 프리모 레비. 왜 누구는 살았고, 누구는 끝내 자살했는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프리모 레비가 죽기 1년 전에 쓴 마지막 저서이다. 이 책을 읽으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관심사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 그들의 차이이다.

둘 다 수용소에서 꾸는 꿈에 대해 서술한다.

프리모 레비는 포로들의 악몽을 이야기한다.

희한하게도, 이와 똑같은 생각("우리가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을 거야")이 한밤의 꿈의 형태로 포로들의 절망의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p.10,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빅터 프랭클은 다른 꿈을 언급한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p.65, <죽음의 수용소에서>)

교양이 라거(강제수용소)에서 도움이 되었을까? 육체노동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데 둘 다 동의하고 있다. 노동 이외에는 어땠을까?

프리모 레비.

날카로운 굴욕감과 박탈감, 바로 그 엔트뷔어디궁(비하), 곧 잃어버린 존엄에 괴로워했다. (p.155,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빅터 프랭클.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p.75,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런 관점의 차이였을까? 실마리를 잡아가는 느낌이었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라는 심리치료 이론을 정립했다. 그것이 고난과 생존에 대한 그의 의미가 되었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을 자신의 생존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다.

신앙심이 깊은 친구는 내가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증언을 했다. 그리고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매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아직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증언이 생존의 특권을, 그리고 큰 문제없이 여러 해를 사는 특권을 내게 가져다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힌다. 왜냐하면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p.98,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그는 "쓸데없는 폭력"이라는 장에서 라거에서 있었던 폭력을 묘사한다.

사람들 앞에서 용변을 볼 수밖에 없게 하거나, 다른 사람 앞에서 벌거벗게 하는 것. 숟가락을 주지 않아 죽을 먹을 때 개처럼 핥아먹었던 기억. 죽어가는 사람도 셈을 위해 참여해야 했던 점호. 도살될 운명의 짐승이나 노예와 같은 처지라는 것을 각인시켜주는 문신. 고통만이 의미였던 노동(나치즘에게 노동은 고귀한 것이므로). 유해에까지 가해졌던 폭력(머리카락은 섬유로, 타고남은 인간의 재는 흙이나 비료로 쓰였다).

이것이 쓸데없었나? 아니, 목적이 있었다. 한 인터뷰에서 어차피 다 죽일 건데, 굴욕감을 주고 잔혹행위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냐는 질문에, 트레블링카(폴란드에 있었던 강제수용소) 전 사령관 프란츠 슈탕글은 답했다.

"실질적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고 있었던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다른 말로 하자면 희생자는 죽기 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되어야 했다. 죽이는 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말이다. (p.152,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런 끔찍한 일들을 저지른 가해자. 그러나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균적 인간이었고,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었다.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p.251,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자신을 포함한 생환자들에 대해서도 성찰한다.

라거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세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나는 물론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p.97,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후에는 히틀러에 동조했거나 침묵했던 독일인들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직시하지 못하고 히틀러의 탓으로 돌렸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매번 증언했다. 그것은 고통 받았던 기억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지 짐작하는 것은 내 능력을 한참 벗어난다. 그의 삶의 의미는 증언. 그 증언을 하기 위해 그는 기억해야 했고, 그 기억으로 인해 계속 고통 받았다.

더 나아가 그는 그 기억에 거짓이 있지는 않은지 계속해서 타협 없는 성찰을 했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여야 했는지... 여기에 다다르니 그 무게를 감당한 그가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것이 고통이 되었다. 타협 없는 성찰을 이룩한 본보기가 있다.

인정할 때다. 처음에 내가 했던 질문.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빅터 프랭클과 프리모 레비. 왜 누구는 살았고, 누구는 끝내 자살했는가. 이 물음은 나의 무지다. 이제 답이 필요 없어졌다. 타협 없는 성찰을 한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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