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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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세계에 무던히도 집착하게 되었던 그때가. 돌이켜서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아마 오래된 이야기 일 수도 있고, 아주 짧은 어느 시간 사이의 접점 혹은 지점일 수도 있다. 완연한 가을날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래서 누군가들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소리 내어 부르기를 좋아하는 지금처럼, 고요한 秋季의 어느 한가로운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확한 시간이란 것도, 경계라는 것도 없다. 애시 당초 이것에 한해서만큼은 그 시작을 가늠하기란 무의미한 소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느 시점부터 계속 이어져 온 하루키라는 작가의 세계와의 소통, 그리고 내안에 잉태되는 무수히 많은 감상의 연결고리들과 질문들- 그것이 중요하다. 동기든 시작이든 하는 것들 마저 모조리 다 잊혀지고, 죄다 침닉의 때를 맞이한다 하더라도, 부유하는 것, 은은한 수면 위로 제 몸 하나 온전히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하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고, 그의 세계와 조우하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 이 간단하고 유쾌한 사실, 그뿐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문학적인 성향이 짙은, 그래서 대단히 아름답다거나 심미적인 깊이가 느껴지는 그런 종;種의 글이 아니다. 치밀한 서사적 구성이라든가 다양한 등장인물 간의 갈등이라든가 하는 소위 ‘소설’이라는 문학의 한 갈래를 기대했던 누군가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음을 먼저 전하고 싶은 바이다. 이 책은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다. 여기에는 ‘하루키’가 소설가로써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과 그 속에서 현재까지(앞으로도 지속될) 이어져오는 ‘달리기’라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전 생애에 걸친 다양한 ‘고찰’이 담겨 있다. 어지럽지 않고 장황하지 않은 간결한 하루키 고유의 필체가 돋보인다. 그래서 흡사 일기를 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쉬운데,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쉬운 글’의 하나로 명명하고 싶다. 2005년 8월부터 2006년 10월까지의 달리기에 관한 개인적인 기록과 그 속에서 그가 느낀 다양한 생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정말 일기를 보는 듯하다.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가 살아왔던 여정의 체취가 여기저기에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30여년 가까이 작가라는 삶을 살아오면서, 
‘러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슴에 새긴 채 하루키는 매일 매일을 쉼 없이 달려왔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속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128쪽)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 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26쪽)

20대의 마지막, 그간 경영하던 Jazz-Bar를 뒤로하고 작가의 길에 처음으로 들어서면서 건강상의 개선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그는 살아감의 한 방법으로서, 스스로를 비우고 다시 채워가는 수단으로서 달리기를 계속해 나간다. 하루키에게 있어서 글쓰기와 달리기는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그래서 두 가지 모두를 해나가야만 하는 일종의 과업이자 숙명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무조건적인 의무나 강압적인 요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라톤은 인생으로, 삶은 글 쓰는 일상으로, 그것은 다시 쉼 없이 달린다는 행위로 귀결되며 무한히 뻗어 나아간다.

“하루를 통틀어 가장 활동하기 좋은 시간대라는 것은,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 그것은 이른 아침의 몇 시간이다. 그 시간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중요한 일을 끝내버린다. 그 뒤의 시간은 운동을 하거나 잡무를 처리하거나 그다지 집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들을 처리해 나간다. 해가 지면 느긋하게 지내며 더 이상 일은 하지 않는다.”(64-65쪽)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의문 하나는 과연 하루키의 삶을 독자가 수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그는 결코 달리기를 권하려하거나 그것을 통한 자신의 삶의 유용함이나 하는 것들을 알리려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작가의 집필 의도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책 속에서 발견되는 하루키의 삶이란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며 또한 달리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건데 독자는 분명 쉽사리 이행할 수 없는 그의 삶에 대한 대단한 아쉬움과 실망감에 젖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어찌 보면 특수한 상황 속에서, 오로지 ‘하루키’이기 때문에 가능한 삶이므로 독자는 범접하기 힘든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을 가진 채 책 읽기를 그치게 될지도 모른다. 진정한 본질은 행위를 표방한 내부에 존재하는 데 행여나 정적인 책읽기에 그쳐 겉만 보고 감상을 갖게 됨을, 
그것을 나는 경계한다.

하나의 작품을 읽고 또 다른 작품에 닿기 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느냐를 따져본다면, 나는 매우 느린 책읽기를 하는 독자임에 틀림없다. 그 기복이 너무나도 현저하여 한 번 책을 잡았다하면 몇 번이고 다시 보기 일쑤, 페이지 한 장 사이를 좀처럼 떠나지 않고 머무를 때가 많다. 마치 천천히 거리를 걷는 넝마주이처럼, 계속된 외길을 걷는 여행객처럼, 나는 아무런 사심 없이 책을 읽고 자연스레 찾아드는 감정과 마주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는 묘하게 닮아 있는 작가의 달리기와 나의 책읽기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점점 보다 극적인 세계와의 소통은 가능해졌고 나는 더 큰 의미를 내 안에 새겨놓을 수 있었다. 하나 둘 씩 희미해져 가던 풍경은 환하게 번져가고 하얀 실루엣으로 덮여 있던 두 눈은 어느새 쾌청한 가을날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하루키가 좋다. 물론 그의 책도, 그의 삶도.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동경을 품는 어리석은 작자가 아니다.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나는 금세 묻어두기로 했다. 식어버린 가슴에 그 속에 담긴 열정의 꽃에 물을 주고, 멀어져가는 황혼을 내 안에 오래도록 담아 둘 수 있도록,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마법을 하루키는 또 한번 내게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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