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공식 한국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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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0년대 말에 <오래된 미래>의 초판을 읽을 때 한 순간 나는 어린 시절로 추억의 여행을 하는 듯했다. 초판은 녹색평론에서 갱지같은 재생지에 인쇄한 책이라 가볍게 느껴져서 그 느낌마져 라다크 스럽다고 우스게 소리를 하면서 읽었다.  이번에 10여년이 지난 뒤에 개정판을 보면서 또 다시 어린시절을 떠올리면서 희미해져가는 옛 기억을 다시 새겨 보았다. 이렇듯 이 책은 삽시간에 향수로 이끄는 마법을 가졌다.


  그렇다. 라다크는 희말라야 아래에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도 한국의 라다크를 가지고 있었다. 농업중심의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우리의 시골 생활도 분명 또다른 라다크였다.  한 집에 대가족이 살아가면서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각자 자기의 역할이 있었고 가족, 이웃들과 함게 어울렸던 삶의 조각들이 농촌중심의 문화권에서는 삶의 전체일 수 밖에 없었다. 그시절 농촌에 뿌리를 둔 사람들은 60-70년대 개발의 광풍 속에 밀려난 임금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의 처참한 삶을 인식하지도 못했으니까. 그 생활이 그들이 보는 세상의 전부이고 그것 자체가 그들의 우주였다. 그땐 나도 분명히 행복했었고, 지금도 그시절이 그립고 행복했다고 느낀다.


  집안에서 보면 남자어른들은 농사일, 마을 대소사를 주관 또는 참여하는 일, 여자 어른들은 집안일, 길쌈하기, 밭매기,동네 대소사일에 품앗이 하기, 아이들은 물긷기, 마당의 풀뽑기, 장독대에서 간장,된장,고추장 퍼오기, 아기보기,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줄 물이나 점심밥 나르기, 곡식이 익을무렵엔 새쫒기, 소꼴베기, 소먹이기...고된 일과이기는 하지만 각자가 자기의 역할이 있었던 우리네 생활이었다. 그 틈을 타서 곡식서리, 과일서리, 각종 놀이도 하면서 땅힘으로 자라던 우리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아이들을 격려하고 야단치면서 키워내는 사회적 교육의 장이었다.

  이런 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 삶이 고달프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살아가는 건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라고 왜 힘들지 않았으며, 왜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까. 그렇다고 우리가 그사람들의 삶이 행복했다 또는 행복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하는건 중요한 게 아니다.


  ‘오래된 미래’는  농촌시절의 '향수'만 자극하는 목가적 에세이가 아니다. 저자는 16년이 넘는 시간을 라다크인들과 함께 살면서 '미래'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을 발견해낸다. 자본의 유입과 도시의 발전이 함께 가져온 전통의 파괴와 환경의 오염, 인간 공동체의 해체를 피부로 느끼면서 '전통'속에 담겨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따스한 알맹이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공동의 노동을 통한 유대, 화낼 줄 모르는 배려, 땅과 함께하는 교육, 낭비없는 절제, 수천년을 어어져온 땅과 산 그리고 가축을 다스리는 지혜 등이 그것이다.

저자가 이런 전통 공동체에서 찾고자 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 삶을 대하는 자세에서 건강한 관계를 찾고자 했고 그것을 통해 서구사회 또는 미래사회가 나아갈 대안을 찾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단순한 반개발, 전통문화 보존의 차원만을 말하는게 아니고, 또 '과거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역설은 오래된 과거 즉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삶의방식, 자연관, 오랜 삶에서 오는 지혜 가 미래의 혜안과 만났을 때, 비로소 분열과 부패, 전쟁과 파괴를 넘어서는 '현재'를 구성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담고 있다. 저자가 부제로 'Learning from Ladakh’( 라다크로부터 배우기)라고 한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농업을 중심으로한 사회의 생활방식과 자본주의 그것도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는 오늘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비교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하지 않다. 그리고 오랜 세월 경험을 통해 축적한 결과물에 대해 얇팍한 사회적읽기는 더군다나 송구스런 일이다. 나는 이책에서 개발이냐, 보존이냐를 논하기보다는 내가 경험해 왔던 전통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인간다운 삶, 자연과 가축에 대한 지혜를 확인하고 싶다. 또한 동시대 사람들과의 나눔과 상생뿐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도 염두에 두는 라다크사람들의 통큰 배려와 깊은 생각의 뿌리까지 드러내 주는 저자의 깊은 통찰은 감명이 깊었다. 

 

  공동체의 삶이 우물안의 개구리의 삶이면 어떠랴, 누구나 지멋에 사는게 사람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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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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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건 수사 중에 입은 총상으로 휴직 중에 있는 혼마 형사는 사별한 부인의 먼 친척인 구리자카 가즈야로부터 실종된 약혼녀 세키네 쇼코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세키네 쇼코는 은행원인 가즈야의 약혼녀이다. 가즈야가 그녀에게 신용카드를 만들어 주려다가 그녀가 개인파산을 신청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그녀는 행방을 감추었다. 혼마 형사는 그녀의 행방을 쫒다가 세키네 쇼코가 신죠 교코라는 여인임을 알게 되고, 그녀가 왜 세키네 쇼코로 살게 됬는지를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단지 남들처럼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살기 위해 타인의 인생(세키네 쇼코)을 도둑질 할 수 밖에 없는 사회,경제적인 배경을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혼마 형사가 실종된 세키네 쇼코를 찾기 위해 과거를 추적하던 중 그녀가 개인파산신청시 도움을 청했던 미조구치 변호사를 만난다. 미조구치 변호사의 입을 통해 ‘화차’를 관통하는 사건의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  쇼코양이 파산 신청을 한 일이 반드시 그녀만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현대사회에서 카드빚으로인한 파산은 어떤 의미에서는 공해와 다름이 없는 것이죠.”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크레디트 즉 할부라는 말 대신 ‘신용’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 1960년이죠, 마루이 백화정ㅁ의 빨간 카드를 시작으로 1960년에는 다이너스 카드가 탄생했습니다. 다이너스는 가입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회원의 수준이 높아서 신뢰받는 카드 중의 하나죠... 1960년은 우리 나라로서는 고도성장으로 들어가는 첫해라고 할 수 있죠. 그만큼 나라가 부유해지기 시작하던 시대였습니다. 즉 카드는 필연적인 요구로 생겨났고, 이런 민간금융 없이는 경제 발전이 성립되지도 않고요...

   제가 민간금융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정확히 말하면 소비자신용이라고 합니다. 소비자신용은 크게 둘로 나뉘어지죠, 하나가 신용판매 인데 카드를 사용해서 하는 쇼핑을 말하고 또 하나는 ‘소비자금융’이라고고 하는데 여기에는 정기예금이나, 우편예금을 담보로 한 대출과 소비자대출 다시 말해서 고리대금이나 신용카드 현금 인출이 포함됩니다....“ 소비자 경제는 이미 우리나라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의 하나입니다.”


  “월급이 20만엔인 사람이 어떻게 3,000만엔의 빚을 만들 수가 있는지,누가 빌려주었으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카드 한 장이면 쇼핑이든 여행이든 모든게 가능하죠. 그리고 카드 수가 점점  늘어나면 가능해요. 일반회사에 근무하면 자격심사에 걸릴 일도 없고, 백화점이나 은행 어디에서나 카드를 만들라는 권유를 받게되고, 현금인출에도 이용하게 되는 거죠. 신용판매 뿐만 아니라 소비장융자, 현금서비스에도 손을 뻗게 된다는 소립니다.....잠간 방심하는 사이에 한도를 넘어서고 카드 돌려막기로 점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카드로는 더 이상 막을 길이 없게되지요. 그다음은 사채에 눈을 돌리고, 거기서도 같은 경로를 반복하게 되죠.... 부지런하고 마음 약한 사람들은 도망을 간다거나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요. djEjgr 해서든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점점 나락으로떨어지는 겁니다. ... 소비자신용이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의 하나인 건 분명하지만 매년 몇 만명이나 되는 사람 기둥을 세우는 바보같은 짓은 이제 좀 그만두었으면 하는 거에요.  온 가족이 자살하고, 야반도주를 하고, 범죄를 저질러 다른 사람가지 말려들게 하는 비극을 일으킬 정도로 궁지에 몰린 다중채무자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허공을 떠도는 유령입니다...”

  

  책 머리에 ‘화차’란 ‘생전에 악행을 한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라고 설명되어있다. 망자는 자신을 지옥으로 옮기려는 화차에서 내리려고 온갖 발버둥을 칠 것이다. 내리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버리고 마는 화차야 말로 지옥보다 더 무서운 것일 수 밖에 없다.

   세키네 쇼코는 과중한 채무로 인해 무자비한 채권추심자들에게 쫒겨 가족은 흩어지고, 행복은 산산조각이 난채 고향을 떠나 도시로 떠밀려 간다. 운명의 수레에서 한 번은 내렸는데 세키네 쇼코의 인생을 훔친 신조 교코는 그것을 알 지 못한 채 그  불수레에 올라타고 말았다.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바꿔서 완벽하게 숨어버리고 싶은 여인(신조 교코)이 무지개같은 아름다운 약속 뒤에 악령처럼 따라 다니는 과거(다중채무와 살인)로부터 빠져나오려고 갖은 애를 다 쓰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작가는 신죠 교코의 과거 행적을 추적해 가면서 신용카드, 부동산 담보대출,현금서비스, 사채로 이어지는 악의 순환의 고리를 통해 서민을 위한 완벽한 채무노예 시스템, 즉, 소득수준을 뛰어 넘어 신용을 제공하는 ‘약탈적금융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사회가 채무자의 윤리만 강조하여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풍조에 대해  작가는 미조구치 변호사의 입을 통해 신용공여기관이 대책없이 신용을 무한 제공하여  소비자를 화차로 밀어 넣는 채권자의 윤리와 책임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 시중 은행이며 카드업계가 학생에게 신용카드를 발급한 지 20년째가 되는데요. 이 20년간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서 신용카드의 올바른 사용법을 지도해 준 적이 있습니까? 일선 고등학교에서는 졸업 전 여학생들에게 화장법을 가르치곤 하던데 오히려 사회에 진출하기 전 신용카드나 돈의 올바른 사용법과 기초지식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혼마 씨는 지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군요.  아 그래. 소비자신용의 세계가 구조상의 문제. 금리의 문제, 교육의 부재 등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건 잘 알았어. 하지만 갚지도못할 돈을 빌려 궁지에 몰리는 건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닐까?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나?라고 말이죠....”  “ ... 교통사고를 내는 것은 그 운전자한테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교통사고에서도 운전자의 책임론만을 운운하는 형편없는 행정이나, 안전성보다도 경제성만을 내세워 새로운 모델만 내놓고 있는 자동차 업계에다 냉정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일본 경제가 활황이던 1980년대부터 거품 붕괴로 일본의 경제(버블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 90년대이다. 당시 일본의 경제는 마이더스의 손과 같았다. 땅을 만지면 부동산이 뛰었고, 회사에서는 월급과 보너스가 나왔던 시절이었다. 은행에선 대출 제한선 없이 마구 퍼줬으며 그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에 열을 올리고, 대출로 레버리지 효과를 얻지 못하면 바보가 되는 시기였다. 게다가 신용카드회사는 개인의 신용상태는 아랑곳 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마구 신용카드를 발행해서 소비를 부추기던 시기였다. 일본과 동일한 경제발전 경로를 걷고 있는 우리나라 로서는 남의 얘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얘기다.

 

  “죽어줘! 제발 죽어줘. 아빠! ”  신조 교코가 도서관에서 관보를 뒤지며 행려자 사망공고를 찾으며 보였던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이다.  아버지가 쓴 불법 사채로 인해 딸은 물론 딸의 가족까지 송두리째 파괴되고 있는 현실을 만나면서 혼마 형사는 그녀를 불행한 현실로 몰아간 주범이 약탈적 금융시스템임을 알게되며, 궁지에 몰린 가엾은 영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그녀의 과거를 추적한다.   지금까지 금융권이 어떤 식으로 이득을 취하면서 소비자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겼는지, 그 결과 저소득층은 물론 중산층까지 우리 사회의 대부분이 금융의 노예가 되었음을 낱낱이 고발한다.

       

  1970년대 대학시절 주말명화 시간에 본 영화가 생각났다.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사회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살아간다. 주인공인 듯한 두 남녀가 갖은 고생 끝에 신용을 회복하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영화를 본 시기가 1975년 무렵이 아니었나 싶은데 당시엔 우리나라가 아직 신용카드 제도가 없었던 때라 신용불량자란 남의 돈을 빌려서 갚지 못했거나, 소득 범위를 넘어 소비를 한 사람이 도덕적 헤이 때문이든 경제적 파산상태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 경우라고만 생각했다. 그 러한 현상만 가지고 지나치게 과장하여 상황을 그려낸  SF영화로 생각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영화는 ‘화차’에 비하면 행복한 결말이다. 신용불량자인 주인공 남녀가 다시 신용을 회복하여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빚의 노예’가 된 우리는 영원히 내릴 수 없는 화차에 올라타고 있어서 죽기 전에는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주인공 혼마 형사가 살인범인 신조 교코를 대면하기 전에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는 모습에서 작가는 약탈적 금융시스템의 피해자인 신조교코에게 한없는 동정과 따뜻한 연민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 작가의 세심하고도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을 물을까는 문제되지 않느다. 나는 자네를 만나면 자네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자네 혼자서 힘겹게 등에 짊어지고 왔던 이야기를. 도망 다녔던 세월 속에서 숨어 지내던 세월 속에서. 자네가 비밀리에 쌓아 왔던 이야기들을...” (201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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