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독거미
티에리 종케 지음, 조동섭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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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가운데에서도 이길 수 없는 사랑은 연민에서 시작된 사랑이라 생각한다. 이미 마음 한구석이 허물어져 그 방향을 향한 채로 시작한 감정이기도 하고, 묘하게 사람의 양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면, 최근에 본 퀴어 영화 《내가 사랑한 남자》가 있다. 수영코치 뤼카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마르탱에 질겁한다. 일단 뤼카는 함께 살고 있는 연인 리즈가 있고, 동성애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르탱은 뤼카 주변을 맴돌며 줄기차게 들이댄다. 그러던 어느 날, 뤼카는 우연히 마르탱이 에이즈 환자이며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르탱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한편 리즈는 연인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쉽지 않다. 결국 뤼카는 마르탱에게 가 버린다. 그 애는 아프잖아…. 나중에 마르탱이 사라졌을 때는 화풀이를 한답시고 리즈에게 이런 말도 한다. 너는 좋겠다? 걔가 없어져서 말이야. 리즈는 말을 잇지 못한다. 뤼카의 말에 반박하는 건 마르탱을 모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거다. 그 사람은 나 없이 안 돼, 알잖아, 너는 괜찮잖아. 너는 건강하잖아. 너는 나 없이도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나도 니가 필요하다고. 새로운 사람, 불쌍한 사람에게 가 버린 이의 귀에 남겨진 이의 절규는 들리지 않는다.


티에리 종케의 『독거미』가 그런 내용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리샤르가 패닉이 되어 이브를 껴안고 ‘내 아기, 내 아기’를 되뇔 때,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행간에 감춰진 많은 것들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보다 충격적이고, 보다 잔인한. 이브를 향한 리샤르의 감정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지만 4년이라는 시간은 그 칼날을 무디게 했다. 이브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며, 복수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리샤르. 뱅센 숲이나 불로뉴 숲에서 이브의 고통을 지켜보던 그. 이브를 만들고, 이브를 가르치고, 이브를 돌보는 리샤르는 그녀에게 미갈(독거미)이라 불린다.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이브를 고립시키기 위해 리샤르 역시 자신을 포기한다. 세상에 두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서로의 존재에 맞춰진 시계. 나만 바라보고, 내가 주는 것을 취하며, 결국 나에게 매달리는 존재. 관음하던 고통은 전이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거미줄에 잡힌 먹이를 가련히 여긴 순간부터, 조금씩 허물어지는 거미줄 위에서 제어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자신을 예감하면서, 리샤르는 결국 자신의 피조물에 굴복한다. 제어당하고, 제어하는 입장의 전복. 하지만 리샤르는 피그말리온과 같은 결과를 맞이하진 못할 것이다. 이브는 여전히 리샤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리샤르는 여전히 미친 사람이므로.


함께 한 시간동안 체득한 경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리샤르는 이브가 자신을 떠날까 봐, 이브는 리샤르가 언제 예전으로 돌아갈지 몰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서로를 구속하고 제한하면서, 서로에 한없이 매달리면서. 마치 세상에 두 사람만 남아 있는 것처럼, 서로만을 바라보면서. 파괴적인 감정은 강력한만큼 깨지기 쉽고, 그 안에 자리한 서로에 대한 연민은 다시 그 조각을 붙일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견딜 수 있는 선을 학습하고 그 언저리에서 머물, 불안한 관계. 아, 움직일수록 헤어나올 수 없는 늪처럼 깊어져만 가는 그 감정은 비틀린 사랑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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