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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찌됐건 나는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이 책이 별로였다.
지구상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다.
그래, 알고 있다.
제국주의 시절 난무하던 총과 칼은 '자본'이라는 겉모양만 달라진 모양새로
예전 같았으면 식민지로 불리웠을 개발도상국들의 모든 것을 착취하고 있다.
과거와 지금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의 부유한 나라들은 자신들이 자행하는
'범죄'에 대해 가끔씩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책'들로 인해 말이다.
제목부터가 바로 이런 것이다.
아프리카 어린이가 누더기 옷을 입고 눈물을 흘리는 표지부터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참회'의 시간이 끝나면 순식간에 눈물 콧물을 닦아내고
"어쩔 수 없어. 세상의 이치니까" 라며 다시금 자본이라는 총과 칼을 그들의 목구멍에
갖다 대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착취와 약탈의 싸이클이 돌아간다.
결국 바뀌는 건 없다.
지금은 책 한 권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었던, '담론'이 난무하던 시대가 아니다.
대의는 옛말이 되었고 담론투쟁은 이제는 술잔을 기울일 때나
낭만적인 감상에 빠져 안주거리로 삼는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전락해 버렸다.
현재 우리를 관통하는 담론은 단 하나, 바로 '시장과 자본'이다.
빈곤, 기아와 같은 세계화의 이면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은
저널리즘성에 충실한, 자본에 찌들어버린 매스미디어다.
그들에게 '진정성'이란 것이 있는가.
어떤 매체가 얼마나 더 자극적인 화면을 전달해서 더 많은 액수를 모금하고
사람들의 눈을 더 오래 잡아둘 수 있느냐가 '진정성'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그러한 행위들은 "우리는 너희들에게 이만큼 신경쓰고 있다"는 자기위안과
근본적으로는 자기네들의 국가 정책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그들을 위한다면 자극으로 점철된 충격적인 영상이 아니라
그것들을 보면서 흘리는 사람들의 눈물을 '신념'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170여 쪽에 불과한 장 지글러의 이 책은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그 어떤 매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나의 눈물은 이 책을 통해 '신념'이 됐다.
글의 서두에 표현한 내가 이 책을 읽기도 전에 가졌던 반감은 인간의 생명마저도
상업성에 초점을 맞추고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언론의 몰상식한 시각에 기인한다.
자본으로 인해 인권마저 도태된 절망적인 이 시대에
자본의 화려한 이면에 발생한 참혹한 현실마저 '자본'으로 다룬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그들의 진심이 그 순간만큼은 조금은 담겨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제도적 장치의 보완은 전무하다.
그리고 자본의 피를 뒤집어 쓴 하이에나들은 바로 다음 날이면 또다른 먹잇감을 찾아
부지런히 펜을 놀리고 셔터를 눌러대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필수조건인 '자극'을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책이라는 매체가 표현할 수 있는 '자극'의 범위는
다른 매체에 비해 매우 한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의 '매우 극단적이고 참혹해서 오히려 흥미로움을 유발할 수 있는 사례'를
원초적인 단어로 표현하며 지나치게 부각시켜 전체의 의미가 되려 잠식되는 것 같은
본질을 호도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관련 전문가에게 '자기우월성의 증명'을 '책'이라는 만인에게 공개되는 매체를 통해
자행하는, 우리가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즉 자신의 학자적 식견의 지나친 과시로 인해 대중들과의 교감이 단절되어버리는
지식인, 전문가의 고질병을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대화체 형식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그저 이야기할 뿐이다.
무엇을? 매스미디어가 외면하고 있는 굶주림의 '본질'에 대해 말이다.
그저 음지의 어둠 만을 훑어보며 그것들이 발생한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는
회피하는 그들이 놓치고 있는, 아니 의도적으로 묵인하고 있는 '본질'말이다.
웬만큼 전 세계의 기아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1980년 이후 영양실조나 저개발로 인해 실명하는 사람의 수는 매년
평균 700만 명이고, 대부분이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이들에게 규칙적으로 비타민 A를 복용시키기만 해도 그런 상태를
비약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한다.
지나친 극단성으로 인해 현대에 이르러서는 경제학계는 물론
사회학적으로도 추방된 줄 알았던 멜서스의 '자연도태설' 이론이
"하룻밤에도 배고픔에 허덕이며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들고 그러한 행동을
합리화시켜주는 기능으로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그 어떤 매체에서 들을 수 있었던가.
"캘리포니아 소 사육장인 피드롯의 절반에서 연간 소비되는
옥수수의 양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면서도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잠비아 같은 나라의 연간 필요량보다 더 크다"는 사실과
"부유한 나라들은 생산자들에게 최저가격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생산을 제한시킨다"는
인간의 생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 중요한 사실은
날마다 쏟아져나오는 신문의 귀퉁이에서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칠레 아옌데 정부와 같은 '기사꺼리가 될 만한'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면,
"부르키나파소의 토마스 상카라의 '자주관리정책'과 같은 가난한 나라의
자립적, 혁명적인 정책의 성공이 프랑스의 비위에 거슬려 그들이 조종한
친 프랑스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가난한 나라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아예 가십거리조차 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그를 슬퍼하고 애도할 기회조차 제공해 주지 않는다.
장 지글러는 말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이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점에서 "희망"을 찾는다고 말한다.
진정 그렇다. 인간에게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능력이 존재하고
이것은 세상의 많은 부분을 진보시켰다.
공감대 형성은 세력을 군집하게 만들었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내가 꿈꾸는 행복에 대한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모두를 위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힘겹게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공감의 사각지대에 놓여져 있다.
자본의 프레임 밖에 있는 '어둠'을 향해 빛을 밝혀주는 조명의 역할은
'상업성'이란 거대한 이념 아래에서 배터리가 방전된지 이미 오래다.
이런 현실 속에서 결국 우리는 프레임 속 세상의 화려함 안에서만 헤엄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는
감수성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이제는 조그만 촛불을 손에 쥐고 프레임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고 맞닥뜨릴 '진실'이
부담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일지라도
지금껏 우리의 세상이 진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떨쳐낸 용기에 있었다.
장 지글러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촛불을 쥐어주었다.
프레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은 조그맣고 얇은 이 책 자체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손에 쥐어진 작은 촛불의 희미한 불빛 그 자체가 아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느껴지는 슬픔과 흘리는 눈물이
프레임 밖 세상을 향해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해주는 '신념'으로 변한 그것,
어둠을 향해 비춘 그 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우리'의 갸냘픈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그것,
바로 우리의 행동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