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1 밀리언셀러 클럽 6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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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희망을 찾기 어려운 사회의 밑바닥에서 서로에게 근근히 의지하며 고된 벤토 공장에서의 노동을 견디는 네 명의 여자들 - 마사코, 요시에, 야요이, 쿠니코 - 은 어느날 야요이가 폭력과 억압을 일삼던 남편을 충동적으로 살해하면서 예기치 않게 살인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서스펜스 스릴러에 등장하는 소위 망가진 여자들은 퇴락한 유흥가에서 술과 웃음과 몸을 파는 이들로 흔히 그려지곤 하지만, 작가는 심야의 벤토 공장이라는 흔하지 않은 배경을 도입한다. 이는 네 명의 주인공 여자들의 마음 속에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성실함의 단면을 보여주는 신선한 설정이다 (호스테스가 되고 싶으나 외모와 다른 조건들이 따라주지 않는 쿠미코의 경우는 예외라고 볼 수 있지만). 설정 자체의 신선함은 공장 속에서 진행되는 온갖 냄새가 뒤섞이는 지겨운 단순 반복 노동의 묘사를 통해 곧 증발해버리고, 독자들은 네 여자들의 암울한 삶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들어간다.

야요이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공모에 가담한 마사코와 요시에는 놀랍도록 주도면밀하게 시체처리에 나선다. 진저리나는 일상의 수렁과 어디에서도 의미를 찾기 어려운 꽉막힌 미로와 같은 삶. 이미 남만도 못한 냉담한 가족 관계를 끊지도 잇지도 못하고 점점 심리적으로 멀어져가는 마사코와, 반대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병든 시어머니와 철부지 딸아이에게 치어 지칠대로 지친 요시에에게, 이미 선과 악의 구분은 그다지 명쾌하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는 사회가 종종 지나치게 단순한 잣대를 들이대며 요구하는 또 하나의 의미없는 경계선일 뿐이다.

한편 살인을 저지른 장본인인 야요이는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난 후, 이상할 정도로 쉽게 살인의 기억에서 멀어져간다. 일단 시체가 눈 앞에서 없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찰의 보호 감시가 느슨해지자, 야요이는 모든 일이 없었던 일처럼 느껴지면서, 오히려 남편의 시체를 유기한 마사코와 요시에가 범죄자인양 꺼려하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사람이 마음 속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이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지 잘 아는 우리들에게, 그녀의 태도와 연행의 변화는 상당히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괜찮은 구석이 없이 허영으로만 가득찬 구미코는, 살인의 한가운데 말려들어가는 과정에서 번번이 실수를 거듭한다. 이는 마사코의 용의주도함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서스펜스의 긴장감을 한껏 팽팽하기 끌어당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쉽게 저지를 수 있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그녀의 경솔함과 생각없는 행동들은 결국 살인사건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치명타가 되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작가 나츠오 키리노는 네 여자와 경찰의 대치 구도로 단순하게 그려낼 수도 있는 상황 속에, 사타케라는 어둠과 의혹에 쌓인 제 3의 인물을 배치함으로서 이야기의 깊이와 폭을 단번에 확장시킨다. 운나쁘게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그는, 마사코와 정면 대치 구도에 놓이게 된다. 키리노는 자동차 추격이나 총격전 등 시끄럽고 번잡한 눈에 보이는 활극 대신에,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으면서 조금씩 숨통을 조여오는 가슴 졸이는 접근 방식을 택한다. 사타케는 또한 마사코가 갖고 있는 독특함을 드러내는 촉매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 여자들의 성격과 심리묘사는 깊이가 있고 매우 정교하여, 독자들은 이들을 뼈와 살이 있는 숨쉬는 3차원의 인물들로 마음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반면에 사타케를 비롯하여, 마사코의 남편과 아들, 후반부에 마사코와 손을 잡으며 역시 그녀의 특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주몬지, 마사코에게 새로운 삶으로의 안내인 혹은, 새로운 문을 열기 위한 작은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하는 브라질 교포 카즈오 등, 모든 남성 캐릭터들은 다소 밋밋하고 평면적으로 그려진다. 사타케처럼 폭력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강렬한 캐릭터라 하더라도, 작가는 인물의 한 면에만 치우친 평면적인 묘사를 함으로써, 남성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것을 막고 있다. 이는 남성 심리에 대한 작가의 이해 부족이라기 보다는, 네 여자들의 삶을, 돈과 부조리와 거짓된 명예와 허영 속에서 속은 텅빈 채 굴러가는 이 사회의 언저리까지 멀찌감치 물러난, 아웃되기 직전의 여자들의 모습을 더욱 생생한 호흡으로 그려내기 위한 의도적인 대비이리라 미루어 짐작해본다. 스토리의 전개, 인물들의 움직임과 생각, 모든 것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섬세하고 날카롭게 짜여 있다. 키리노는 개인 사이의 증오와 복수에만 머무르지 않고, 근본적인 현대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소름이 끼칠만큼 통렬하게 파고든다.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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