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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단어 테러’, ‘난민’. 우린 더 이상 이 두 단어에 감정의 변화를 크게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유는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진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난민들은 아프리카와 중서부 아시아에서 발생하며, 그들은 유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테러 역시 우리나라가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다면 조금은 생각을 달리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세계적 석학 슬라보예 지젝은 이 모든 문제의 기본 바탕을 글로벌 자본주의의 결과로 발생한 계급투쟁으로 바라봅니다. 평등을 전제로 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뜬금없는 계급투쟁이라니 동의 할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젝의 말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진정 아프리카인을 돕고 난민 발생을 막고자 한다면 바로 자본주의의 개입부터 비판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다수 난민이 소위 '실패한 국가', 즉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 콩고, 에리트레아 ,,, )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공권력의 붕괴는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정치-경제의 결과이며, 리비아와 이라크처럼 많은 경우 서구가 직접 개입한 결과다. 점점 증가하고 있는 '실패한 국가'는 예상 밖의 불행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해 강행된 경제식민주의의 결과일 뿐이다.”

 

실제로 난민 수송을 통해 돈을 버는 조직이 생겼으며 엄청난 규모의 지하경제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처지는 딱하지만 난민 행렬이 교모하게 기획된 프로젝트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정도의 차이가 있다일 뿐이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작동방식은 노예양산일 뿐입니다. 그 모습은 우리 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급 6,030원에 자신의 열정을 바치고, 가방 안에 컵라면 한 개를 남겨놓고 삶을 마감한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 역시 언제든 그런 삶 속으로 뛰어 들 수 있다는 불안감은 우릴 옥죄어 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가지 반응을 취합니다. 바로 외면입니다. TV 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난민들의 모습, 지진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의 모습, IS로부터 테러를 받은 바그다드의 참상 등을 우리는 또 하나의 '타인'의 모습으로 '관찰'하며, 또 하나의 이미지로 '경험'할 뿐입니다. 나의 생각과 사고의 틀을 국가적인 분할에 가둬버립니다.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타인의 고통'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바퀴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으며, 이것을 멈추기란 공멸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니까요. 이런 문제를 지젝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얘기했을까요?

 

난민을 도우려는 자세는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동정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돕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 제발 일체의 감상일랑 떨쳐버리자. 그 감상은 대다수 난민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진다. 난민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와 같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중략)

 

두 팔을 활짝 펴고 맞아주며, 공감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대함이라는 최선(우리의 눈에 최선)은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관대함의 과시가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안겨준다는 단적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의심을 품어야 한다. 과시는 정작 요구되는 것을 애써 잊으려는 꼼수가 아닐까?”

 

이타적 덕성의 과시는 궁극적으로 이 목표의 실현을 방해한다며, 그들의 문제가 곧 나 자신의 문제임을 깨달으라는 이타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이기심의 문제인식을 요구합니다. 사실 이런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좌파 지식인들이 항상 우리에게 선언적으로 내뱉는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이다'는 말은 우리가 이 과제를 수행할 운명적(역사적 필연성)인물임을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의지할 위인은 없다는 뜻이 될 수 있으니까요.

 

명확한 방법론을 제시하진 않습니다. 거기서 오는 답답함은 책을 읽은 후 남게 되는 찌꺼기입니다. 그리고 사실 방법을 제시했다면 오히려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려서 현실감이 더 떨어졌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어떻게 문제인가를 인식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테니까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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