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불감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공동체에서 네트워크의 시대로

 


“오늘날 시대에 뒤진 것으로 간주되는 ‘공동체’나 ‘친교 집단’ 같은 구식 관념을 대신해 선택되는 이름인 ‘네트워크’의 핵심 특징은 바로 이런 일방적 종결에 대한 권리이다. 공동체와 달리 네트워크는 개인적으로 조합되고 개편되거나 해체되며, 네트워크의 유일한, 그러나 매우 변덕스러운 기초는 이것을 지속하려는 개인의 의지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월드컵 열기가 한 창이던 때, 미군이 몰던 장갑차에 깔려 두 소녀가 숨지는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월드컵광장이 아닌 또 다른 광장으로 나섰고, 촛불을 들고 시위를 했다. 광장에서 우리는 함께 ‘공동체’를 외쳤고, ‘연대’를 요구했다. 이 같은 단어들이 우리에겐 익숙했었다.


 

시간이 흘렀다.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 언제나 듣게 되는 이야기가 ‘새로운 네트워크 형성’이다. 한 번 만나 명함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나의 네트워크가 된다. 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다. ‘공동체’와 같은 말이 주는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책임감’이 크게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1년 다니엘 핑크가 쓴 「프리에이전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라는 선언 이후 역량 있는 1인 기업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과거처럼 직장인의 삶이 아닌, 직업인의 삶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핵심도 역시 ‘네트워크와 협력’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장기 프로젝트 보다는 단기 프로젝트가 많아지고 있으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재빨리 시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실험해보고 진행여부를 결정하는 등 고정적이기 보단 유기적인 업무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위에 소개 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다양한 사회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환원되기 시작한다.


 

순수한 관계가 불러오는 탈 도덕, 그리고 도덕적 불감증


 

네트워크의 시대 속 관계는 ‘남녀관계’와 닮아 있다. 시작은 혼자서 할 수 없지만, 맺음은 한 쪽의 이별통보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별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쿨 한 태도’. 이런 모습을 책 속에서는 앤서니 기든스를 들어 ‘순수한 관계’라고 표현한다.


 

“앤서니 기든스는 ‘순수한 관계’의 도래를, 즉 모호한 길이와 범위의 책임이 전혀 수반되지 않은 관계의 도래를 선언한 바 있다. ‘순수한 관계’는 오로지 관계에서 비롯하는 만족에 기초하며, 이 만족이 줄어들거나 흐릿해지거나 다른 데서 더 심대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왜소해 보이면 그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된다. 이 관계의 성립은 쌍방의 결정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이것의 해체는 일방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순수한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구, 욕망, 소망의 충족이다. 관계의 대상은 이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하는 이들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네트워크 시대에 관계 맺음에는 도덕적 판단이 개입 될 이유가 없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현상계 바깥으로 위치되는 ‘탈 도덕’적 행위가 된다.


 

대중사회와 대중문화의 시대인 지금, 우리는 지속적인 자극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극에 반응하기를 멈추도록 만든다. ‘양치기 소년’의 우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과잉자극이 되지 않고서는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의 시대는 우리를 불가피하게 탈 도덕적으로 만들고 있다. 정말 뜻밖이거나 아주 잔인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 감수성 말로의 시대. 즉 “도덕적 불감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더 이상 행동 할 수 없는 개인


 

도덕적 불감증의 시대가 불러온 N포세대의 절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대학 졸업생의 평균 부채는 1321만원. 매년 사상 최대의 취업난은 갱신되고 있으며, 두산 인프라코어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취업 후의 상황 역시 안전을 보장받지 못 한다. 집 값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 삶의 장기적인 전망이 불가능한 상황. 세상은 발전하고 있지만, 생존을 위한 투쟁은 더욱 힘겹기만 하다. 모든 고통은 결국 실존적 불확실성으로 요약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며 그것의 발생을 막을 수도 없다는, 우리의 무지와 무기력의 무시무시한 혼합물이자 굴욕감의 무한한 원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물음은 우리 세대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역사적 행위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존재들인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이나 존중받을 가치가 없고,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적 토대에서 연대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연대가 없이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행동 역시 동반되지 않는다. 나만 아니면 된다.


 

“개인주의 전략들은 주로 진정제 기능을 가진다. 국제 정치 수준은 사람들로 하여금 먼 미래에나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을 갖게 한다. 때문에 문화적 행위는 중간 수준에, 즉 그들 자신의 사회 수준과 그들이 미래에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를 둘러싼 민주주의 문제들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많은 경우에, 어쩌면 대다수의 경우에 그저 잠재의식으로 존재하거나 명확히 표현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바우만의 주장처럼 점차 개인화 되어가는 네트워크의 시대에, 파편화 된 개인들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은 미흡 할 뿐이다.


 

그래서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그리는 미래가 우리의 현재일까?


 

책 속에서 바우만과 돈스키스는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리고 둘 다 지극히 현실 속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이들이기에 그리 밝은 미래를 그려내지도 않는다. 돈스키스는 책의 말미에 “다만 사랑, 우정, 충성 그리고 그것들의 정직하고 충실한 산파인 창조의 정신으로는 그것이 가능했다.”라는 한 마디로 서로의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거대담론의 결과로 생각하기엔 허탈할 만큼 뻔 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이런 뻔 한 행동들이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몇 일전, 급작스럽게 한․일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합의 내용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이미 일본 측에서는 ‘더 이상의 사죄는 없다’고 못을 박은 상황이고, 우리 정부 측에서는 ‘외교에 완승은 없다’며 이 정도의 성과 도출에 만족을 해야 한다 말한다. 많은 곳에서 다양한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부는 더 이상의 협상은 불가하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정치인들도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기인 만큼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지는 못 하는 것 같다.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어제 TV를 보다 흥미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대학생들이 ‘인간 소녀상’이 되어, 부산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모습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부산의 청소년과 청년이 힘을 모아 일본영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도덕적 불감증은 우리를 분노하지 않도록 만든다. 그리고 행동하지 않도록 만든다. 너무나 깊게 우리 사회에 파고들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각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이겨내기 어렵다. 바우만과 돈스키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너무나 비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희망의 빛은 비극 속에서 태어나듯이, 아직 우리에겐 작은 행동들이 이어지고 있듯이 희망의 끈을 절대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