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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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과 허용의 테러를 경고하다. - <타자의 추방: 한병철>

억압의 시대는 끝났다. 박탈과 금지에 저항하여 우리는 승리했고, 과거 만연했던 공포와 두려움이 동반하는 모든 부정은 면역항체에 부딪혀 소멸했거나,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긍정과 허용이 시대의 가치가 됐다. 이에 효율과 결과만을 중시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이해가 결합하였다. 부정은 반드시 버려져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부정을 수용하는 행위는 경제적으로도 결코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왜곡된 긍정 사회가 되자 사람들은 타자의 부정성 또한 회피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지지고 볶는 일은 그 자체로 성과가 있는 일도 아니고 되려 피로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린 부정으로 대표 되는 타자의 음성, 타자의 시선을 피해 작은 화면에 자신을 접속한다.

‘좋아요’가 만연한 디지털 네트워크 속 세상은 쉽게 ‘Social’이라고 착각되지만, 그곳에는 타인의 시선도 새로운 목소리도 없다.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는 개개인의 독백만이 가득하다. 그 독백은 명백히 난잡한 소음이다.

사람들은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대신하는 조회수와 댓글을 위해 글을 쓴다. 사람들이 ‘좋아요’를 클릭해 줌으로써 자신의 에고를 증명한다. 세상의 가치에 맞는 인간임을 증명하고,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들은 ‘같지만-다른’ 것들을 재창조한다. 인터넷 세상은 실상 같지만 다른 잡다함으로 넘쳐난다.

당위성의 누적은 사람을 가둔다. 더 나아가 나르시시즘으로 인도하고, 깊은 나르시스는 타자의 부정성을 명확히 하는 오목렌즈가 된다. 부정의 수용은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 혹은 취향이라는 명목으로 자신과 같은 사람 그리고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이야기만을 소비하게 한다.

즉 ‘동일’을 추구하고 이런 ‘동일’의 첨예화가 갈등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며 혐오를 조장한다. 현재 낯섦은 그 자체로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것들의 묶음은 또 다른 묶음들과 전쟁을 시작한다. 클론들의 사회에서는 결코 낯섦의 경이로움은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 한병철이 처방하는 해답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쉽지 않다.

그의 첫 번째 해답은 환대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

환대는 긍정과 다르다. 긍정은 부정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부정을 수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환대는 부딪힘과 깨짐에 대한 허락이며, 자아 확장의 기대이다. 또한 화해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가 제시한 두 번째 해답은 경청이다. 그는 미하엘 멘데의 <모모>라는 책에서 경청의 의미를 빌려 이렇게 인용했다.

“언젠가는 어린 소년 하나가 모모에게 노래를 하지 않는 카나리아를 데리고 왔다. 모모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제였다. 모모는 일주일 내내 그 새를 경청해야 했다. 그러자 결국 새는 다시 지저귀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소음만이 가득한 지금, 환호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웃음소리는 최후의 승리를 의미한다. 우린 패션(Passion)을 버리고 철학을 택해야 한다. 우린 데이터베이스의 통계를 버리고 시선을 맞추고 각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클론 사회에서 데이터베이스는 의미가 없다. 즉 사유할 것 또한 없다. 다름을 이유로 추방한 타자가 돌아오길 기도해야 한다. 아니 우리가 그들을 찾아 데려와야 할 일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이 답답하고 획일적인 가면을 벗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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