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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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오빠’라는 말을 듣고 머나먼 이국어를 듣는 듯 낯설었다. 일가친족 중 대빵인 할머니 입에서 오라버니도 아니고 울 오빠라니. 몸빼가 멜빵바지로 일순 바뀌고 희끗한 머리칼이 돌연 여름날 무성한 나뭇잎 같았다.

하긴 할머니에게도 소녀였을 적이 있었겠지. 고무줄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저물녘이면 마냥 엄마 품이 그리웠을. 갑자기 엄마가 미치듯이 보고파 집으로 뛰어가면 밥 짓는 냄새가 먼저 솔솔 안도감으로 다가왔을. 부산한 부엌바닥을 헤집고 엄마 냄새에 돌격했을. 그럴 때면 할머니의 엄마는 막내딸에게 곱지 않게 눈을 흘기면서도 이내 등을 쓸어내리셨겠지.

할머니는, 내 할머니는 엄마의 냄새를 오래 맡지 못했다. 상실감을 지울 수 없어 그 냄새를 장정이 된 오빠에게서 찾으려 했다. 막내가 한없이 측은했던 오빠는 동생이 마치 딸인 양 감싸주었다.

할머니의 오빠는 오래전에 고인이 되셨지만 할머니 기억 속엔 여전히 사춘기 오빠, 믿을 구석의 전부였던 청년 오빠로만 존재하나 보다. 어쩌면 할머니에겐 엄마와 오빠가 이음동의어인지도 모른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의 표지를 이윽히 바라보자니 수건을 머리에 두른 내 할머니가 먼저 떠오른다. 조실부모한 할머니의 유년 시절과 내가 겹쳐져서인지 유독 나에게만 더 애틋했던 사람. 내 든든한 백이 되어주던 사람.

어쩌면 할머니는 자기가 미처 받지 못한 모정을 자신의 엄마를 대신해 내게 줌으로써 나를 자기와 동일시시켰는지도 모른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엄마를 대할 때 안온한 아이 같았다. 먼 훗날 나는 엄마와 할머니를 이음동의어로 만들지도 모르겠다.

 

잔잔한 물결이더니 어느새 여울을 만들어 맑은 물소리를 들려주는 신경숙.

신경숙을 고등학생 때 만났다.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에 실린 단편을 읽으며 막연히 신경숙을 동경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물결이 되어 강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강이 쩍쩍 갈라진 강바닥 표면을 드러내기도, 아침햇살에 일제히 반짝이기도, 가끔은 범람할 때의 위태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관계가 단편 <풍금이 있던 자리>의 딸과 아빠의 여자가 아닌가 싶다. 어느 날 문득 엄마의 빈 자리를 틈입한 아빠의 여자. 시골 아낙의 투박함에 익숙했던 딸은 여자에게서 여자를 읽는다. 깔끔하게 치장한 눈부심과 국수 위의 고명 같은 아기자기함을 갖춘 여자. 엄마를 잊기엔 너무도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급기야 장래희망 칸에 그 여자를 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밤마다 여자의 손에 로션을 발라주던 아빠. 네 개의 손이 허공을 휘저으며 만들어내는 실루엣.

왜 나의 엄마는 이런 사랑을 받지 못했을까. 땀내 풍기는 수건을 노상 두르는, 음식에 ‘맛’이 아닌 ‘멋’을 부리지 못하는, 로션보다 장갑을 끼워주고 싶어지는 우직한 소 같은 엄마. 딸은 엄마를 아빠의 여자처럼 동경할 수 없었다.

큰오빠는 그 여자가 싸준 도시락을 자기는 물론 동생들까지 먹지 못하게 강요했다. 그래야 엄마가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란다. 큰오빠의 뜻대로 엄마는 다시 돌아왔고, 그 여자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딸에게는 그 여자가 엄마를 넘어선 여자였다.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일진데 당체 여자를 감지할 수가 없던 딸에게 여자의 모델이 되어준 여자. 엄마에게서 여자를 찾고 싶어 하는 딸의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그간 출간된 신경숙 작품의 원천을 만난 듯했다. 딸의 기억에 저장된 엄마. 난 도대체 엄마를 얼마나 알고 있었단 말인가. ‘모녀 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P.25)’라고 생각했으나 후자일지는 몰랐다. 눈을 가리고 사는 것처럼 답답한 일상을 보내는 문맹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했다. 엄마는 세상이 해독할 수 없는 점자책 같았으나 딸은 엄마의 세상이 해독할 수 없는 점자책과 같았다. 남편에게, 심지어 자식에게 무시당하면 어쩌나 저어되었으나 그보다는 바가지가 살 독 바닥에 닿을 때가 더 두려웠던 엄마. 자기가 만든 음식이 자식들 입속으로 들어갈 땐 참으로 행복했으나 한편으론 쟤네들을 굶길 것 같아 무서웠던 엄마…….

시집와서 유일하게 잘해주던 어린 삼촌을 중학교도 못 보내준 게 한으로 남아버려 삼촌 기일마다 산 냄새와 함께 소주 냄새를 풍기는 엄마. ‘학교를 가지 않아도 좋으니 엄마가 성질을 좀 가라앉혔으면 좋겠다고 생각(P.50)'하는 딸 앞에서 ‘자식새끼 학교도 보낼 수 없는 살림 살면 뭐 하느냐(P.50)’고 살림을 부수는 엄마. 자신의 유일한 패물인 금반지로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하고서야 환하게 웃는 엄마…….

<풍금이 있던 자리>의 그 여자를 내쫓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큰오빠가 바라본 엄마는 어떠한가. 실종된 엄마를 보았다는 행인의 제보에 첫 직장이었던 용산동사무소 근처를 배회하다 맞닥뜨린 기억. 아들에게 졸업증명서를 가져다주기 위해 난생 처음 서울행을 감행한 엄마. 서울에 처음 와본 소감을 묻는 아들에게‘너는 내가 낳은 첫애 아니냐. 니가 나한티 처음 해보게 한 것이 어디 이뿐이간? 너의 모든 게 나한티는 새세상(P.93)’이라고 말하는 엄마.

자궁에 잉태되어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 주었던 탯줄이 잘리는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식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간다. 내 몸 같았던, 내 맘 같았던 아이가 이젠 젖을 빨며 다른 대상에 눈을 돌린다. 몸이 무거워지더니 엄마의 영역에서 자꾸 벗어나려 하고, 어느 순간에 자기의 키를 훌쩍 넘길 때는 타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서어서 자라라, 했음서도 막상 니가 나보다 더 커버리니까는 니가 자식인데도 두렵(P.94)’다고 말하는 엄마.

엄마처럼 살게 할 수 없어 열다섯 여동생을 첫째에게 맡기면서부터 엄마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아들 대하는 게 점점 어렵다. 하염없이 주면서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게 엄마의 심정인데, 엄마가 변변치 못해 동생 앞가림까지 떠맡겨 아들의 다짐이자 꿈은 한 발작 멀어져 갔다며 미안해한다. 장편 <외딴방>이 불쑥 튀어나오는 부분이다.

아내로서 엄마는 어떠했는가. 전쟁통에 일찍 결혼한 여자. 그런 까닭에 일찍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던 여자. 누구 딸보다 누구 엄마가 귀에 먼저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여자이기보다 엄마이길 선택했던 여자. 나의 삶을 접고 누구의 엄마의 삶에 평온을 찾으며 희생을 감수했던 여자.

심지어 남편의 동생이었던 균에게도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던 여자. 엄마의 사랑을 맘껏 받지 못했던 어린 균은 형수가 엄마로 다가왔을 것이다. 나무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형이나 누나보다는 텃밭이라도 팔아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힘써 주려했던 형수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을 것이다. 자살하기 직전까지 균에게 있어 형수는 엄마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안을 수 없는 짐까지 아내에게 떠넘긴 남편. 균에게처럼 아내에게도 일정한 간격을 두는 남편. 함께 걸을 때조차 숨 가쁘게 쫓아오는 아내를 배려할 줄 모르는 무심한 남편. 이는 습관이 되어 생활이 되었다.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 결국 아내를 잃게 했다. 뒤늦게 밀려오는 회환에 아내의 삶을 되짚어 보다 딸에게 속내를 내비친다. ‘말이란 게 다 할 때가 있는 법인디…… 나는 평생 니 엄마한테 말을 안 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겄거니 하며 살었고나. 인자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을 사람이 없구나(P.198).’

엄마가 여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사람도 존재했다. 모두가 힘들 때 더 힘들게 만든 사람이지만 사정이 딱해 돌봐준다는 게 마음을 연 것이다. 심적으로 의지했던 한 사람, 이은규. 그의 딸처럼 거리낌 없이 굴고 싶어서였을까. 그의 엄마가 되어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어서였을까. 부녀지간으로도, 모자지간으로도 보이는 그들의 관계.

개가 고양이의 엄마가 되어주기도 한다.

 

<엄마를 부탁해>는 어이없이 실종된 엄마를 찾으려 애쓰는 가족의 모습에서 엄마의 그림자를 찾아내려다 아득한 그리움과 조우하는 아픈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엄마가 되면서부터 자신의 엄마를 더욱 그러워하게 되어버린 세상의 모든 엄마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작은딸은 찾을 수 없는 엄마가 더 애잔하다. 자식을 세 명 낳고 정신없이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엄마의 일생을 곱씹게 된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아픔의 크기는 비례적으로 증가한다. 우리 엄마를, 내 엄마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혹시 실종된 게 아니라 떠나버린 건 아닐까. 다가오는 이별을 미리 준비한 건 아닐까. 남편과 오남매와도, 마음의 안식처인 그와도, 자신에게 가장 모질었지만 남편을 낭군처럼 자식처럼 여기며 살았던 삶이 안타까운 아이들의 고모와도 이별 인사를 해야 한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기 마련인 ‘엄마’라는 말. 생의 끝에도 ‘엄마’라고 숨죽여 외쳐보며 세상과 작별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 나의 세계이자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였던 엄마를 시간은 무지한 엄마로, 끝내는 측은한 대상으로 만든다. 허나 오랜 시간 후 특별한 대상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알레르기가 심해 무명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인쇄업자의 어머니는 죽기 전에 그를 위해 평생 입고도 남을 무명옷을 만들었다. 과연 인쇄업자의 어머니는 기쁘게 자식의 옷을 만들었을까. 엄마의 부엌일처럼 힘들고 지겨워 수십 차례 장독 뚜껑을 깨부술 시간이었을지라도 자식은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 어머니는 요즘 여자들과는 다른 분이에요(P.77).’

 

누군가의 할머니이기 전에, 엄마이기 전에 손녀였던, 딸이었던 내 할머니. 할머니에게도 간절히 엄마가 필요했겠지? 세상의 모든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끌어안은 채 예수를 지그시 바라보는 마리아같은.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P.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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