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고백하고 시작하는 게 도리일 것 같다. 내용도 원체 난해하고 시간에 쫓기며 읽었기 때문에 나는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의 해석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신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는 퍼즐을 이전에 보았던 이미지를 통해 상상해보고 맞춰보는 것처럼, 몇 개의 다른 문학 작품을 통해 추론해보는 게 이 글의 전부다. 때문에 줄거리에 대한 세세한 분석보다는 작품 속에 드러나는 몇 개의 이미지들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1. 탁스함: 소통 가능성 속의 고립

 

사실 본격적인 줄거리는 1장의 가장 마지막 부분, 즉 약사가 피부조직검사를 받은 걸 기억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소설의 주제와는 무관한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움베르트 에코는 만초니의 거짓 언어에서 소설을 이렇게 정의한다. “소설은 바로 말이 아닌 행위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심지어 말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 행위에 봉사하는 것으로서 말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거짓말의 전략, 열린책들, p81.) 그렇다면 작가가 50페이지를 할애하여 쓴 탁스함이란 장소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묘사에 에 대한, 혹은 메시지에 대한 단서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탁스함과 그곳의 일상을 묘사하는 데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소통 가능성 속의 고립이다. 일단 탁스함이라는 공간 자체가 모순을 품고 있다. 유명 관광지인 잘츠부르크 근처에 있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며, 외부와의 교통을 위해 건설된 고속도로와 공항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외부와의 연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시는 언제든 외부와 연결될 수 있지만, 울타리와 철조망을 두른 채 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해서 탁스함은 늦은 밤이면 더 어둡고 적막해진 중심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길모퉁이에서 유령처럼 출몰”(p8.)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도시로 묘사된다. 탁스함이 가진 소통 가능성 속의 고립이란 이미지는 주인공 약사의 일상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아내와 한 집에서 살지만 십년 동안 철저히 분리되어 각자의 일상을 영위한다. 언제든 서로의 일상에 간섭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해서 문제를 만드느니 침묵이 더 편한 듯 행동한다. 약사는 집안 대대로 약국을 운영해왔지만, 환자들은 약국 문을 나서는 순간 약사를 잊는다. 벌목꾼들과 뜻하지 않게 점심을 같이 먹게 된 순간에도 약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각자 따로 있는 듯”(p35.) 느낀다. 이 도시에서 함께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모두 함께 혼자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재밌는 점은 소통 자체보다 소통의 가능성이 더 깨끗하고 안전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침묵이 안전한 무균실처럼 묘사되는 반면, 소통은 폭력성을 지닌 행복처럼 불안하고 모순되게 묘사된다. 마치 이웃집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처럼. “그리고 어느 이웃집 정원에서 고함소리와 한껏 서럽게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울음소리와 흐느낌이 오른편과 왼편 양쪽에서 모두 가라앉고, 좀 전의 울부짖음 덕에 한층 맑아지고 풍성해진 듯한 목소리로 어느덧 서로를 부르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귀를 기울였다.”(p25.) 만약 소통이 울음소리와 같은 비극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면, 차라리 소통하지 않고 가능성 그 자체로 남겨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가능성은 열려 있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소통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약사와 주변인들은 제대로 소통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통의 가능성은 약사가 조직검사를 받은 걸 기억해내면서 산산이 부서진다.

 

 

2. 죽음과 실어

 

약사가 늘 가지고 있었던 소통의 가능성은 죽음의 불안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비오는 숲을 산책하던 중 조직검사를 위해 도려낸 이마 부위 피부에 강한 충격을 느낀 그는 실어증에 걸린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공항식당에서 만나게 된 두 남자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사실 이때의 충격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소설 자체에 지하’ ‘망자’ ‘조상등 죽음을 암시하는 이미지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충격을 죽음과 연관 지은 것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카뮈는 일상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계기가 바로 죽음이며, 이때 세계는 인간의 언어를 상실한 날 것 자체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낯설음이다. , 세계가 두껍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나의 돌이 얼마나 낯선 것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완강하게 닫혀 있는 것인가를, 그리고 자연이, 하나의 풍경이 우리를 어느 만큼 고집스럽게 부정할 수 있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시지프 신화, 책세상, p29~30.) (암일지도 모르는) 혹과 그로 인한 충격, 이어지는 세계의 실어, 갑자기 시작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뭔가 카뮈가 이야기한 부조리의 인식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 않은가?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약사가 실어증에 걸린 이후에 더 사람들과 원만하게 소통한다는 점이다. 일례로 충격을 받은 직후 공항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장면을 보자. 말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그렇기에 더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위해 노력한다. 심지어 그는 실어증으로 인해 어떤 강렬한 욕구마저 느낀다. “거기에다 또한, 실어증으로 인해 생겨나 그 동안 쌓여 있기만 했던 또 다른 욕구마저 눈을 뜨거나, 폭발하거나 혹은 터져나왔다.”(p65.) 더 흥미로운 것은 주변사람들의 반응이다. 식당주인은 그가 말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고 메뉴를 권하고, 이마를 싸매주기도 한다. 주변에 함께 식사하던 사람들 역시 그에게 따스한 태도를 보인다. 침묵하는 탁스함 사람들과는 다르게 행운을 빌어요!”(p67.)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말을 전혀 못해 의사소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약사는 두 남자와 함께여행하게 된다. 말을 할 수 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동행을, 말을 할 수 없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하게 된 것이다.

 

3. 유령과 분노

 

이후 여행에서 벌어지는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서 정확히 분석할 수 없다. 워낙 급하게 읽기도 했지만, 사건들이 너무도 산만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내가 받은 주관적인 인상과 떠오른 이미지들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여행을 일종의 과거로의 회귀로 생각한다. 일단 함께하는 두 인물 자체가 전직 스키선수와 시인으로,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인물들이다. 심지어 시인이 살던 마을에 갔을 때는 그들만 빼고 시간이 엄청나게 흐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한번은 그가 예전의 이웃인 듯한 어떤 사람에게 인사했는데, 그 사람은 그 이웃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가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과 아버지의 특징적인 인상착의, 그 거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낯설어했다.”(p109.) 마치 과거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들과 함께 약사는 죽음과 같은 터널을 통과해 미망인과 사생아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약사는 미망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시인의 사생아를 보러 간 곳에서는 사라진 아들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황량한 스텝지역을 거쳐 다시 자신이 살던 탁스함으로 돌아간다. 미망인과 사라진 아들은 마치 약사의 과거 속 아내와 아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과거 속의 존재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현재에 다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들은 유령과 같다. 그리고 구타든 사죄든, 유령들과 대화하면서 약사는 서서히 자신을 용서하고 소통할 수 있는 희망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실어증은 단순히 유령들과의 대화만으로는 고칠 수 없다. 지난 과거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시간들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롭게 말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는 여자의 그림자가 한 말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여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는 걸 그만두세요! 당신은 그 실어 상태를 떨쳐버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그 무언(無言)이 오늘이라도 당장 당신을 죽여버릴 거예요. 당신의 침묵은 결코 침묵이 아니에요. 비록 처음 얼마간은 당신의 의식을 확대시켜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혼자 있을수록 당신의 실어 상태는 위험해지고, 급기야는 생명까지 위협할 거예요. () 당신은 지금 세계의 한계에 다다른 거예요, 친구여. 게다가 세계의 한계 저편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해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새롭게 말하려는 시도를 해야 해요. 새로운 단어를 찾아내고, 문장을 새로 만들고, 큰 소리로, 아니 소리라도 내보세요. 당신의 말이 비록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다시 입을 연다는 사실이에요.”(p197~198.)

 

앞서 나는 시지프 신화를 가져와 죽음과 실어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결론에서도 카뮈를 인용하는 게 맞다. 사실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과 부조리에 대해 카뮈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 자체를 존중해야 하며, 그렇기 위해서는 이성을 포기하지 않고 부조리에 반항하며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새로운 단어를 찾아내고, 얼토당토 않는 말이라도 중얼거리며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이러한 반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조리에 홀로 반항하는 카뮈와 달리 실어증을 극복한 약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이젠 소통의 가능성 속에서도 침묵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머리가 찢어진 아이의 피를 닦아주고,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살려달라는 비명(사실 TV 소리였지만)에도 귀 기울일 줄 안다. 무엇보다 그가 부른 노래처럼 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 / 말할 수 없이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마치 아버지의 죽음을 보며 죽음이 가까운 심각한 이들은 / () 멀은 눈도 유성처럼 불타고 명랑할 수 있음을 깨닫고, / 빛의 소멸에 분노, 분노”(시월의시, 민음사, p142.)했던 딜런 토머스처럼. 나는 이 모든 변화를 과거 속 유령과의 대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유령과의 대화를 죽은 자들과의 연대로 확장하는 상상을 해본다. 죽은 자들과의 대화가 살아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냐고? 죽은 자들과 우리가 죽음을 공유하듯이, 살아 있는 자들 역시 죽음의 운명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허접한 결론을 스페인 작가 알라르콘의 소설 중 한 구절로 때우며 마친다.

 

난 말이야, 인간들이 왜 다들 친구로 지내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 그대들은 똑같이 불행하고 무력하고 상호 의존적인 존재야. 생명력도 짧아서 무한한 천체에 비하면 왜소하기 그지없지. 그래서 돈독한 우애를 나누어야 해. 난파선에 탄 승객들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상황에서는 사랑이나 증오나 야망 따위는 작동할 수 없어. 빌려 준 사람도 갚을 사람도, 위대한 사람도 미천한 사람도, 잘생긴 사람도 못생긴 사람도, 행복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없지. ? 다들 똑같은 상황이니까. ‘나의 등장역시 모두한테 동등하잖아……. 도대체 지구란 게 뭐야? 까짓 거 여기서 보면 침몰하는 배, 페스트나 화재에 휩싸인 도시와 다를 게 뭐가 있느냐고?” 죽음의 친구중 죽음의 대사(죽음의 친구, 바다출판사,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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