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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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면을 믿는가. 진심을 믿는가. 혹은 표면과 내면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냥 마음과 진짜 속마음을 가려낼 수 있는가.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러한 몇 가지 질문을 겹쳐 보고 싶었다. 누군가가 언제나 표면적이고 겉도는 말만 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사람일까. 내면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과연 누군가의 내면을 알 수 있기는 한가? 한국식으로 포장마차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소주병을 기울이며 ‘속 얘기’를 밤새도록 하고 나면, 그를 ‘깊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식탁 위엔 샤갈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니스 해변 위에 인어가 떠 있는 그림이었다. 아마도 서명은 가짜일 것이다. 하지만 피터가 전에 말한 대로 무슨 상관인가. 샤갈의 진품이나 다름없거나 아니면 그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딱 알맞은 정도의 허점이 있으니. 포스터는 결국 수천 장 중에 한 장일 것이다. 맑은 밤에 떠 있는 저 천사는, 대부분의 천사는 어떤 서명이라도, 아무리 위조한 서명이 있더라도 가짜가 되지는 않는다.” (31-32쪽)


<가벼운 나날>은 책장을 펼친 순간부터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어찌되었건 비리와 네드라의 이십 년 남짓한 세월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나는 한 번도 그들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성미 급한 독자는 이 부부의 겉도는 듯한 대화에, 뜬구름 잡는 듯한 행동에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 같은 대사대로, 그러니까, ‘네 진짜 마음이 뭐야?’라고 묻고 싶은 이 부부. 그 나름 평범한 사람들, 수천 수만 중의 하나일 듯한, 그들의 고유성이나 시그니처는 가짜일 수 있는 그들. 하지만 그 “딱 알맞은 정도의 허점”을 가진 그들은 아무리 위조한 시그니처를 보여도 그들 자체가 “가짜가 되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알 듯 모를 듯한 부부의 삶을 따라가면서, 내가 지금껏 만나 온, 나와 다른, 그래서 알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몇몇 사람들에 대해 아주 조금 이해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이 사람들이 혹시 비리와 네드라와 흡사한 성향은 아니었을까, 하면서. 가령 이런 사람들. 어제는 A에게 사랑을 말하고, 오늘은 B에게 깊은 애정을 표하며, 어제 A와 나눈 사랑이 오늘 B에 대한 감정과 모순되지 않는 사람들.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선에서는 A에게 말한 사랑이 ‘진짜’라면, B에게 그럴 수 없고, B에게 보인 애정과 집착을 생각하면 A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아함이 떠나지를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일부일처제에 충실해야 한다거나, 불륜은 천하의 범죄라거나 하는 말이 아니다. A에게도 진심, B에게도 진심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들은 ‘매 순간’이 그저 그대로 진심이었다면, 이 가벼운 진심은 결코 제대로 된 진심이라 여겨줄 수 없는 것인가?


비리와 네드라는 오랜 결혼 기간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외도를 한다. 그리고 강가의 그들의 집으로 돌아오면 또 그대로 충실하다. 비리는 나무랄 데 없는 아버지이고, 네드라도 아이들을 아끼며 집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진심이 누락된 사람들인가, 아니면 단속적이지만 매순간마다 충실해서 그들의 진심은 ‘진짜 진심’이 아니라고 오해받게 되는 것일까.


훌륭한 소설은 인생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 소설이 안개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라면, 나에게 <가벼운 나날>은 비리와 네드라와 같은 짙은 안개 너머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이 가깝게 다가간다는 말은 결코 몰입되거나 밀접해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소설이 비리와 네드라를 말할 때의 미묘한 거리감은 그들의 주변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유지된다. 그들의 내면까지 들어가 속마음을 꺼내 보이는 일은 없다. 아니, 그 구분될 속마음 자체에 이 소설은 관심이 없다. 그들은 표면이 내면이고 그것이 전부이다. 가볍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누구도 이 인물들이 온통 거짓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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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샴푸 정말 좋아요.” 그녀가 선언하듯 말했다. “스웨덴 건데 본윗 텔러스에서 사죠. 정말 좋아요.” (36쪽)


소설적 드라마도, 기승전결도 없는 이 소설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리얼’하다. 피터 부부와 함께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네드라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놀랍게도) 송어낚시 얘기 바로 다음이다. 마치 부조리극처럼, 실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이렇게 불쑥불쑥, 집중할 주제도 정해놓은 소재도 맥락도 없이 부산하게 이어지지 않은가. <가벼운 나날>에서는 이런 대화가 정말 귀신같이 자주 등장한다. 인물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으면서, 중간중간 빛나는 통찰까지 보여주며, 궁극적으로는 리얼한 대화들.


제임스 설터를 말하면서 그의 표현이나 문장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의 정수를 쏙 빼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흡사 시와 같이 압축되고 농축된 문장들은 간혹 번역의 불가능성을 생각하게도 한다. 시를 번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듯, 설터의 어떤 문장들은 이 불가능성에 가까이 있다. (이 문장들 앞에서 번역자의 고충은 짐작만으로도 내 머리가 빠지는 기분이 든다.) 앞 문장과 다음 문장이 얼핏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은 것 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툭툭 던져지는데, 그 가깝지 않은 거리 사이에서 섬광이 일고 장면은 번뜩인다.


독자는 커튼과 창문에 어린 빛을 좇다가 일순간 네드라와 지반의 정사장면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다음 순간 집에 도착해 네드라와 비리의 일상적인 대화를 듣는다. 흔히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흡인력 있는 서사는 없고, 장면은 수시로 전환되며 대화는 종잡을 수 없다. 그런데 이 파편적인 것 같은 장면들, 부서지는 대화들이 사실상 실제 일상에서 이뤄지는 것들과 얼마나 놀라우리만치 닮아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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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51쪽)


“그들의 삶”처럼 <가벼운 나날>이라는 소설도 이 서술에 부합한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지만, 그 안에는 형태가 없고 그저 경이로운 디테일이 가득하다. 그들의 삶을 그리는 소설이, 형태에서까지 삶을 담아버리는 상태. 소설의 한 문장처럼 “삶은 날씨고 삶은 식사다.”(52쪽) 삶은 매일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고, 조금씩 변하면서 훌쩍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얼마나 변해왔는지를 짐작만 할 수 있다. 나는 <가벼운 나날>이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이 소설이 뛰어나지 않다거나 훌륭하지 않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위대하지 않은 것들, 범상한 것들, 영웅적이지 않은 것들만을 주목하고 내내 관찰한 이 소설에게 위대하다는 표현은 걸맞지 않은 수사일 것이다. <가벼운 나날>은 대체할 수 없는 표현으로 가득하다. 비리와 네드라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고 달리 말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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