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새로운 이해
김인환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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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정리하는 틈에 발굴하게 된. 1996년에 간행된 책. 당시 문학 담론의 중심에 있던 주제를 다루고 있는 평문을 선별하여 묶은. 앞서 1976년에 김현과 김주연이 엮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이 있었다는 내용이 책머리에 소개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건 20년 시차를 두고 간행된 것이라고 보면 될 듯. 그리고 지금이 2014년이니까 어쩌면 곧 다음 작업이 진행될지도 모르겠다.


수록된 원고 중에 흥미롭게 마주하게 된 건 화이트헤드.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시」가 수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김인환의 「문학과 정신분석」에 인용된 내용.


예술이란 구체적인 사실들에 의하여 실현되는 하나하나의 가치들에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그 사실들을 배열하고 정돈하는 선택 작용이다. 예를 들면, 노을진 저녁 하늘을 잘 보려고 몸이나 눈의 위치를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것도 하나의 간단한 예술적 선택 작용이다. 예술의 습관은 생생한 가치들을 즐기는 습관이다. (Alfred North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생생한 가치들을 즐기는 습관’, 표현이 좋다.


취미삼아 사진을 찍는 친구가 있고, 그 친구에게 사진 잘 찍는 법을 묻는 이들이 있다. 대신 답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인용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어졌다. ‘생생한 가치들을 즐기는 습관’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주제 넘는 짓이어서 하지 않았다. 가끔 내게도 그런 질문을 해오는 이들이 있다. 답을 회피하고는 했는데, 이런 답이면 될 것 같다. ‘생생한 가치들을 즐기는 습관’을 들이라는 답이면 되겠다.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닐 뿐더러,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기억이 나를 본다 오늘의 세계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지음, 이경수 옮김 / 들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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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시인의 시편들을 읽는다. 유럽인데, 이국적인 풍경이 떠오른다는 게 오히려 낯설다. 국내에 소개되는 해외문학은 지경을 넓혔다고는 해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는데, 시가 번역되어 소개되는 걸 보기 힘들다. 각종 세계문학전집도 소설에 중점을 두고 가끔 희곡이 끼어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으니까.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 한 권 검색되는 것으로 끝이다.


4
급진과 반동은 불행한 결혼 속에 동거한다.
서로를 갉아먹으면서, 서로에게 기대면서.
하지만 그 자식들인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자신의 언어로 소리치는 법!
진실의 흔적을 따라 탐정처럼 길을 가라.


5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
신문지 한 장이 몇 달째 누워 있다. 사건을 가득 담고
빗속 햇빛 속에 밤이나 낮이나 신문은 그곳에서 늙어간다.
식물이 되어가는 중이고, 배추 머리가 되어가는 중이고, 땅과 하나 되어가는 중이다.
옛 기억이 서서히 당신 자신이 되듯.


(65쪽, 「역사에 대하여」)


급진과 반동의 불행한 결혼. 어쩌면 그 속에서 우리가 태어난 것일 수 있겠다. 서로 갉아먹으면서 공존하는 그 속에서. 그리고 우리는 길을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탐정의 눈으로. 이데올로기보다 사건이나 이슈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 같다. 탐정의 눈을 지닌 우리는 그렇게 증거를 수집하는 눈을 지니고 있는 건지도. 흔적을 살피는 우리의 추적은 끝이 나지 않았고. 사건과 이슈를 추적하는 탐정급 캐릭터에게 매혹을 느끼고 있다. 그들의 명철함에 반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들의 눈이 우리와 닮은꼴을 취한 탓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데나 종북 딱지를 뒤집어씌우는 눈은, 여전히 급진과 반동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하는 탓일 수도 있겠다. 프레임이 바뀐 지 오래지만,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자식을 바라보고 있다. 그저 진실의 흔적을 따라 탐정처럼 길을 가고 있을 뿐인데. 요즘 나는 오래된 신문을 복습하는 기분으로 뒤적이고 있다. 2년이나 3년 정도 지난 신문이다. 숱한 의혹들이 해명되지 못했고 미결인 채로 남아 있다.



 
 
 
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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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 쓰레기로 가득한 언덕이 있고, 쓰레기 틈에서 재활용 폐기물들을 수집하고 판매하여 생계를 영위하던 생명들이 있다. 도시인들이 남긴 욕망의 찌꺼기가 다종다양한 형태로 모여 폐기되는 순간에도 거기에 덧붙어 살아가고 있는 생명들이 있다는 건, 공존하는 도시의 양면 중 한 면일 수 있겠다. 나이 어린 주인공을 내세워 환상 속에서 보게 되는 일가와의 교류는 애틋하게 남아 있는 희망이기도 한데, 저자는 그 정체를 도깨비불로 제시한다.


그 매개로 제시된 도깨비불이 아니더라도, 쓰레기매립지였던 난지도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난지공원이 된 그곳의 지형을 환상의 영역 속에 삽입시킬 수도 있겠다. 환상과 실재가 교차되는 순간이 낯익은 것은 그 탓이기도 하겠다. 소설 속 환상으로 본 세계가 지금의 난지공원일 수 있겠고, 소설이라는 판타지를 들어서면서 보게 된 쓰레기 매립장은 오래된 기억에 남은 것일 테니까. 환상이건 실재건 낯설지 않다는 건, 그만큼 오래 살았다는 얘기가 되기도 하겠다.


작가의 말에 김정환 시인이 했다는 말이 인용되어 있는데, ‘만년문학은 치매의 문학이다’라고 했다. 어쩌면 치매라는 건 기억이 일으키는 혼선이기도 하겠지만, 낯익은 그 세계로 들어서서 실재하는 현실을 낯선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퇴행성’이라는 수식어는 부당한 것이기도 하겠다.


더불어. 「객지」나 「삼포 가는 길」 등의 황석영 초기 소설들의 모티브가 겹쳐놓고 볼 수도 있겠다. ‘고향 찾기’라거나 하는 것 말이다. 공간적인 ‘고향’에서 시간적인 ‘고향’으로 프레임을 달리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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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는 소년이 아니라 소녀였어. 확인하고 읽으면서도 내 눈은 자꾸 소년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소녀라는 표현을 보게 되면 아차 싶고 눈에 그려진 소년을 소녀로 트랜스 해버린다. 고약한 행위를 반복하면서 모모에게 미안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모모가 지켜준 시간을 보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저축하라는 터무니없는 제안에 홀딱 넘어가는 인간에 대한 경종이겠는데, 다른 시속에 놓여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 다른 시속이라 하는 그것에게서 쫓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모의 시간 여행은 미래의 어떠한 삶을 위해 현재를 담보로 부지런떠느라 잃어버린 것들을 챙겨가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무엇을 두고 왔는지 모른 채, 미래의 어떠한 삶을 위해 현재를 담보로 하는 거, 시간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앗기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러니 지금, 소중한 것을 해야겠고 지금,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야겠다. 앞날을 내다보는 거북이조차 고작 30분 뒤의 일을 내다볼 수 있을 뿐이고, 도래할 현상에 대해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면, 지금을 아껴 훗날을 도모할 필요가 없게 된다. 꿈이라는 건 축적하여 일정 기간이 경과되어 만기에 타는 적금 같은 것일 수 없다. 다만 지금 살고 있는 그것이지 않을까. 무엇이 되고 싶거든, 그 무엇이 되었을 때 하고 있을 일을 지금 하고 있으면 되는 거다.



 
 
 
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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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매체에서 2013년을 결산하면서 화제작으로 꼽히고 있다는 걸 얼핏 봤다. 그런가 했고,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가 친구들과 같이 읽기로 했다. 여린 친구들이어서, 디스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는 힘들어 할 거라는 지레짐작 했는데 어긋나고 말았다. 제시한 두 종 가운데 이걸 읽겠다고 나섰으니까.


여러 작품들이 떠오른다. 카뮈의 『페스트』,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까지. 그리고 개들이 등장하는 탓에 편혜영의 단편들이, 화양이라는 지명에 대한 설명 때문에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그리고 1980년의 광주.


도시에 내려진 재앙은 참혹하다. 도시에는 일정한 질서가 구축되어 있고, 질서에는 균열이 생기기도 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매뉴얼과 다른 선택을 하게 마련이고, 매뉴얼을 시행하는 주체가 되거나 매뉴얼을 필요로 하는 객체가 된다. 문제는 객체가 되었을 때 개인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다. 무언가를 돌아볼 틈도 없고, 무언가를 신중하게 고려할 여유도 없다. 그저 본성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게 되고, 그 본성이라는 건, 인간이면 지녀야 할 유별난 무엇에 대한 요구를 생략시킨다. 그러니 개판이 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개판에 개까지 뒤섞인 형국이니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인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읽고 모이기로 한 날이 다가오자, 한 친구는 아프고, 다른 한 친구는 딸이 아프고, 해서 모임이 연기되었다. 힘든 내용을 읽으면 심신이 지치게 마련인데. 이들이 아픈 게 소설 탓은 아니겠지만, 디스토피아에 대한 면역도 강해지면 좋겠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사회라는 토대가 그렇게 견고하기만 한 건 아니니까. 지금도 어딘가에서 무언가 무너지고, 어딘가에서 폭발물이 발견되고, 그러고 있는 사회니까.


갑자기 성질나서, 홧김에 살고 싶어지게 하는 그런 소설이다. 아프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