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할까 말까
정재흠 지음 / 동화출판공사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 할까 말까...
저는 사랑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란 것을 해본적도 없고 누군가를 열열히 정말 가슴이 타들어갈 만큼 그리워해본적도 없습니다. 지금도 40이 넘은 나이에 혼자 입니다.
가끔은 외로움을 느낄때도 있지만 솔직히 너무 나도 편함니다. 그리고 부담이 없습니다.

부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등등. 그렇다면 저는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일까요? 책에서 저자는 말합니다. 애초의 인간은 하나였다고, 이른바 결핍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함을 갖추고 있었다고 그런 인간의 힘과 능력이 점점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자 두려움을 느낀 제우스는 타락한 인간을 반으로 쪼개기로 했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힘은 약화되고 개체수는 늘어나 신을 경외하는 인간이 더욱 많아 질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우스의 의도대로 되는가 싶던 인간들이 차츰차츰 소멸되어갔고, 마침내 급속도로 멸종의 위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둘로 나뉜 인간이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반쪽을 찾기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막상 자신의 짝을 찾아 부둥켜안은 인간들은 정작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러다 일간 멸종이 되겠구나' 생각한 제우스는 두 번째 개입을 시도했습니다. 인간 생식기의 위치를 바꾸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남자는 여자 안에 생식을 했고 여자는 자궁임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사랑의 큰 기쁨중 하나인 남여의 관계가 생겨났고, 한편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끼리 만난 인간들은 생식과는 관계없는, 여분의 쾌락으로, 또 깊은 우정으로 즐거움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반쪽과의 포옹을 풀고 각자의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때부터 인간은 다양한 문화 활동을 만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만나야 불완전성을 벗고 완전해 진다는 이야기인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어쨋든 이렇게 온전함으로의 회복운동인 잃어버린 반쪽 찾기는 야속하게 대부분 우연을 가장해 다가온다고 합니다. 신이 주관하기 때문이지요. 예측이 불가능하며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성을 갖습니다. 한마디로 명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필자는 말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하늘이 맺어준 사랑은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과정에서 반쪽 찾기 여정보다 훨씬 험난하고 힘들어집니다. 사랑은 마냥 친근함과 황홀함과 기쁨만 품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황홀하지만 잔혹하고, 기쁘지만 갈등과 상처를 품고, 친근하면서도 동시에 낯설고, 안정성과 동시에 불안정성을 껴안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은 투사된 상대방의 결핍을 기꺼이 포용하는 데까지 나아가죠. 이러한 사랑에서 사랑에너지가 생성되고 발전되어 가며, 사랑은 그 에너지로 늘 과거와 다른 새로운 것들을 생산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되고 힘들지만 희망을 갖을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반쪽끼리 합쳐서 하나가 되면 분명 삶의 열망은 커지고 강해질테니까요. 결핍된(없음) 인간과 결핍된(없음) 인간이 사랑을 나누면 희한하게도 결핍이 매워지며 사랑의 역동성이 충만(있음)해지는, 말하자면, ‘없음+없음

=있음’이라는 마법의 세계가 열립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은 비록 온전함으로의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할지라도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는 열망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필자는 말합니다. 역시 혼자는 안된다는 말인듯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고, 또한 생각하게 된다고 하죠. '결혼은 속박당하는 거라는데, 내 고유의 인생은 이제 끝장인가, 행복한 구속을 얻기 위해 자유는 박탈당해도 되는 건가.' 뭔지 모를 불안감과 책임감이 엄습해 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반쪽을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죠. 그러한 여정을 포기한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은 '그대는 너무 이기적이고, 안중에는 가족도 사회도 없고, 오직 개체이고자 하는 그 욕구에만 사로잡혀 있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다.'라고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고 싶지 않고 자아 욕구에 따라 홀로 편히 살아가려는 이기주의자 말입

니다. 그 말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말이라고 필자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존재하는 거니까요. 또한 독신이든 사랑이든 모두 이기적인 경향에서 출발함은 부인할 수 없으니까요.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이기주의의 발현이랄까. 다만 전자 쪽은 개별적 자아실현 내지는 행복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고 후자 쪽은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손을 내밀어 타자를 자신 안에 끌고 와 자아실현 내

지는 행복을 그 안에서 찾으려고 한 것일 뿐, 이기주의의 모양은 서로 별 차이가 없다고 필자는 말합니다. 또한 사회 일부에서, 독신,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이기적이라느니 자아의 욕망에만 빠져 있느니 이런 말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주장하는 필자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사랑을 외면할 권리를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저또한 사랑을 외면하기는 커녕 당장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자는 말합니다. 사랑을 찾지 못하는 것은 외로움과 우울증에 빠진 것이고, 이러한외로움과 우울증의 교집합을 꼽으라면 사회성이 망가진 것 그리고 자기조절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사회성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필자가 주장하는 방법은 무조건 광장으로 나와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우울증에 걸렸을 땐, 스스로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구출해 내는 게 급한 일이므로, 밀폐된 공간에 있는 자신의 몸뚱이를 스스로 잡아채 열린 광장에 있는 사람에게 내던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사랑은 이렇듯 고립된 자신이 열린 공간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는 행위인 것이고 우울증은 열려 있는 공간에 있는 자신을 밀폐된 공간으로 밀어 넣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외로움에서 우울증으로 흘

러가는 방향과는 반대인, 역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필자는 끝으로 오늘날,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열악해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마냥 사랑을 하라는 둥, 사랑시대를 열자라는 말을 내놓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필자는 짓눌렀던 사회적 장벽이 해소되는 방향으로 이 사회가 흘러가고, 미래는 젊은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어떤 환경이나 사회적 방식이 반드시 출연할 것이

라 굳게 믿는다고 말하고, 개별성의 자아실현이나 개체성의 욕망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사회공동체 질서 유지도 잘 작동될 수 있는 그런 사회시스템이 곧 도래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하며 책을 마무리합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점은 사랑이 어떠한 형태로 내게 다가 오든지 그 사랑에 내 자신을 내어놓고 거기서 오는 기쁨과 행복 뿐만 아니라 슬픔과 어려움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즐겁게 받아들여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필자가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또한 개인적 행복과 사회적 행복이 공존하는 세상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