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다

 

내가 어릴 적 살았던 시골 마을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옛날에는 마을의 식수를 책임지면서 물 길러온 아낙들의 작은 쉼터 역할을 했으리라. 당시 나는 뚜껑을 열고 우물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컴컴한 우물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서서히 물빛이 보였다. 우물에 빠지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어둠 속에 드러나는 그 물빛을 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자주 우물을 찾았다.

번역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는 우물을 들여다보며 느꼈던 감정을 다시금 맛보게 되었다. 난해한 외국어 문장과 마주했을 때 처음에는 깜깜한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가도, 읽으면 읽을수록 우물 안 물빛처럼 서서히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처럼 외국어로 된 문장을 모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어두컴컴한 우물에서 서서히 물빛을 발견해나가는 과정과 닮아 있었다.

점점 번역이라는 우물에 깊이 빠져든 나는 번역가의 길을 가리라 결심했지만, 정작 번역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나에게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은 우리 사회에서 번역이 왜 필요한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번역은 반역인가에서 말하는 반역이란 무엇을 뜻할까. 이 표현은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였던 로베스 에스카르피의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에서 왔다. 한 언어로 쓴 글을 다른 언어로 완벽하게 재현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번역반역으로 표현한 것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번역으로 인해 작품의 흠이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라는 말까지 한 점을 보면 번역은 정말 불가능한 작업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번역은 반역일까? 책의 저자는, 역사상 어느 문명이든 다른 문명과 처음 접촉할 때 가장 먼저 수행하는 작업이 번역이라고 하였다. 번역은 한국어 사용권에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를 존재하도록 하는 가치 있는 행위이자 에서 를 창조하는 일이다. 번역이 왕성해야 우리말도 풍부해지고 우리말이 풍부해져야 세상의 지식이 우리의 지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오히려 번역은 반역이 아니라 애국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저자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정부 내에 번역국을 설치하여 서양 서적을 조직적으로 번역해온 역사를 들며,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건이 바로 번역 활동이라고 했다. 그만큼 번역은 사회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하고, 나아가 그 작업을 수행하는 번역가야말로 꼭 필요한 사람이다.

이렇게 막중한 임무를 띤 번역가이지만 그들이 처한 번역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다. 번역에 쏟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그 보상은 미미하고, 디지털 문화의 확산으로 출판 시장은 계속 침체 상태이며, 우리 사회는 번역의 필요성마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대학에서는 교수라는 신분과 명성에 의지하여 조교나 학생들에게 대신 번역을 시키는 교수들이 많다고 한다. 작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는 번역의 테크닉이라는 책에서 이들을 매춘교수라 부르며, 우리 번역 문학의 위상을 실추하는 장본인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번역은 반역인가는 번역의 역사를 시작으로, 번역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처한 번역의 상황과 비전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는 책이다.

저자는 사회가 발전하는 데 번역의 역할이 무척 중요한 만큼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언젠가 번역이 합당하게 대우받을 날이 온다고 말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번역은 반역인가를 읽고 나는 번역의 필요성을 새삼 실감하였다. 번역가란, 우물 안 물빛을 발견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식에 목말라 하는 독자에게 문화라는 우물물을 길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 또한 깨달았다. 번역이 반역이 될지 아닐지는 결국 우리 번역가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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