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최준식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민족 고유의 종교로서 중국에 도교가 있고, 일본에 신도가 있다면 우리에겐 무엇인 있을까? 바로 ‘무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도교나 일본의 신도가 그 나라의 민중 종교로써 충분히 기능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무교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잊혀져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일까?

이 책 안에는 놀랍게도 현재 무당의 수가 대략 20~30만 명 정도라고 쓰여 있다. 대비하여 신도의 수가 가장 많다는 기독교의 목사가 10만 명이 못된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수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의 제일의 종교는 무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저자는 ‘무교’는 어엿한 하나의 종교이며, ‘무당’은 신도가 신령과 만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어엿한 사제이며, ‘굿’은 엄정한 체계를 갖춘 엄연한 종교의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 안에는 무당이 되는 과정, 굿의 종류와 내용,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령들에 관한 얘기들이 매우 재밌고 흥미롭게 쓰여 있다.




저자는 ‘한국은 무교의 나라’라고 과감히 주장한다. 극성스런 기독교도가 들으면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을 주장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는 반드시 그 지역의 토속 신앙과 습합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오리지날’을 유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불교와 한국의 불교와 일본의 불교가 부처를 신앙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내용을 달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나라의 토속 신앙과 외래 종교가 섞인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외래 종교 역시 우리 토속신앙인 무교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종교의 이름이라는 외피를 벗겨보면 내용물은 오히려 ‘무교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은 거의가 무교의 신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무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이고 특징적인 것은 ‘주술적인 기복신앙’이라는 점인데, 우리나라의 불교나 기독교를 보면 현세 기복적 특징을 전혀 벗어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무교적이다.

우리나라이 기독교는 ‘유독 열광적인 기도와 방언이 중시되는 부흥회 같은 집회를 좋아하는데’(p.140), 여기에서 무교의 굿과 같은 열성과 무아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 책에서는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라면 거의가 한다는 새벽기도가 사실은 옛날부터 어머니들이 새벽에 정안수를 떠놓고 손바닥을 비비면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던 풍속에서 연유한 것인데, 이 또한 무교적인 것은 아닌가?




우리는 보통 무교를 ‘무속’이라고 하여 불교나 그리스도교에 비교하여 원시적이고 저급하며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긴다. 종교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도 어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다. 초월성에 대한 믿음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는 그 종류와 관계없이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다만 사랑이나 자비 등 인간 윤리의 보편성을 교리로 하는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넘어 전파할 수 있고, 여기에 교리를 일관되게 체계화하고, 다시 권력과 결탁할 때 이른바 ‘고등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종교가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떤 옷을 입어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인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말고 무교를 우리의 근본 신앙으로 인정해 우리 문화 발전에 유용하게 쓰자는 것’(p.6)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책 말미에 ‘한국인들은 잃어버린 종교적인 정체성을 찾아 표리가 일치하는 정신적 성숙을 달성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런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가타부타하기는 어렵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하나의 모색(摸索)으로써 돌아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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