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정지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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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인가, 등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발 좀 자르라고 잔소리 하던 엄마의 말에도 아랑곳 않던 내가, 나의 긴 머리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꼈던 때. 그때부터였나. 하루하루가 점점 무기력해진 것은. 



 한동안 미쳐있던 노래를 들어도 그저 그랬고, 좋다는 소설을 읽어도 그냥 그랬다. 
내가 인생을 얼마나 살았다고 벌써 지루함을 느낄까. 가장 파릇파릇해야 할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대체 왜. 아, 난 사실 이런 청춘의 단어들을 보면 숨이 턱턱 막혀 온다. 푸른 것, 새싹같은 것, 싱싱한 것. 가장 예쁘고 좋을 때. 분명 봄이라는데, 정작 나는 우악스럽게 내리는 빗속에서 장마가 끝나기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있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에서 좋았던 것은, 계절이 여름이었다는 점이다. 눅눅하고 축축해서 힘이 쫙 빠지게 만드는 그런 날씨와 특별할 것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 내 모습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조금 당황하기까지 했다. 내 모습과 소설 속 '나'의 모습이 너무도 흡사해서.성격이나 자라온 환경이 비슷한 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무기력함이 '나'에게서도 보였기 때문이다. 바쁘게 무언가를 준비하며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서 뚝 떨어져나와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약간의 열등감과, 약간의 패배감과, 약간의 질투심, 그보다 더한 무기력함에 지배 당하며 말이다. 


 가장 답답한 건, 내가 왜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된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호소할 만한 크나큰 아픔도, 다시 일어서지 못할 좌절의 경험도 없는데.
아리송하면서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하다. 이런 상태가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 


 작품을 읽으면서 결말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요조가 PD시험을 보러갔을 때는 덜컥 붙어버릴까 내심 조마조마했고(떨어진 걸 알고 잠수탔을 땐 또 어디선가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까 그것도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나에게 요조라는 이름은 자살과 너무 가깝다), 세 사람이 다시 합쳐 즐겁게 살아가면 그건 또 그것대로 석연치 않았을 것 같다. 조금 이기적이지만, 그들에게서 성공의 모습을 보면 또다시 자괴감에 빠질 것 같았다. 그래서 짐이 가득 쌓인 방에서 요조를 발견했을 땐 크나큰 안도감과 함께 어딘가 든든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의 성장이 성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좋았고, 각자가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었다. 


 책에는 내가 느끼는 현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예쁘게 포장되지도 않았고 과하게 어둡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그것에 어울리는 결말, 그 속에 표류하는 여러 감정들을 느끼면서 함께 공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우울했던 날엔,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혼자만 고립된 섬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홀로 남겨지는 게 무서워 부지런히 움직여봐도 정신차리면 제자리걸음이라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요즈음,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나의 현실이, 나만의 현실은 아니라는 것. 분명히 나와 같이 느끼는 누군가가 또 있다는 것.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깊은 위로를 받고,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작품 말미에 작가님께 고맙다는 말을 속으로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오늘 나는 머리를 싹둑 잘랐다.
미용실에 가기 싫어하는 나를 위해 가끔 머리를 잘라주는 언니에게 조르고 졸라서.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모종의 쾌감과 함께 속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내친김에 염색까지 해서 지금은 가볍고 새로워진 머리를 살짝 흔들어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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