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신승리. JTBC 예능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 MC 허지웅 씨가 정신승리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 그 뜻을 단번에 알 수 있어서 짜증이 났다. 취업이 안 되고 노동 시장 규모가 계속 줄어든다는데 졸업예정자라는 신분으로 남아 있다는 것으로 약간 안심하는 걸 정신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단어, 정말 괴상망측하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야기는 사실 정신승리라는 단어와 딱 맞는다. 내일을 내다볼 수 없는 젊은이들은 오늘의 소소한 편안함을 즐기는 듯해 보인다. 특별히 즐거운 일이 없어도 더 나빠지지 않았다면 그걸로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으니까.

 

이 책에서의 행복은 엄밀하게는 자기 기만과 자기 만족이 뒤섞인 애매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라서도 매우 다른 형태로 나타날 행복이다. 그래서 20~30대를 묶어서 '보통 이러하다'라고 말하는 세대론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보통'은 없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만 있을 뿐이고, 세대를 설명하는 사회적/문화적 대세나 경향이 있다손 치더라도 외피에 불과하다. 그래서 난 이 책이 불편했던 것 같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 태어나 자란 청년들은 왜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가?'라는 질문 자체는 흥미롭지만, 이들이 한 세대로 묶인다고 공통된 출발점에서 나고 자라진 않았을 것 아닌가.

 

한국에서도 상황은 같다. <88만원 세대>가 일으킨(그리고 부추긴) 세대론은 '세대'를 뭉뚱그린다는 점에서 이미 분석 수준으로서는 한계점이 명확하다. 그리고 (이끌어나갈 미래가 있다는 가정하에) '미래'를 이끌어나갈 것만 같은 청소년과 청년 세대만 주요한 분석 수준이 아닌데 사회는 늘 이들에게만 주목한다. 그래서 세대론은 더 사회의 소통을 어렵게 하고 세대론의 주 대상이 되는 '청년'들은 졸지에 '낭만적 청춘'이 됐다가 '절망사회의 행복한 젊은이들'이 됐다가 하는 것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책 제목이 품은 이 형용모순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어떻게 절망의 나라에 행복한 젊은이가 생길 수 있나.

 

행복의 배경으로 절망이 깔려 있는 이 시대에 젊은이들은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 '곱게 늙는 것'이야말로 진짜 정신승리가 아닌가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