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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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소통은 너라고 말하는 것, 타자를 호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너로서의 타자를 호출하는 것은 "근원적인 거리"를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디지털 소통은 모든 거리를 파괴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타인을 최대한 가까이 내게로 끌어오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타자를 소멸시킨다. <p.101 / 타자의 언어>

이웃과의 소통, 애정을 수신했습니다. 랜선친구, 모니터 뒤에 사람이 앉아있어요 등등의 말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모니터(그것)를 사이에 두고있을 뿐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채 리뷰 몇 자만으로 만족하거나, 직접 꽃을 길러보지 못한 채 '박제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공들여 이해했었던 동일자의 지옥은 어쩌면, 이곳 작은 핸드폰 안에서 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험과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상태로 남아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떤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사회 매체들은 사회적인 것의 절대적인 소멸단계를 보여준다. <P.10 / 같은 것의 테러>

>> 같은것들로 가득 찬 곳에서 다른 나?

"나는 나다"를 알기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타자일 것이다. 나는 수 많은 타자들에 비춰봐야지만 알 수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나로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나에 반反하는 타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병철의 책들은 끊임없이 우리가 '긍정적으로'받아들였던 단어들에 대해서 나열한다.

투명한 / 긍정적인 / 매끄러운 / 가속화 / 질서정연함

비가시적인 / 부정성 / 거친 / 천천히 되어가는 / 무질서함

그동안의 책에서 깨어진 단어에 대한 편견들을 가지고 이번 책을 대하면 '역시' 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 투명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사회. 긍정과잉으로 '안돼'를 외치지 못하는 자아의 피로함과, 역시나 반항없이 매끄럽고 돌아볼 수 없이 가속화 되어있으며 무논리로 맞설 수 없는 질서정연한 사회. 한병철은 이번엔 '타자'에 집중한다.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있는 거의 모든 책들을 완독했다고 생각했는데 지치지도 않고 또 내 놓은 책은 '타자의 추방'이다. 이쯤되면 제목만 보고도 아 이 사람이 뭘 이야기하려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온다. 저자의 집필의도와는 별도로 세상에 나온 이 책들과 나는 어떤 의도로든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선입견이다. 이미 <에로스의 종말>에서 동일자의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다. 나는 한병철과 이만큼 소통이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같은 것을, 정해진 구역 내에서의 특별함을, 결코 튀지 않는 즐거움을 원한다. 이미 타자는 나와 같아져 버린 것이다. 다름 없는 사람. 그저 상업사회의 부품으로서의 타자는 나와 너의 관계 즉 만남을 형성하지 못하고, 단순히 나와 그것의 관계로서 소멸되어 버린다.

>> 타자는 책상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서를 접하다보면 '타자'는, 단순한 인간관계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 국한된 단어가 아니다. 타자는 나의 경계선 밖에서 나와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육체를 이야기할 수도있고 그 부분을 제외하고 내가 인지한 나의 에고일 수도있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가끔 나는 나를 타자화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의미를 갖는 타자의 핵심은 나와 관계를 맺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 속 세상의 '이웃'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집에 숟가락이 몇개인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좀 더 들어가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런것들을 묻는것은 실례가 된다. 사생활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타인이 궁금해지지 않는 사회. 이 사회에서 '이웃'은 더 이상 '타자'로서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저 넷 망속의 이웃 혹은 서로 이웃은 나의 매끄러움(저자는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매끄러움은 저항하지 않는, 개성이 없는 '이상적인 소비자'라고 했다.)을 표현할 '그것'에 불과할지도.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오늘날 낯섦은 정보와 자본의 순화를 가속화하는데 장애가 되므로 달갑지 않게 여겨진다. 가속화 강제는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획일화 한다. 과잉소통의 투명한 공간은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기도 없는 공간이다. <P.61 / 소외>

우리가 타인에 무관심해 진 것은 어느 순간부터일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개인주의와 섞어서 인식하고있다.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선까지이고, 개개인의 자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생활이다. 노터치. 그러나 우리는 사회속에서 타인과 살아가야 하며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교류를 원한다. 그래서 비교적 쉽고 매끄러운 방향으로 소통을 택한다. 즉 타인에 대한 지극한 무관심의 공간에서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느낌'만을 갖고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옆집문을 열지 못한다. 내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통을 하기 위해 옆집 문을 열 사람은 없겠지.)

타자가 현존하지 않을 때, 소통은 정보들의 가속화된 교환으로 전락한다. 이런 소통은 어떠한 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로지 연결만 낳을 뿐이다. 그것은 이웃이 없는, 어떠한 친근함의 가까움도 없는 소통이다. 경청은 정보의 교환과는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한다. 경청할 때는 어떤 교환도 일어나지 않는다. 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P.115 / 경청하기>

>> 그렇다면, 타자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세계가 '그것'이 아닌 '그'와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청이다. 랜선 세계가 결정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쏟아낼 뿐 경청하지 못한다. 음성이 없는 텍스트의 집단에서 나는 그저 마음에 드는 글을 읽었고, 생각을 뱉을 뿐이다. 훌륭한 상호작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방향이다. 나는 글을 글로써 재창작할 뿐이고 원작자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의 생각이 훌륭하거나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 것 역시 텍스트로 옮기기엔 뭔가 부족해진다. 혁신적으로 출발했던 인터넷망은 이렇게 모든 자의 글들을 수집할 뿐이다. 양방향이라고 생각했던 서로간의 댓글은 사실 각자의 일방향이었던 것이다.

오랜시간 블로그를 해 오면서, 나는 많은 분들을 안다. 그리고 그 중에선 나와 '그것'의 관계를 끝내고 '그'의 관계가 된 사람들도 있다. 바꿔 말하자면 인터넷 상의 인연이 으쌰으쌰 현실세계의 이웃이 된 것이다. 아이디로 존재했던 그것이 타자가 되는 순간, 관계는 회복되는 것일까?

소란스런 피로사회는 듣지 못한다. 어쩌면 미래의 사회는 경청하고 귀 기울이는 자들의 사회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혁명이다.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P.119 / 경청하기>

시스템속에서 시스템의 부품으로서 존재하는 타자가아닌 '그것'. 인간성의 회복은 '경청'함과 타자를 매끄럽지 않게 대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칸트는 분명 상업정신의 악마성을, 나아가 그 무이성성을 몰랐다. 그의 판단은 관대했다. 그는 상업정신이 "긴"평화를 낳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그저 가상일 뿐이다. 상업정신은 오로지 계산하는 오성만을 부여받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성도 없다. 그러므로 오로지 상업정신에 의해, 돈의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시스템 자체에도 이성은 없다.<P.31 /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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