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오준호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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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물학자를 이보다 감동시키는 그림을  알지 못한다.'(326쪽)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장류학자로 일컬어지는 프란스 드 발. 그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네덜란드의 남부 도시 덴 보스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16세기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이 도시의 이름을 따 자신의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노천시장에 서 있는 보스의 동상을 보며 성장했던 드 발은, 보스의 대표적인 작품인 경이로운 제단화 <세속적 쾌락의 정원>으로 생물학, 윤리학을 종횡무진 연결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행히 집을 파헤쳐(?) 보니 보스의 <세속적 쾌락의 정원>의 전체 도판이 들어있는 큰 책이 있었다. 프란스 드 발처럼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제56전시실의 이 그림 앞에 멈추어 있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책장을 넘겨갔다(드 발은 이곳으로 들어갈 때 성소(聖所)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생물학자의 이같은 풍부한 감수성이라니!).

 

보통 이 그림을 해석할 때는 인간과 기괴한 생물들이 함께 행복을 누리는 중앙 그림을 '지상낙원의 정원, 에덴동산'으로 보고, 오른쪽 그림인 무시무시한 지옥에서 신의 계율을 어긴 인간과 생물들이 끔찍한 벌을 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드 발은 영장류학자다운 독창적인 눈으로 이 그림을 본다. 중앙 그림은 우리의 자연 상태에 대한 묘사이며, 거기에는 종교적 혹은 도덕적 해석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또 왼쪽 그림에서는, 천국이 한 번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조금씩 복잡해졌을 거라고 암시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해낸다. 나는 이 대목을 보며 감동을 받았다. 네덜란드의 덴 보스에서 다른 시대에 태어난 두 사람. 보스는 진흙 웅덩이에서 기이한 온갖 생물들이 나오는 그림을 그렸고, 500년이 지난 후 프란스  드 발은 이 장면에서 인간 역시 하찮은 기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하찮은' 기원. 인간의 손은 어류의 앞지느러미에서 유래했고 폐는 부레에서 진화했다. 신체 뿐 아니라 마음과 행동의 영역도 마찬가지라고 드 발은 역설한다. 종교는 인간의 도덕성이 특별한 기원에서 유래했다는 믿음을 주입해왔지만, 이 세계적인 영장류학자는 풍부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우리의 이타적인 충동들이 영장류의 오랜 계통 속에서 진화된 결과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성은 '위에서 아래로' 주어진 것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드 발은 인간이 도덕적인 행위를 하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하다는 명제에 회의적이다. '사회에서 서로 믿고 살려면 꼭 필요한 자기 조절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16쪽)라는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을 느낀다. 분명 인간은 2,000년 남짓 된 현대적 종교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자신들의 공동체가 잘 기능하는지 걱정해 왔을 거라는 이야기에도 세차게 끄덕끄덕. 거기에 드 발은 유머러스하게도, 생물학자들은 그 정도의 시간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통 큰 생물학의 세계.^^;

 

종교의 역할을 줄이고, 전능하신 신보다 인간의 잠재력에 강조점을 찍어야 한다고 말하는 드 발이지만, 그는 무신론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읽다가 도킨스 아저씨의 입장이 되어서 다소 억울(?)한 기분이 들어 흥분하기도 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려 주느라 같은 진화론자를 너무 깎아내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_-;;

뭐 이런 억울함은 잠시 접어두고, 도덕적인 사회의 핵심 요소들을 반드시 종교에서 가져올 필요가 없긴 하지만(그 핵심 요소들이 바로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신처럼 해석이 열려 있는 무언가의 존재 여부를 놓고 흥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340쪽)는 그의 입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책 마지막에서 그는 보노보의 입을 빌려 무신론자들에게 멀리 바라볼 것을 촉구한다.

 

인간의 이타적인 충동과 공감 능력이 영장류의 오랜 계통 속에서 진화한 결과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증거들은 매혹적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외부의 고상한 원칙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동물의 행동을 관찰할 때 인지할 수 있는 '변변치 않은 동기'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인간이 진화하면서 스스로 도덕성을 갖추어왔다는 것을 무색케하는 비극적인 일들이 흘러넘치는 세상이지만, 그래서 때때로 정말 우리에게 그런 내재된 도덕성이 있는지에 대해 회의하고 절망하고 싶지만, '진화된 본성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도록 이끌어준 손이었다'(345쪽)는 사실은 희망이 될 것이다. 오히려 비극적인 세상일수록 더더욱 간절히 붙잡고 놓치 말아야 할 그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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