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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25
T.S.엘리어트 지음, 황동규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4월은 잔인한 계절'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시구의 <황무지>.
어느날인가 라디오를 들으며, 늘어지는 여름날의 오후를 힘겹게 지내고 있을 때였다. 일상의 무료함이 지나쳐, 이제 세상에 날 흥분시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대로 늘어져 있다가 물로 변해 녹아내리는 건, 아닌지. 정말로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때였다. 4월은 잔인한 계절.. 의 낭독은 나를 순식간에 환상의 꿈으로 몰고 갔다.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을 쯤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번지는 태양을 보며 생각했다. 엘리엇도 이런 태양을 보고 시를 썼을 거라고, 이처럼 불타오르는 해질녁을 보고 말이다.
그리고 몇해가 지나, 만나기로 한 상대에게서 바람을 맞고 건대입구 근처를 헤메다가, 해질녁의 태양을 보고 근처의 서점에 들어가 <황무지>를 샀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한밤이 되기를 기다려, 황무지를 읽었다. 히야신스아가씨와 페르시안 잠수부의 수장,
내가 시를 이해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우울함과 낮은 읍조림, 슬픔에 지친 일상의 향기. 한밤의 고요함과 엘리엇의 시, 18세기 유럽의 한 골목을 이끌 듯, 감상에 젖게 하는 시. 황무지를 나는 나의 스무살과 함께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