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3년생. 권진영.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언뜻 기억이 나지 않아 현재부터 나이를 거꾸로 가늠하는 것이 편해진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주로 제수씨. 형수님, 쌍둥이엄마로 불리우다가 내 이름을 권진영이라고 소개한 것은 또 얼마만인가요.

  83년생 권진영이라는 내 소개가 머쓱하기만 한 나는, 작년에 쌍둥이 딸 둘을 출산하고 작은 사무실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부지런히 살고 있는 평범한 주부입니다. 그나마 파트 타임으로라도 내 자리 보전되어 있는 것이 여느 대한민국 엄마들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육아의 도돌이표 같은 하루하루를 감지덕지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 평범한 직장맘.

 

  나와 같은 시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김지영씨의 인생은 나의 삶과 다름없지요.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먼지 쌓인 일기장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내 인생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더랬습니다.

  예고 없는 남자선생님의 소지품검사.

  달리기 출발자세로 땅에 얼굴을 떨어뜨리고 팔을 짚은 여고생의 늘어진 체육복 안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체육선생님.

  가고 싶은 대학보다 한 단계 낮춰서 가게 되어 속상해 하는 내게 여자가 너무 잘나면 시집 못 간다라는 위로 아닌 위로.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며 여자로서의 공포를 하소연하는 내게 유난떤다는 전남자친구.

  일로 인정받고 싶다는 내게 아이를 갖지 못하는 패배자로서의 자격지심을 성공욕구로 푸는 거 아니냐며 진지하게 걱정해주던, 아들 딸 하나씩 순풍 잘 낳아 잘 키우는 아는 언니의 어설픈 충고.

  버티고 버티다 6년 만에 가진 쌍둥이가 분홍 둘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고개 들었던 시댁에 대한 송구함...

  김지영씨의 이야기는 꺼낼 때마다 보게되는, 내 잊혀진 일기장에 번진 얼룩 같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도 있었네요. 일하는 도중에 애기가 다쳤다는 베이비시터의 전화가 끊기가 무섭게 하던 일을 던져놓고 집으로 달려가면서도, ‘남편에게는 퇴근 후에 이야기해야겠다라며 남편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배려심 많은 아내임을 스스로 기특하게 여겼던 나 아니었던가요.

  여자로서의 권리, 아니 그냥 나의 권리, 나의 욕구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다들 그러고 사는데 뭐 혼자 그렇게 대단하냐며 드센 여자가 되어버린 나는. 그러면서도 그냥 남들처럼 아내로 엄마로 딸로 며느리로 살며 서서히 김지영이 되어가는 나는. 83년생. 권진영입니다.

 

  남들과 다르게 살겠다며 권진영으로 살기 위해 꽤나 치열하면서도 정성스럽게 나의 일상을 일구어 오면서, 하루에도 수십번 난 괜찮다를 외쳤더랬습니다. 그런 내게 김지영씨는 지금. 나는. 괜찮지 않다고. 그리고,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담담하게 다독여줍니다.

 그 아픈 손길에 나 역시 힘내자며, 이 시대 모든 김지영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P.S)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기 위해 컴퓨터 책상에 앉으면서도 저는 남편에게 아기들을 맡기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아기엄마입니다. 남편이 밤에 집에 들어와 컴퓨터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엄마인 내가 하는 건 시간을 빌려야 하는 이벤트가 되어버렸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