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대다수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늘 진실인 것이 아니요, 오히려 편향된 의식을 일방적으로 주입한 허위인 경우가 더 많다. 대중의식이라고 하는 건 대체로 시대사적 주류를 그대로 수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건 굳이 끌어당기지 않아도 저절로 우리에게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것이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발바닥을 적시고 발목을 타고 무릎을 넘어 온몸까지 푹 잠기게 한다. 세계화의 논리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이념도 어느 순간 그렇게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아 시대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느낌이다. 서구 선진국들은 그것이 마치 우리 시대의 절대적 진리이자 마땅히 따라야할 순리인 것처럼 몰아세운다. 이 조류에 역행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도태되어야할 구시대적 퇴물로 취급받는다.

과연 그럴까? 현재의 사회 분위기에선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행위이다. 하지만 난 우리 시대 많은 이들이 이런 의문 부호를 던져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 대다수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기는 한쪽으로 치우친 경도된 사고가 놓칠 수밖에 없는 숨겨진 역사의 다른 부분을 보여줌으로써 주류이거나 그 반대이거나 세상을 좀 더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 주류에겐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 주류의 파도에 경도된 대다수의 일반 대중들에겐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 옳은 것은 아님을 느끼게 한다.

저자 장하준은 비주류의 소수자편에 서 있다. 그는 세계화라는 일방적인 논리로 약소국을 몰아세우는 강력한 적들의 반대편에 서서 그들을 막아낼 튼튼한 성벽을 쌓고자 한다. 날카로운 칼날을 빼어들고 허리를 곧추세운 꼿꼿한 자세로 상대를 응시하는 전장의 장수처럼 그는 밀려오는 적을 향해 우렁찬 함성으로 포효한다. 당신들의 세계화 논리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역사가 증명하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허구적 논리를 이제 그만 거둬들이라고. 내면의 양심을 거스르는 기만적 행위를 이젠 스스로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비록 그의 목소리가 허공의 메아리에 그칠지언정 그는 역사의 소수자편에 서서 그들의 논리를 대변하며 강자들이 내세운 허구적 논리에 내포된 검은 의도를 파헤치고자 노력한다.

그의 주장이 독자의 심중에 파고들 수 있는 것은 단지 소수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일반적 정서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명확한 증거도 없이 세계화를 옹호하는 선진국의 주장을 강자의 횡포로 몰아세웠다면 그의 논리는 설득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학자적 연구 자세를 시종일관 꿋꿋이 견지한다. 그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서구 선진국들이 어떻게 지금처럼 부유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 발전과정을 더듬는다. 또한 개발도상국 중 나름대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국가군과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결국 좌절해버린 국가군들을 비교 분석하며 국가의 성장 동력이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상세하게 제시한다. 그것이 서구 선진국의 세계화 논리를 반박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서구 선진국의 성장 동력은 결코 자유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호관세를 통한 자국의 산업보호와 그를 바탕으로 한 유치산업의 육성이었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던 자유주의 경제 시대에도 실은 서구 선진국들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보호정책을 강구했고 실제로 그런 정책을 강력히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18-9세기 세계 최대 무역 강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19-20세기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미국이 모두 자국의 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외국 상품에 고율의 보호관세를 부과하면서 자국의 유치산업을 키워갔다는 것을 명백한 증거를 들어 보여준다.

패전의 쓰라린 상처를 딛고 일어선 일본 경제나 그 후 새롭게 부상한 개발도상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본 정부가 자국의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온갖 시련과 반대를 무릅쓰고 도요타를 지원했기 때문에 지금의 렉서스라는 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포스코 기업이나 삼성전자도 국가의 강력한 지원과 비호가 없었다면 결코 지금의 성공을 거둘 수 없었으리라. 이들이 세계화의 논리대로 국내 시장을 개방하고 선진 기업들과 경쟁했다면 어찌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그들의 하청 업체 수준에 머물거나 사업을 접고 그들과 경쟁할 필요 없는 다른 아이템을 찾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시장을 개방해서 자유롭게 선진 기업과 경쟁했기 때문에 부유한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 부유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선후(先後)이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논리는 이미 경제발전의 과정을 통해 그 선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선진국들이 후발주자로서 자신들의 뒤를 쫓는 나라를 깔아뭉개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즉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이 자신들의 전철을 밟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랄한 술책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사다리 걷어차기’이다. 또한 이것이 세계화를 극구 주장하는 서구 선진국들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기본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저자는 세계화의 주장을 조목조목 파고든다. 외국인 투자가 반드시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 공기업의 민영화가 경영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기업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 각종 지적재산권과 특허권 등이 결국 경제적 비용을 더욱 증대시키고 오히려 신기술의 개발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점.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정치적 민주화가 반드시 경제 발전과 상관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경제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국가 재정을 편성해야 한다는 점. 이런 모든 측면들이 세계화의 논리로 무장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그건 국가의 특성에 맞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건 ‘모든 경기장은 평평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똑같은 경기장에서 다 큰 어른과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어린이가 경주하는 꼴인 세계화의 주장으로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신랄한 비판이다. 따라서 경기장은 기울어져야 한다. 최소한 어린이가 자라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출 때까진 국가의 상황에 따라 다른 경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나는 이토록 극명하게 세계화의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한 책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그의 주장은 너무나 날카롭고 예리하다.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세계화 논리의 심장을 파고드는 그의 공격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 만큼 철저하다. 아직도 미적지근한 상태에서 어정쩡한 위치에 서있는 내게 확실한 사고의 이정표를 설정해준 책이다. 세계사의 주된 흐름은 너무나 쉽게 뇌리에 새겨지지만 그 반대편에 선다는 건 약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겪게 마련인데 이 책은 나의 내적 갈등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이처럼 언덕 저편에 서서 세상의 큰 흐름을 면밀하게 살필 수 있도록 계기를 부여해준 저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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