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난 세계 고대 문명 나의 첫 세계사 1
박혜정 지음, 이종균 그림 / 휴먼어린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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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서 지식책으로 넘어가는 어린이 독자를 위한 '나의 첫 세계사' 시리즈]


어린이 대상 역사책은 학교에서 아직 역사 수업을 듣지 않은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잘 풀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이해하기 쉽게', 이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린이가 처음 읽게 되는 '첫 세계사' 책이라면, 그림책과 지식책 사이 어딘가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 한다. 의성어와 의태어, 입말과 같은 문장들, 너무 길지 않은 리듬감 있는 문장들. 그러면서도 최소한 그 주제에서 담아야 할 지식 내용은 잘 담겨 있어야 한다.


<나의 첫 세계사> 박혜정 작가의 책은 능숙하게 그런 줄타기를 잘 해 낸 책이다. '인류의 시작'을 설명하는 단원에는 "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엄청나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어마어마하게 멀고 먼 옛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아주 먼 옛날"하고 끝날 수 있던 표현을 읽으면 리듬감 때문에 재미나게 한번 웃을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가 다른 대륙으로 이동해 가면서, 기후에 적응해 간다는 부분의 설명은 이렇게 표현된다. "추운 곳에서는 추위와 친해져야 해. 더운 곳에서는 더위와 친해져야 해. 사람들은 자연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고 자기들의 문화를 만들어 갔어"


이 책에는 '적응'이라는 단어 대신에, '친해져야 해'라는 입말이 나온다.


농경의 시작 단원에서는 모두가 합창으로 부르는 듯한 느낌의 노래도 등장한다. "밀의 씨앗을 심으면 밀이 자라! 보리의 씨앗을 심으면 보리가 자라! 싹이 났다, 여엉차! 물을 주자, 영차영차!"


이 지점이 되면, 박혜정 작가는 자기 아이에게 그림책을 많이 읽어주던 사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 역사그림책은 역사지식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나의 첫 세계사> 시리즈는 박혜정 작가의 내공과 역량을 그대로 다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초등 저학년 자녀와 조카를 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침대 맡에 스탠드 불을 켜고 아이에게 읽어주는 역사책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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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신령 - 김동식 작가와 함께 출판하기 2기 초단편소설집 상북중학교 편
김동식 외 10명 지음 / 북크루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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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여름 밤에는 기묘한 이야기가 고파진다.
1.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누군가를 돕는다. 그러자 상대는 고마움의 댓가로,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한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하면 좋겠다’하고 혼잣말을 했을 뿐인데, 이미 소원은 하나 지나가 버린다. 남은 소원은 이제 단 두 가지뿐.
그러나, 꿈꾸던 이상을 현실로 누리며 행복에 겨워하던 주인공의 이야기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버린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이가 “단, 이것만은 꼭 지켜야 하네”라고 덧붙인 당부를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
이런 이야기 전개에서 독자는 주인공이 ‘꼭 지켜야 한다는 단서 조항’을 지키지 않을 것이며, 그 이후에 어떤 비극이 초래될지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소원은 들어주겠지만, 이 한 가지는 명심해”, 이 문장이 나올 때마다 이미 곧 일이 벌어지겠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2. 단편 소설집 <돼지신령>은 그런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소원을 들어주는 베개, 시험을 잘 보게 해 주는 알약, 답을 척척 알게 해 주는 칠판, 미래를 알려주는 저금통. 주인공들은 소원의 매개들을 만나게 되고, 이전과는 다른 일상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들은 각각 다른 전개로 펼쳐진다.
이 10개의 단편은 울산 상북중학교 학생들이 직접 쓴 작품이다. <회색인간>의 김동식 작가와 북크루의 김민섭 작가의 코칭으로 학생들이 ISBN 도서번호가 부여된 제대로 된 책을 발간했다.
각각의 단편에는 각자 자신들이 바라는 소원이 등장한다. 에어팟을 갖고 싶은 마음, 얼굴이 예뻤으면 하는 욕망, 시험 문제를 잘 풀어내고 싶은 마음. 작품에는 2021년 청소년들의 마음이 투사되어 있다. 내 삶을 드러내야 하는 에세이와 다르게 소설은 내 욕망을 에둘러 투사할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더 솔직한 기록이 될 것도 같다.
3. 이 책은 현재 청소년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는 미덕 이외에, 소설의 가장 근본적인 미덕. 바로 재미가 있다.
“마지막 셋째, 첫째 설명을 절.대! 어기지 마세요. 그것만 지키신다면”. 이런 구절에 매료되지 않을 독자가 어디 있을까. 주인공이 저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를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다.
<바라는 대로> 단편에서는 할머니 집에서 베개를 베고 잠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저런 베개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길 무렵, “병원 기구들의 잡음이 적막한 입원실에 울려 퍼진다”라는 문장 하나에서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어 버린다. “혼수상태인 석민의 입꼬리는 미묘하게 올라가 있다”라는 마지막 한 구절까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글이다. 만화가 강풀의 <조명가게> 못지 않은 풀롯 전개였다.
<신기한 약> 단편에서는 알약을 먹으면 공부를 잘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나중에 결국 약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게 되었다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찰나, “몇 년 뒤, 큰 아들과 딸이 각각 15점이라는 성적표를 들고 주원이 앞에 섰다.”라는 문장이 시작된다. 영화 한편을 보고 이제 극장 불이 켜지고 일어나면 되겠다 하는 시점에, 2탄을 예고하는 듯한 떡밥 하나가 등장하는 느낌이었다.
<악성 어플> 단편에서는 글의 화자가 핸드폰 어플이었다. 설정부터 독자들의 허를 찌르더니. “괜찮다. 어차피 나는 새로운 친구를 찾았다”라는 문장에서는, 공포귀담 속에서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한 방이 떠오른다.
<칠판>이라는 작품은, 오오, 정말 중학생이 쓴 건가, 와, 묘사 필력 좋다.
4.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에 한 번 소원을 들어준다는 만화 <모래요정 바람돌이>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환상특급>의 기묘한 스토리에 매료되었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돼지신령>은 한여름 밤에 야외 평상에서 도란도란 기묘한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에 딱 어울리는 책이다.
휴가지에서조차 핸드폰만 쥐고 있을 초,중,고딩 자녀를 두신 부모님이 자녀에게 건네주기 딱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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